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이렇게 좋은날들을 그냥 보내면 청춘이 아깝잖아요?”

숍의 주인이자 까다로운 디자이너 권준영. 그의 숍에서 패턴사로 일하는 진송은. 이탈리아에 있던 그가 한국으로 돌아와 숍에 나타나기 시작한 이후 송은의 삶이 피곤해졌다. 좁지 않다고 생각한 건물인데 가는 곳마다 그가 보인다. 게다가 이유 없이 친절을 베푼다. 그가 친절하면 친절할수록 뾰족해지는 이 마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 한가한데 조금 더 생산적인 일을 해볼까요?”

“흠, 생산적인 일이라니 농담이십니까?” 

“진 실장, 나랑 연애할래요?”

뭐라는 거냐?

“제가 잘못 들었습니다. 선생님.”

“나, 낯부끄럽게 사귀어보자고 두 번이나 말해야 해요?” 

뭐냐? 뭐라고 그러느냔 말이다. 도대체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2. 작가 소개

서연진

살다 보니, 하늘이 늘 푸르지만은 않더라.

얼룩지는 날은 지옥이 앉은자리더라

그래도 살아야 한다면

사랑하고 사랑 받고 살고 싶다.

▣ 출간작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 출간 예정작

취향의 차이

실행에 관한 사소한 오류

3. 차례

#프롤로그

#01. sanctity shop in Korea

#02. 달갑지 않은 여자 진송은

#03. 디자이너 권준영

#04. 원하지 않아도 일어나는 일들

#05. 관계의 정리

#06. 컬렉션

#07. 어느 오후의 고백

#08. 바란다면,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09. 시간이란 흐르는 물처럼 모든 것을 삼키고

#10. 은주=진송은

#11.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필로그

4. 미리 보기

“진 실장, 바빠요?” 

송은은 천 조각을 뒤적거리던 것을 멈추고 숍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가 질문에 대해 의아한 시선을 보내는 것에 꿈쩍도 하지 않고 도식화의 색감과 천의 색감을 맞춰보는 일을 계속했다. 하긴, 마네킹 앞에 선 저 남자는 남의 눈 따위에 신경 쓰며 세상 알차게 살 인물은 아니었다.

“바쁜 일 없습니다. 선생님.”

그녀는 별 의미 없는 일상적인 질문이라 생각하며 대답했다. 그러나 다시 천 조각을 만지작거리다 문득 남자가 던진 질문에 의문이 생겼다. 그가 일상적이란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던가? 뭔가 알맞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남자에게 넘겨줄 천을 테이블 위에 정리하던 그녀는 그의 물음이 숍에 관한 것인지, 아니면 타인의 일상적인 안부를 묻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잘 모르겠다. 컬렉션 준비로 함께 일을 하게 된 그 일이 끝나고도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그와 함께 일을 하게 되었다. 컬렉션이 끝나고 그는 남석과 이탈리아 출장을 다녀왔었다. 그리고 며칠 전 돌아왔고 두 사람은 여전히 일만 하는 중이다. 컬렉션을 준비하다 보니 그는 그녀가 친밀하게 느껴진 모양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 나오는 키스라 송은은 그렇게 생각하고 묻기로 했다.

그의 질문에 맞게 대답했는가? 에 대한 고민을 하던 그녀의 눈앞에 색다른 영상이 들어왔다. 천을 무심하게 바라보던 남자였다. 남자는 일러스트에 맞는 색감의 천을 골랐는지 천천히 천의 무늬를 쓰다듬으며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종종 일어나는 일인데 볼 때마다 당황스럽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나른한 얼굴로 천의 감촉을 표정에까지 실어낸 그는 마치 사냥한 먹이를 배부르게 먹어서 포만감이 가득한 동물 같았다. 눈앞에 보이는 선명하고 생생한 그림이건만 도무지 그의 행동이 믿기지 않았다. 그녀는 남자의 뜻 모를 행동에 당황했다.

저 남자 생김과 다르게 천을 다루는 행동거지가 왜 저런가 싶다. 천만 잡으면 저런다. 온몸에 야릇한 바람이 스치며 소름이 소소히 돋아 오른다. 그녀는 몸이 흉한 기운을 더 느끼기 전에 살짝 경직시키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의 말에 깊은 생각을 하는 것은 담배를 피우는 것보다 무익한 일이다. 

그녀는 조금 전에 살펴본 일러스트의 색감을 떠올리다 남자의 손가락 사이로 딱 알맞게 하늘거리는 천을 다시 한 번 보았다. 어쩌면 천재란 단어는, 변태의 기술적인 가치를 고급스럽게 표현한 포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을 고르는 감각은 남자를 따를 자가 없음을 씁쓸하게 인정했다. 남자가 패턴사(모델리스트)가 아닌 디자이너란 것을 깨달을 때마다 입맛이 쓰다.

“바쁜 일이 없다? 흠, 하긴 숍이 요즘 하는 일이 없긴 하죠. 우리 한가한데 조금 더 생산적인 일을 해볼까요?”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자 싱긋 웃더니 말을 내뱉었다. 뭔가 속에서부터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 같긴 한데 딱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지금 숍은 컬렉션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큰일을 치룬 마무리를 하느라 여유로웠다. 하지만 그것은 할 일 없는 지루함이 아니라 바쁜 일들의 끝자락이 주는 여운이었다. ‘하는 일이 없다.’라는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직원들이 들으면 억울해 가슴 칠 말이다.

비바람 치는 길의 목적지에 도달해 비바람 맞은 옷을 정리하는 일만 남은 것과, 막 비바람을 뚫고 도착했더니 어차피 맞은 비 덜 젖은 것 같으니 비바람 속으로 다시 한 번! 이라고 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미 버린 옷을 말릴 수 있다는 희망을 싹틔워 올리기도 전에 버린 옷을 벗지도 못해 기분까지 젖게 만드는 차이랄까?

하긴 주인의 저 좋을 대로 나아가는 것이 개인 상점의 장점 아니겠는가? 그녀는 핑계 김에 확 솟구치는 억울함을 조목조목 이야기 하고 싶었지만 숍의 주인은 생각이 다른 것 같아 애써 말을 삼켰다. 조목조목이라, 목구멍이 포도청인 직장인이 내뱉어야 할 단어는 아니었다.

“흠, 생산적인 일이라니 농담이십니까?” 

그가 하는 말이 생산적인 일이 적다는 말이라면 당장 개발실 직원들이 하는 일을 중지시켜버릴 테다.

“진담인데?”

“선생님, 점심시간입니다.”

그녀는 말도 안 된다는 뜻을 확고히 하며 그의 말을 부정하다 벽에 걸린 시간을 보며 말했다.

“흠, 점심시간이네요. 근데 진 실장, 난 농담 같은 건 안 해요.”

그녀의 말에 의뭉스런 눈으로 바라보던 남자는 뭔 말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들고 있던 여러 장의 일러스트들을 책상위로 던져 정확한 지점에 착지시키며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끝났다는 듯 무심히 몸을 비트는 그를 바라보았다. 도식화(디자이너가 디자인으로 옷본을 내기 위한 그림)가 떨어지며 일으킨 바람에 테이블 밑으로 놓아둔 천이 떨어졌다. 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다 정리해둔 것들인데…….’

하긴 그가 하는 농담을 들어본 적이 없긴 하다. 귀가 문제가 아니라면 남자가 말한 생산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봐야 하는가? 란 의문이 또다시 진지하게 떠올랐다. 그녀는 빠르게 손을 움직여 테이블 위를 다시 정리했다.

여기서 남자의 말을 더 듣다간 급조된 일더미를 떠맡게 될지도 모른다는 긴박한 결론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가 사람 좋은 척을 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고 그의 오랜 지인인 남석이 말했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얼른 밥이나 먹으러 가자. 

“마무리하겠습니다. 선생님.”

송은은 책상 위의 천 조각을 주섬주섬 치우며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진 실장, 나랑 연애할래요?”

뭐라는 거냐? 송은은 순간 다시 한 번 청력을 의심하며 그를 향해 실없이 웃었다. 이제 그가 하는 엉뚱한 소리나 동조하기 어려운 말을 들었을 때 저도 모르게 픽 웃음이 나왔다.

“제가 잘 못 들었습니다. 선생님.”

“나, 낯부끄럽게 사귀어보자고 두 번이나 말해야 해요?”

뭐냐? 뭐라고 그러느냔 말이다. 도대체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벌써 귀가 멀 나이란 말인가?

“진송은 씨가 기억을 못하는 모양인데, 우리 밥 먹고 차 마시고 쇼핑도하고, 키스하고 고백하고 모든 절차를 다. 그리고…….”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얼굴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상대가 장난이나 짓궂은 농담을 하지 못하게 하는 힘이 들어간 표정으로 말이다. 진지하게 가볍지 않은 눈빛을 보내며 상대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이렇게 좋은날들을 그냥 보내면 청춘이 아깝잖아요?”

눈빛으로 전하는 말이 들어먹을 생각을 않는다. 게다가 그의 나이는 이미 청춘이 한참 지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들을 소리도 제대로 들은 모양이다. 젠장. 숍의 주인은 천재적인 감각에다 직원도 잘 부리는 능력도 겸비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숍의 주인이 한 말이 농담이라고만 한다면 어떤 일이든 하겠다는, 아니 해내겠다는 마음이 되었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무슨 일이든지 말이다. 불같이 솟아오르는 다짐을 가슴 깊이 새기며 주먹까지 꼭 말아 쥔 그녀는 가만히 지켜보는 눈을 의식하지 못한 채 디자인실을 서둘러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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