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름. 그곳을 떠난 후 인혜는 가끔씩 타는 듯한 그리움에 목마름을 느끼곤 한다. 사는 것이 조금은 피곤한 일이라고……. 찰나로 스쳐 지나가는 짧은 행복을 위해 너무 많은 희생을 해야 한다고 요즈음 생각하는 그녀다. 그러나 그런 그녀도 5월의 눈부신 햇살 속에 반짝이는 연둣빛 어린 잎새를 볼 때면 행복했던 유년의 기억 속으로 블랙홀처럼 빨려드는 자신을 멈출 순 없었다. 그녀의 인생에서 그리 길다곤 할 수 없는 10년- 그것마저도 기억나는 부분은 길어야 3, 4년 정도일 뿐인 기억을 붙잡고 조금은 지루하고 조금은 피곤한 현재를 견뎌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짧았지만 찰나여서 더 안타깝고 그래서 더욱 영원해야만 하는 추억 속의 고향. 지금에 와서 다시 가보면 유난스러울 것도 없는 그저 소박한 시골일 뿐인데도 그 시절엔 왜 그리도 싱그럽고 따뜻했는지……. 하지만 인혜는 자신에게 유년시절의 추억이 없었다면 지금쯤 아마도 인생의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진 않을까 생각해 본다. 어렵게 쌓아온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치듯 떠나와야 했던 그날 이후 새로운 삶을 살아내느라 힘에 겨운 많은 날들에 만약 그 추억들이 없었다면 더 많이 힘들었을 것이라고…….



-본문 중에서-

“무슨 말이야? 그럼 나랑 헤어지겠단 말이야? 고작 돈 때문에 나하고의 미래를 버리겠단 말이야?”
“어렵게 살다 보면 어떤 사람도 저처럼 결정할 거예요. 배고픈 사람에겐 사랑도 사치거든요. 이쯤에서 물러나는 게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아니겠어요? 선배는 순진하게 큰 어려움 모르고 자라서 내 말이 좀 그렇게 들리겠지만 난 그래요. 그러니까 어차피 헤어질 거면 쿨 하게 헤어져요 우리. 그동안 나쁘지 않았지만 앞으로도 선배 덕에 아니 선배 어머님 덕에 더욱 잘 지낼 것 같네요. 참! 다음 주에 인도 가신다면서요? 이제 진짜 도련님이 되셔야죠? 이제 사랑놀이는 끝났어요. 차 다 드셨으면 그만 일어나시죠? 지산 그룹 외동아들 차현우 씨?”
‘사랑이라 믿었는데 결국 어머니의 말씀이 맞단 말인가? 없는 것들은 다 그렇단 말인가? 엿 같다. 진짜 구질구질하다. 그래. 쿨 하게 잊어 주마. 보란 듯이 잊어 주마. ‘강인혜.’

“그때 그놈이 나보다 나았나? 어차피 어머니도 반대하시겠다. 마침 나도 인도로 떠나준다고 하지 돈까지 생겼으니 금상첨화였겠군. 나 하나로는 만족할 수 없었나? 요즘도 볼 때마다 옆에 있는 남자가 바뀌더군. 오늘은 아무도 없는 것 같으니 내가 상대해 주지. 거절은 용서하지 않겠어. 아이가 깨어 이 모습을 봐도 상관없다면 소리 질러 보시지.”
질투에 눈이 먼 현우에게 인혜는 변명할 여유도 없었다.
‘짝.’
순간 현우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인혜가 광기에 휩싸여 무슨 짓이든 저지를 것만 같은 현우의 뺨을 때린 것이었다.
“정신 차려요 선배! 누구도 날 이렇게 대할 자격은 없어.”
순간 현우도 정신이 들었다.
‘어떻게 사랑한 우리였는데……. 이렇게 되어 버리다니!’


“어떻게 선배는 자기만 생각해? 결혼하기로 한 아가씨 맘도 생각해야지. 그리고 아버님도 심장에 충격 가면 그래서 또 쓰러지시면? 우린 평생 동안 죄책감을 안고 살아야 될지도 몰라! 선배는 그래도 아무 상관 없어? 선배와 난 지난 사랑이야. 앞으로 나아가려면 추억은 추억으로 묻어 두어야 할 때도 있는 거야. 괜히 다시 끄집어내서 아름답던 추억마저 구질구질하게 만들지 말고 선배는 가던 길 가!
“인혜야! 그때도 지금도 왜 내 마음을 무시해? 너한텐 내 사랑이 유통기한이 지나 버린 통조림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내 사랑도 중요해! 처음부터 알지도 못했던 아이에게 갑자기 부정이 생기진 않아. 아이가 문제가 아니라고 인혜 너지! 팔 년 전에도 지금도 만나지 않았던 그동안에도 내겐 너 밖에 없었어. 너만 그랬던 게 아니란 말이야. 넌 접으면 접히는지 몰라도 난 아냐. 못 접어. 그땐 네 말에 속아서 포기했지만 아니 잊을 수 있다고 오기로 생각했지만 그건 오기일 뿐이었어. 이번엔 절대 포기 못해! 더 이상 날 설득하려고 하지 마. 나올 거 없어. 그만 가 볼게.”

인혜는 가방을 챙기며 헛웃음만 웃었다. 어리석긴…… 쉬울 줄 알았어? 은영이를 핑계로 그 사람 옆에 있고 싶었니? 강하게 살아가리라 생각했는데 그 사람을 보자마자 흔들리는 꼴이라니. 이래서야 팔 년 전에 독하게 헤어진 보람이 없잖아?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이번엔 돈은 궁하지 않으니 돈만 아는 나쁜 년이란 누명은 벗겠구나……. 웃자! 울면 구질구질해지는 거다. 난 도망치는 게 아니야. 나와 은영이를 지킬 수 없는 한 남자를 버리는 거야. 사랑이 뭐라고 세상 속에 껴서 사는 게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조용한 고향에서 농사지으며 은영이와 행복할 것이다. 돈 아니라도 죽을 거 같은 사랑이 없어도 살아지는 게 삶이라는 걸 잘 알잖아?

‘돈만 있으면 뭐든 다 할 수 있다고 믿는 어머니나 결국은 돈으로 어머니를 몰아세우고 또 내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인혜를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나의 오만함이 다를 게 뭐가 있나……. 후후…… 결국은 인혜는 나에게서 도망친 것이다. 내 이기적인 사랑과 자만심 그리고 흐리멍덩한 도덕심 정말이지 생각할수록 역겨운 내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친 것이다. 과연 내가 이 모든 것을 벗고 진정으로 그녀에게 용서받을 수 있는 날이 오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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