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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출판 가하 (09/24)
- 3,500원
[eBook]폭풍 속의 햇살 1권
박미연 지음도서출판 가하2015.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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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환경 | : PC/아이폰/아이패드/안드로이드/타블렛 |
| 독자평점 | :  [참여수 0명] |
| 듣기기능 | :  TTS 제공 |
| ISBN | : 979-11-295-825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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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품 소개
“약혼은 사랑을 전제로 해야 하지만, 난 민나경 씨를 사랑하지 않고 앞으로 사랑하게 될 거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아. 그래도 이 약혼을 하겠어?”
새해가 막 시작되던 순간에 발생한 대테러로 인해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고, 이와 관련돼 민나경의 삶도 한순간에 달라졌다. 그리고 폭풍 같은 그녀의 삶에 발을 들인 정은혁도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마는데…….
“그렇게 할게요. 어떤 상황이 생기더라도 은혁 씨 믿을게요.”
“그런데 말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지금 나한테 해줄 수 있는 건 섹스뿐이야. 그런데 그건 싫다.”
“왜요?”
“보상으로 받는 섹스를 너라면 하겠니? 네가 그런 마음을 아예 안 가진다면 몰라도. 지금 넌 그런 마음으로 그럴 것 같아서 싫어.”
2. 작가 소개
박미연
필리핀에서 거주 중.
yuddia@hanmail.net
▣ 출간작
퍼펙트 매치
필연
D-100, 그 후?
황금빛 나날
검은 멍울
폭풍 속의 햇살
3. 차례
#프롤로그
#The lion sleeps tonight
#퐁당퐁당 이사님
#심청이 눈엔 관음증
#균열
#원점
#폭풍
#운명의 웜홀
#돌이킬 수 없는 통도
#잠시 머금은 숨
#누군가는, 이득을 얻는다
#기묘한 다반사
#Ready for what?
4. 미리 보기
나경은 작은 책을 흔드는 남자의 거리낌 없는 친근함이 당황스러웠다. 정진그룹 작은아들이라고 알고 왔는데, 그 생김새는 특출한 연예인 같았다. 최근 핫 이슈를 만드는 연예인같이 부드러우면서도 거친 선이 뚜렷했다.
그 외모와 세련미가 돋보인 매무새에 더해진, 작은 책을 흔드는 여유로운 손짓이 패션잡지 화보를 동영상으로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다가 그 작은아들이 꽤나 유명한 스캔들 메이커란 소문이 기억나 슬쩍 웃음이 났다. 그 소문과 참 잘 어울려, 반박할 수 없었다.
“나 기억하지? 굉장히 오랜만이라 어색하긴 하지만.”
은혁이 손에 든 책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일어나 손을 건넸다. 그 자연스런 친밀함에 나경은 엉거주춤 일어나 손을 슬쩍 잡았다가 바로 걷었다.
“정은혁 씨 맞으시죠?”
“그렇지. 왜?”
“전 처음 뵙는데, 혹시 이전에 뵌 적 있다면 기억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나경이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자 은혁은 실수했다는 민망함에 얼른 앉았다. 은혁이 과학고등학교에 다닐 때 자그마한 초등학생인 나경을 꽤 자주 봤다. 수재로 불리던 나묵을 교문 앞에서 기다리던, 그 작은 나경이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짓궂게 놀린 게 숱한데 정작 당사자는 기억도 못하는 듯했다. 무안한 은혁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일전에 뵌 적 있어 반갑게 인사한다는 게 실례한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나경은 재빨리 사과하는 은혁이 더 당황스러워 눈만 끔벅였다. 화보 속 자유분방한 캐주얼 차림의 남자가 한 페이지 넘기자마자 근엄한 정장 차림으로 확 바뀐 듯, 그 분위기가 전환됐다. 더구나 지나치게 빠르게 변환됐는데도 자연스러워 어리둥절했다.
“아니에요, 뵌 적 있으시다면 기억하지 못하는 제가 죄송하죠.”
이 자리를 사과로 마무리할 듯 침묵이 흐르는 사이 직원이 음료를 주문받아 갔다가 내왔다. 긴 침묵에서 빠져나온 건 은혁이었다.
“나묵인 잘 지냅니까?”
아이스티 잔을 들던 나경은 갑작스레 튀어나온 오빠 이름에 당혹했다. 이젠 사람들에게 다 잊힌, 한때의 수재라고만 생각하다가 타인에게 나묵이 언급되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경은 답이 마땅치 않아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잔을 도로 내려놓았다.
“의대 진학 후 하도 소식이 없어 다들 궁금해했습니다. 아마 전문의가 되었죠?”
“네, 전문의 됐죠.”
“어느 과에 있습니까?”
“그게…… 내과요.”
“신성의료원에선 보지 못했는데 다른 병원에 근무하는 겁니까? 아니면 개원?”
“그게…… 지방이요. 오빠가 소소히 살고 싶다고. 서울이 답답하대요.”
“그렇군요. 서울대 동기들도 소식을 거의 모르더라고요.”
은혁이 근황을 묻자 아찔한 나경은 입안을 깨물며 급히 머리를 굴렸다.
“아, 자퇴했잖아요. 2학년 1학기에. 그래서 아마 동기분들도 모르실 거예요. 나중에 지방 의대로 옮겼어요. 원래 천재들이 좀 시끌벅적한 거 싫어하잖아요.”
나경은 거짓말에 이골이 난 것도 아닌데 준비된 양 술술 나오는 말에 깜짝 놀랐다. 이렇게까지 비호해주고 있는데 나묵은 어디 있는 건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랬군요. 나묵이 성향을 떠올리면 좋은 의사가 됐을 것 같은데. 이렇게 소식을 들었으니 언제 한번 만나야겠습니다.”
“오빠한테 말씀 전할게요.”
“연락처 주시면 제가 직접 연락하겠습니다. 고등학교 친구인데 설마 불쑥 연락한다고 싫어하지는 않겠죠?”
“아니요. 싫진 않겠지만 또 모르잖아요. 제가 먼저 물어보고 연락하라고 전해드릴게요. 죄송합니다.”
허둥대는 나경의 의문스런 태도에 일부러 더 캐묻던 은혁은 슬쩍 당혹했다. 동창으로서 흔한 안부를 물었을 뿐인데 나경의 눈에 역력한 슬픔이 스쳐갔다. 입가엔 고운 미소를 띠면서도 눈은 금방이라도 아련한 눈물이 떨어질 듯했다.
나경의 눈에 담긴 애수와 너무도 대조적인 입가의 미소는 단번에 가면이란 걸 알아챘다. 누군가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그 단면을 우아한 미소와 고상함으로 가릴 수 있다고 믿으며 한 꺼풀 덮어쓰고 사는 그 가면. 은혁은 그 기묘한 대조를 알아챘다.
나경은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피하려 고개를 살짝 틀었다. 그때 가면이 미처 가리지 못한, 습한 눈이 조명을 받아 일렁였다. 은혁은 습기가 투명이 깔려 빛을 가라앉히는 그 눈이 문득 늪 같았다. 알 수 없는 것들이 쌓인 저 늪으로 쑥 빨려갈 듯 오묘했다.
그리고 저 늪을 채워야 한다는 강렬한 느낌이 들었다. 퍼석한 흙으로 그 늪을 메워야 할 것 같지만 그 흙이 자신이 된다고 생각하니 거부감부터 들었다. 늪의 질척거림이란 생각만으로도 질색이다.
‘그래서 저런 가면을 쓴 걸까? 누군갈 의도치 않게 빨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은혁은 그 아련한 눈에 아릿하면서도 야릇한 기분이 물씬 들었다.
“눈이 참 매력적이십니다.”
나경은 갑작스런 칭찬에 눈으로 손이 올라가려는 걸 애써 참았다. 눈이 매력적이란 말을 들은 적 있는지 기억을 더듬지만, 없었다. 오히려 만났던 남자마다 무덤덤한 눈에 불만을 토로했었다. 그래서 칭찬인지 빈말인지 분간 못하고 입가를 쓱 움직였다.
“처음 들어요.”
“설마, 아닐걸요.”
“정말요. 과한 칭찬이어서 어색해요.”
“매력적인데. 내가 원래 여자 매력을 지나치게 잘 발견하죠.”
은혁이 계속 그녀 눈을 탐하듯 보는 게 부끄러운 나경은 결국 손을 올려 눈가를 쓱 쓸었다.
“참, 원장님 병환은 괜찮으신가요?”
“어떻게 아셨어요?”
“일전에 건강 문제로 퇴임 준비하신단 소식 들었습니다.”
“아, 뭐. 괜찮으세요. 걱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연달은 곤란한 질문에 나경은 답을 하지 않았다. 타인에겐 드러내고 싶지 않은 두 사람이 자연스레 화두에 오르자 그 현실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지긋지긋한 그 묵직함에 눌린 나경은 표정이 흐트러지려 했다. 그러나 은혁의 부드러운 입매가 만드는 완연한 미소에 재빨리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 질문들과 현실에 당황한 표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입꼬리에 힘을 주었다.
“말씀이 별로 없으신가 봅니다.”
“피곤해서요. 지난주에 원장님이 휴가 가셔서 혼자 진료 보거든요. 방학 때 혼자 진료 보는 건 기력이 달려요.”
“그래도 치과 냄새는 안 나는군요. 치과의사라고 해서 그 특유의 냄새가 확 풍길 줄 알았거든요.”
“지오이(ZOE) 약내가 맹렬하긴 하죠. 그래도 사적으로 만나면 안 나요. 휘발성이라서 치과를 나오면 사라지거든요.”
“가끔 치과 가면 그 웅크리고 치료하는 모습이 중노동하는 듯이 보이더군요. 등받이도 없는 의자에 온종일 앉아 같은 일을 반복하는 건 질릴 것 같기도 하고요. 가족이 모두 의사니 모이면 남다르겠습니다.”
“아…… 남다르긴요. 비슷해요. 치과의사는 의사 사이에서 의사로 안 쳐주는 거 모르시죠? 생명의 고귀함을 다루기엔 미미한 의술이라고. 의료와 의술의 차이점에선 저희 집도 비슷해요.”
은혁은 뭔가 감추려 들지만 익숙지 않아 어설픈 나경에게 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눈에 띄게 흰 피부나 단아한 기품의 외모가 꽤나 아름다워 어른들이 선을 주선한 이유를 알 만했다. 김 여사가 마지막으로 얻고 싶은 며느리상에 근접해 있을 정도로 깔끔하고 클래식한 미모가 도드라졌다.
욕망이 묻어 있지 않은 청초함. 김 여사가 은혁의 반려자에게 가장 바라는 점이다. 그리고 외모를 떠나 차분한 분위기의 말끔한 성격이 가족들과 조화를 이루기 쉬워 보였다.
그런 이지적인 인상에 부조화스럽게 짙게 박힌……. 은혁은 저런 부조화를 가진 여자를 처음 보았다. 눈가에는 비극이, 입가에는 희극이 각기 제 성향을 뚜렷이 드러내면서도 묘하게 자리 잡고 있어 그 어우러짐이 그의 심사를 툭툭 건드렸다.
감정을 숨기려면 제대로 숨기든가 아니면 제대로 드러내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이렇게 어중간하게 걸쳐진 사람은 처음이다. 껄끄러운 불편함이 아닌, 묘하게 끌어들이는 안타까움에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
나경을 유심히 보던 은혁은 간만에 특이한 여자를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얼마나 더 그 어설픈 가면을 유지할지 툭툭 건드려보고 싶었다. 그 가면 밑에 감춰진, 진실된 감정이 얼마나 처절한지 가늠해보고 싶었다. 졸렬한 호기심이라고 지나치기엔 꽤나 강렬했다.
“오늘 저 때문에 어려운 걸음 하셨을 텐데, 전 이 자리가 부담돼서 사실…….”
나경은 시끄럽게 울려대는 휴대전화 때문에 황급히 말을 멈췄다. 은혁이 양해하듯 시선을 거두자 얼른 핸드백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오빠’라는 두 글자에 하얗게 질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통화 버튼을 쓱 밀었다.
“어디야? 집이 아니란 건 나도 알아! 지금 어딘데?”
나경은 순식간에 은혁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휴대전화 너머 들리는 심상찮은 숨소리에만 집중했다. 이미 오빠란 존재에 이성을 상실해 앞에서 듣는 은혁은 안중에 없었다. 이 전화가 다시금 일깨운 묵직한 현실의 비명이 고함으로 터져 나왔다.
“어디냐고! 어디 숨었는데! 제발 말 좀 해봐. 응? 보고 싶지. 당연히 내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오빠야. 그러니 어디 있는지 말해줘. 오빠, 제발. 이러지 말고 말해줘. 부탁이야.”
나경이 휴대전화 속으로 들어갈 듯 애타게 부르짖는 모습에 은혁은 헛웃음이 나왔다. 애인 있는 사람이 그 어떤 이유든 이 자리에 나왔다는 자체가 용납이 안 됐다. 만난 지 한 시간도 채 안 돼 이 자리의 파국을 보았다.
“지금 바로 갈게. 아니야, 기다려! 기다리라고! 미안, 소리 안 지를게. 그러니까 제발 더는 허튼짓하지 말고 그냥 가만히 기다려. 알았지? 그래, 나도 사랑해.”
나경은 애초에 이 룸에 저밖에 없다는 듯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거칠게 문을 열고 다급히 뛰었다.
은혁은 혼자 덩그러니 남자 기막히면서도 사랑에 빠져 범한 무례려니 하고 일어났다. 그래도 재벌 3세치고 기막힌 외모를 가져 의도치 않는 스캔들로 곤욕을 치르는데, 이토록 매몰차게 무시한 나경의 태도에 자존심이 상했다. 수컷의 자존심, 의외로 뒤끝 생기는 일이었다.
“이젠 나도 한물갔나 보다. 기분 참 별로네.”
은혁은 지하주차장으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로 다가가다가 동동거리는 나경을 보았다. 연신 엘리베이터의 오름 버튼을 누르던 나경이 급기야 비상계단으로 뛰어 올라갔다. 사랑에 열병을 앓는 여자라고 생각했지만 얼핏 나경의 얼굴에 스친 공포와 경악에 은혁은 흠칫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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