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더 빠르게 변하고도 남는 이 시대에 한결같고 변함없는 사랑.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힘든 일이 생기면 생길수록 더 깊고 단단해지는 사랑.
서호수, 어리고 불안한 마음으로 시작한 그녀의 첫사랑이자 풋사랑이 십년이란 긴 시간을 보내며 깊고 진하게 익어간다.
한장천, 어린 그녀를 보며 사랑을 키운 어리지 않은 그. 유일한 사랑인 그녀. 십년이란 긴 시간 이전부터 기다리고 기다려 마침내 끌어안은 그녀를 결코 놓칠 수 없다.

결혼을 앞두고 정말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걸까? 하는 질문을 해보았던 그 때를 기억하며…….

-본문 중에서-

화창한 햇살이 민망한 실내. 고급스러운 공간 어디에도 어두침침한 구석은 없건만 사무실은 음침하게 느껴졌다. 만철은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 얻은 결론을 밀고 나가기로 했다. 인생에 있어 이보다 더 큰 결단은 없을 것 같았다.
“어디서 그런 생각이 나오는 건가요?”
호수는 기가 너무 막혀서 코웃음도 칠 수 없었다.
“흰머리에서 나오는 거겠지.”
만철은 호수의 반듯한 표정을 흘끗 살피며 가슴을 다독였다. 여기서 물러서면 끝이다. 호수의 허락을 받아내야 했다.
“흰머리는 인생의 깊이와 지혜의 상징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래서 하는 말이다. 깊이와 지혜로 너에게 이 일을 맡기기로 한 거니까.”
“일이 아니죠. 아기가 어떻게 일이 돼요?”
“그렇게 생각하는 너라면 잘 키울 수 있을 거다.”
“사장님!”
만철은 깜짝 놀라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호수의 일격을 버텨내야 한다는 절실함이 없었다면 금방 두 손을 들고 물러섰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오직 호수뿐이었다. 아기와 장천을 살릴 사람은 호수뿐이었다.
“서른이 다 되어서 아이가 생겼다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잖아?”
“남자하고 결혼 근처라도 가기나 했으면 이해나 하죠. 생 처녀에게 무슨 말씀이세요?”
“네가 생 처년지 사람들은 관심 없어. 그저 나이가 서른이 다 되어간다는 사실에 집중할 거다. 어느 누구도 그 아이의 출생에 대해 묻지도 따지지도 않을 거란 거지. 키워.”
호수에게 무례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지만 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호사스럽게 여러 가지를 따질 여유는 없었다.
“사장님이 저지른 일을 저더러 해결하라는 것 치고는 너무 당당하신 거 아닙니까?”
“당당하지 않아. 보면 몰라? 내 생전 이런 식은땀은 처음이야. 나이 육십이 넘어서, 호수 너하고 삼십 살이나 넘게 차이나는 내가 네 앞에서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잖아.”
“마땅히 흘려야죠. 나이 육십이 넘어서 어디 감히 사고를 칩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부탁하잖아. 제발 키워다오.”
“애 엄마는 뭐하고요?”
“주, 죽었어.”
“사장님보다 수십 년은 생생할 텐데 벌써 죽었어요?”
“아니, 주, 죽은 거로 치는 거지.”
“도망갔어요? 애만 두고?”
“아니야. 하여튼 키워. 나한테 빚진 거 그거로 다 갚자.”
도망갔냐는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장천에게 아기를 맡기고 수경은 도망을 간 것이니까. 하긴 누가 더 잘못한 거냐는 따짐은 서로의 치부를 더 훤히 드러내는 어리석은 짓이었다. 아기를 위해 이 상황을 얼른 인정하고 품어주는 것이 최선이었다.
“치사합니다.”
“생활비 넉넉히 줄 거야. 그리고 딱 삼년만 키워주면 돼. 그 다음은 유치원도 가고 보모를 들여서 돌보면 되니까 키울 수 있어. 삼년. 삼년만 키워다오. 이틀하고 기절하겠어. 기저귀 갈다가 아기 다리 뽑을 뻔했다. 게다가 목욕시켜야 한다는데 물에 빠트릴 것 같아서 며칠째 애가 목욕도 하지 못했어. 아무 여자나 데려다가 돌봐달라고 하고 싶어도 우리 집에 애가 있다는 걸 알면 내 인생도 끝나니까 그것도 못 하겠고.”
“코미디 드라마도 아닌데 너무 웃긴 거 아니에요?”
불쌍하게 생각하면 안 되는데 불쌍했다. 나이 육십이 넘은 철없는 아버지를 둔 아기가 너무 불쌍했다. 좋으신 분인데 어쩌다가 심각한 사고를 쳤을까? 좋은 분이라서 그럴 수도 있었다. 몇 년 전에 아내인 민주를 여의고 외롭게 사는 그에게 여우같은 못된 것이 아저씨를 홀려서 일을 저지르게 만든 것이 분명했다. 아기를 두고 도망간 걸 보면 확실히 사랑은 아니었다. 빚. 아저씨라고도 아버지라고도 부를 수 없게 된 한만철 사장님. 부모 잃은 그녀를 자식처럼 여기며 키워주신 분이셨다.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고 사는 게 항상 힘들었는데 조금이라도 갚을 기회가 온 건 감사했다. 
“지금도 집에서 울고 있을 아이 생각에 불안해. 키울 거지?”
“집에 가서 정리하고 데리러 갈게요.”
호수는 다른 방법이 없는 일로 만철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키울 거라고 결심했으면 얼른 그의 짐을 덜어주고 싶었다. 
“고, 고맙다. 진짜 고마워.”
“이름이 뭐예요?”
“뭐?”
“애 이름이요.”
“아, 없는데.”
“기가 막혀. 아니,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은 것도 서러운데 이름까지 지어주지 않으셨어요? 진짜 키울 생각 있으신 거죠?”
“생각해보니 그렇구나. 이름을 생각해보지 않았어. 네가 지어줄래?”
그러고 보니 장천은 아기의 이름을 지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름을 떠올리니 출생신고가 함께 생각났다. 괘씸한 것. 아들이지만 괘씸했다. 이름도 출생신고도 하지 않고 있는 바보 같은 아들을 두 대 패주고 싶었다.
“사장님!”
“다 네가 알아서 해. 호적에 올리게 빨리 생각해야 하는데.”
어쨌거나 손녀다. 당장에 가서 장천과 담판을 지어 손녀의 위치를 정확히 만들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호적에는 올리실 거였어요?”
“당연하지. 누구 자식인데. 호적에는 올려야지. 불쌍하게 버림받은 신세인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줄 거다.”
호수는 만철이 그녀에게 부탁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이를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에게 맡기려고 한다는 걸 알았다. 
“딸이에요 아들이에요?”
“아, 딸. 그래서 더 힘들어. 도통 불안하고 두려워. 뭐라고 부를까? 뭐로 할까?”
“예쁜 이름. 음, 한송희. 어때요? 마음에 안 드시면 나중에 잘 생각하셔서 바꾸시던가요.”
“한송희? 아주 좋은데. 그래 그렇게 하자. 네가 하면 뭐든 좋으니까.”
만철은 방금 전까지 톡톡거리며 말하던 호수가 아이 이름을 말하고 어둡게 가라앉는 걸 보았다. 사연이 있는 이름인 것이다. 
“집에 가서 정리 좀 하고 데리러 갈게요. 사장님 집에 있는 거 맞죠?”
“그, 아, 아니, 내가 네 집으로 데려가마. 우리 집에 왔다가 아이 데리고 가는 거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내가 얼른 데리고 가마.”
“수상해요.”
“무, 뭐가 수상해? 그런 거 없어. 아무튼 어서 가서 정리해. 당장 움직여.”
“앞으로 직장 생활은 못 하는 거예요? 이대로 이렇게 잘리는 거냔 말이에요? 과장이나 하고 있는데, 잘나가는 직장 생활을 하루아침에 그만둬야 해요?”
아이를 맡게 된다는 게 겁이 났다. 사장님을 위해선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만 겁이 나는 건 또 다른 거니까.
“삼년 있다가 바로 복직시켜 줄게. 내가 사장이야. 뭐가 문제야? 걱정하지 마라. 너 인생 잘못되는 거 절대로 그냥 보지 않을 테니까.”
호수는 울컥했다. 사장님의 말은 진심이었다. 남의 자식인데 정말 잘 대해주셨다. 
“시집도 안 간 처녀에게 사고 친 아기를 덜컥 맡기는 사장님이 하실 말씀은 아니죠.”
호수는 투덜거리며 나오려는 눈물을 눌렀다. 만철이 눈치챌까봐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삼년, 삼년만 고생해다오. 더 이상은 바라지 않아.”
그 안에 장천을 받아주면 좋지만 아니라면 확실히 잘라내길 바랐다. 
“알았어요. 생활비 꼬박꼬박 주세요.”
“알았어. 걱정하지 마라. 집이 좁으면 이사도 시켜줄 수 있어.”
“됐어요. 스물네 평에 혼자 살아요. 넓어서 외로울 지경이라고요. 우리 송희 들어오면 고마운 거죠.”
만철이 호수가 독립해서 나가 살게 될 때 민주의 부탁을 받고 사준 집이었다. 
“외로워?”
“아, 아니요. 말이 그렇다는 거죠. 좋아서 죽어요. 저 갈게요. 얼른 데려오세요.”
만철은 호수가 외롭다는 말에 가슴이 아팠다. 연애다운 연애도 하지 않고 혼자 지내는 호수를 항상 안타깝게 생각했다. 어디가 어때서? 호수는 어디다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여자였다. 날씬하고 예쁘고 공부도 잘해서 좋은 대학도 나왔다. 그의 회사에서 일하지만 거저 일하지 않았다. 항상 최선을 다하는 그녀의 태도와 지금처럼 어려운 부탁을 들어줄 줄 아는 고운 심성도 가졌다.
“후우.”
한숨이 나왔다. 최선의 선택이라고 믿고 하는 일이지만 정말 미안했다. 
“나다. 짐 싸서 기다려 내가 데리러 갈 테니까. 그래.”
만철은 전화를 끊고 다시 한숨을 쉬었다. 
“잘 되어야 할 텐데.”
흰머리를 쓸어 넘기며 마음을 잡은 만철은 아이를 데리러 사무실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