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로 태어나 주인집 아가씨의 보살핌 아래 동생처럼 자란 아이. 이름이 없음에도 불편한 것도 모르고 살아온 아이는 주인집 아가씨가 세자빈으로 간택되자 함께 궁에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만난 왕의 생모 덕현궁. 처음으로 마음을 열게 된 아이는 덕현궁을 자신도 모르게 어머니처럼 따르게 되고 그녀로 인해 궁이라는 곳이 그리 따뜻한 곳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더불어 우연히 몇 번 보게 된 세자에게 마음을 주게 된다. 자신을 여전히 믿고 아껴주는 세자빈과 마음을 주게 된 세자 사이에서 아이는 마음이 흔들리게 되고 그 와중에 덕현궁의 죽음으로 돌이킬 수 없는 길로 걸어가게 된다.

-본문 중에서-

“밤도 깊고 아직 날이 매우 찬데 어찌 이리 나왔느냐?”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는 할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 밤에는 빈궁전으로 들지 않으셨다고 들었다.
“잠이 오지 않는 것이냐?”
“예.”
조용한 후원에 내 작은 목소리가 살짝 울리다 사라졌다. 저하께서는 가만히 서계시다가 내 곁으로 오시더니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시는 듯했다.
“이제 몸은 완전히 나았나 보구나.”
“예.”
저하의 맑은 음성을 듣고 조용히 대답을 했다. 내 대답이 작게 울리고 다시 조용해졌다.
“덕현궁 마마를 많이도 따랐다 들었다. 아바마마께서 덕현궁 마마를 거의 찾지 않으시던 까닭에 나도 많이 뵙지는 못했다. 들으니 덕현궁 마마의 처소를 찾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하더구나.”
알고 계셨구나. 알고 계셨으면서도 왜 저하께서는 자신이 가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셨을까?
“아바마마께서 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으셨다. 또한 대비마마께 죄를 짓는 듯 하여 갈 수가 없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을 아시는 듯 저하께서 나직이 말씀하셨다. 조용한 밤, 후원에는 나와 저하뿐이었다. 아직 날이 차서 풀벌레도 없는지 어디에서도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들리는 것은 저하의 목소리뿐.
“네 덕에 편히 가셨을 듯 하구나.”
가만히 숙인 고개를 들어 연못을 보았다. 연못은 안의 물고기들도 자고 있는지 흔들림이 전혀 없었다. 연못에 비친 달그림자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한 쪽 손을 슬쩍 가져가는 전하를 느꼈다.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다는 것을 아느냐?”
“…….”
“본방나인이라 들었다.”
“…….”
“본방나인을 취하는 것은…….”
“…….”
“…….”
그대로 내 한 손을 잡은 채 가만히 서 있으셨다. 한쪽 뺨으로 저하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그대로 가만히 서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 서 있었다. 세자저하께서는 조용히 한숨을 쉬시더니 잡고 있던 내 손을 놓으셨다.
“네가 어리고 빈궁의 본방나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네가 내 눈에 들어오던 그때부터 내 눈은 너를 찾았다. 그러니 앞으로는 내 눈에 다시 띄지 않도록 하거라.”
그 말을 하고는 이내 몸을 돌려 찬바람을 일으키며 걸어가셨다. 고개를 돌려 가시는 그 뒷모습을 보았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으셨다. 제대로 얼굴을 본 적이 없으니 이 기회에 얼굴을 볼 걸 그랬나. 저하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는 저하의 모습이 사라진 뒤 한참이 지나서야 몸을 움직여 돌아왔다. 자리에 누워 저하에게 잡혔던 오른손을 들어 눈으로 보았다.
이 손이 저하의 손에 잡혔었지. 그리고는 다시 손을 내려 가슴에 얹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꿈이었다, 금방 깰 꿈이었다. 그래, 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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