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Q.헤이든 님, 헤이든 님! 있죠, 혹시 운명 같은 거 믿으세요?

A.릴리가 내 운명이라면 믿을 마음이 있긴 합니다. 

- 바이헤르 공작 부부, 카산드라를 공연하는 극장 앞 담화 中

릴리아나 나뜨완 라핀트. 너무나 평범한 그녀는 ‘우연의 신’을 만난 후 살짝 미인이 되지만, 그 대신 후작님을 차지해야 한다! 하지만 모든 분야에서 완벽한 헤이든 라델프 바이헤르는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상대인데……. 희세 작가가 선사하는 유쾌한 로맨스 ‘후작님, 후작님!’

“그래서 제가 좋습니까, 저 이상한 여자가 좋습니까?”

멍하니 후작님의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뭐랄까, 아무 생각이 안 들었다. 음, 여기서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멀쩡한 상태로 빠져나갈 수 있을까.

“저어, 그……. 대답 안 하면 안 되나요?”

“릴리.”

눈이 새파랗게 빛나는 것 같았다. 나는 얌전히 후작님에게 말했다.

“후작님이 좋아요.”

“좋습니다.”

그러자 에바르셀 영애가 이를 갈면서 말했다.

“지금 우리 만난 지 얼마 안 돼서 그런 거라고요! 곧 후작님 따위 물리칠 수 있어요!”

※ ‘가하 에픽’은 다양한 시대, 색다른 소재, 독특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은 도서출판 가하의 새로운 브랜드입니다. 로맨틱한 판타지가 가득한 가하 에픽, 지금 만나보세요!

2. 작가 소개

희세

조아라에서 ‘라시아’ 느긋하게 연재 중인 아직은 창창한 20대.

언니랑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강아지님과 서울에서 살고 있습니다.

호화판 외국 여행이 꿈인 소시민.

딸기와 자몽과 고기를 좋아합니다.

▣ 출간작

어느 날 일어났더니

후작님, 후작님!

▣ 출간 예정작

라시아

3. 차례

#2. 어서 오세요! 공작가에!

#3. 라이벌과 나와 후작님

#4. 올여름을 뜨겁게 달굴 신작: 후작님과_단둘이_별장에서.avi

4. 미리 보기

멍하니 눈을 뜨고 나서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은, 여기가 어딘지도 아니고, 오늘이 며칠인가도 아니었다.

나는 왜 후작님께 건강을 장점이라고 떠들어 댔는가……! 이제 내 말 안 믿으시려나, 근데 지금 내가 왜 잠옷 같은 걸 입고 있지. 심지어 이건 내 잠옷도 아닌데……. 내 잠옷에는 이렇게 고상한 레이스 같은 거 안 달려 있는데……. 게다가 조금 크다. 뭔가 파묻힌 느낌이랄까. 

이불 속에서 부스스 빠져나와서 고개를 휙휙 돌려보니, 후작님네 손님방인 것 같았다. 후작님 네는 손님방도 비싸 보여! 그나저나 여기는 나랑 뭔가 안 어울리는 느낌인데……. 영차, 하고 침대에서 내려오자 여름용 실내 슬리퍼가 날 위해, 라고 해도 좋을 만큼 얌전하고 예쁘게 준비되어 있었다. 신어도 되나? 되는 건가? 되겠지? 안 되면 안 되는데. 나 신으라고 준비한 거 맞겠지?

조심조심 발을 끼워보자, 내 발에 쏙 맞아서 놀라움을 넘어서 오히려 죄송할 정도였다. 신발님 아무리 봐도 내 몸값보다 비싸 보임……. 비싼 슬리퍼인 것이 티가 나는 게, 곱게 자수가 놓아져 있었고 뭔가 내 발을 감싸는 요사스러운 부드러움이 있었던 것이다. 이걸로 속옷 만들면 대박날 거 같은데. 발 주제에 이런 호사를 누리다니, 역시 후작님네 애완동물로 태어났어야……

슬리퍼가 황송해서 걷기가 미안할 지경이었지만 난 대범한 여자고 비싼 슬리퍼도 고생을 한번 해봐야 한다는 생각에 이내 쿨하게 질질질 신발을 끌고 방문 앞으로 갔다. 

슬쩍 문을 열고 고개를 빠끔히 내밀었다가 누군가와 눈이 딱 마주쳤다.

“어!”

마구간지기 할아버지다! 손가락으로 할아버지를 가리키면서 외치자 할아버지가 헉! 하는 얼굴을 하더니 나를 똑같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주튀녀!”

주튀녀? 내가 왜 주튀녀야. 주튀녀가 뭔진 일단 둘째치고, 물어볼 게 산더미였다.

“할아버지는 켄징턴 가 마구간지기 아니셨어요? 여기서 왜……. 정장에 외알 안경까지 쓰시고, 뭔가……. 느낌이……. 집사님 같은 게…….”

“집사님, 정리 다 끝났…….”

그리고 우리 가운데에 하녀가 난입해서 날보고 동그란 눈을 했다. 앗, 그러고 보니 잠옷 차림인데……

“깨어나셨군요! 안녕하세요, 아가씨. 공작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하녀는 공손하게 인사하며 내게 환영의 말을 해주었는데, 나로서는 의외의 말이 튀어나와서 오히려 깜짝 놀랐다. 손가락질하고 있던 팔을 슬쩍 내리고 내 손을 뒤로 숨겼다. 상냥하고 예쁜 하녀님이시구나. 나, 나도 인사할 테야.

“어……. 어, 네. 저도 어, 제가 공작가에 온 걸 환영합니다……가 아니고, 저기……. 안녕하세요.”

어설프게나마 인사하니 하녀는 웃음을 참는 듯한 얼굴을 하더니 그 옷이 마음에 드세요? 하고 내게 물었다. 왜인지 얼굴이 붉어지면서 나도 모르게 얌전히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조그맣게 네, 하고 속삭이듯이 말하자 하녀는 뿌듯한 얼굴로 제가 갈아입혀드렸지요! 하고 말했다. 

“그……. 그렇군요. 저기, 제 옷으로 갈아입어야 하지 않을까요?”

“어머, 아가씨 옷이요? 그건 도련님이 버리셨는데.”

……네? 잠깐 내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발언이 나온 거 같은데. 

“제 옷, 제 옷을 버리셨다고요? 그 파란 옷을?”

그거 비싼 건데. 어머니가 예쁜 색이라고도 하신 건데, 아니 이게 무슨 말이요, 하녀양반. 덜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하녀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일단 잠옷 바람으로 할 얘기는 아니니까, 하고 질질질 끌려가듯이 방안으로 끌려가다 보니 응? 엥? 응? 하는 표정을 숨길 수 없었고, 그런 나와 하녀를 바라보는 집사인지 마구간지기 할아버지 또한 응? 엥? 하는 얼굴이라 무척 당황스러웠다. 

어쨌든 방문이 닫히고 나자마자 잠은 잘 주무셨어요? 하고 생글생글 웃는 하녀의 모습에 네에, 라고 대답은 했는데 어쩐지 휘말리고 있다! 는 느낌은 숨길 수가 없었다.

“음, 제 옷은…….”

“그 옷 별로 안 어울린다고 도련님이 버리라고 하셨어요. 자아, 우리 이걸로 갈아입읍시다.”

하녀님은 매우 프로페셔널하게 내 옷을 갈아입혔는데, 마치 내가 귀한 인형이라도 된 듯이 정성스러운 손길인데다,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도 하는 것처럼 진지해서 얌전히 갈아입어주었다. 어휴, 어쩔 수 없네. 밝은 노랑의 드레스를 입고난 후 고풍스러운 화장대로 끌려갔고, 얌전히 시키는 대로 화장까지 당하고 나자 그녀가 머리를 만지기 시작했다. 

“머리카락 자르실 생각은 없으세요? 단발 정도로.”

“단발이요?”

단발은 유행도 아니고, 그렇게 짧게 잘랐다간 집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곤란한 표정을 하자 도련님이 잘라버리라고 했는데, 안 자르면 제가 잘릴 텐데……. 하면서 우는 척을 했다. 우는 척인 거 다 보이는데요, 하고 중얼거리자 하녀는 벌떡 고개를 들더니 입을 열었다.

“왜 자르기 싫으세요? 특별히 이유라도 있으신 거?”

“아니요, 그건 아니고, 예쁘다는 소리를 전에, 한 번.”

내 입으로 예쁘다고 하자니 세상에 이렇게 창피한 일이 없었다. 꺄. 부끄러워. 

“긴 머리가 예쁘다는 소리를 누구한테 들으셨는데요?”

약간 의문스러운 얼굴을 한 그녀에게 머뭇거리다가 그냥……. 저기……. 하고 웅얼거리다가 말했다.

“아버지께서…….”

그녀의 눈매가 더러워져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였다. 근데 아버지가 긴 머리 예쁘다고 해서 기르고 있는 게 그렇게 더러운 눈매로 볼일인가요. 기르던 개가 내 긴 머리가 예쁘다고 해도 머리카락을 기를 판에 심지어 아버지가 긴 머리를 좋아하신다는데! 응!

“아버님이시라면……? 후원자시라거나.”

“후원자요? 후원자 아니고 그냥 아버지이신데. 낳아주시고 길러주시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누이시고 손발이 다 닳도록 고오오♪생하시는 그런 아버지. 

“……그러니까 진짜 아버지요?”

나 모르는 새에 가짜 아버지가 생겼나. 네. 진짜 아버지. 하고 고개를 강하게 끄덕였다.

“그럼 그 옷은 어떻게 입고 계신 거예요?”

“어떻게 입고 있느냐고 해도. 아버지가 벌어 오신 녹봉으로다가…….”

“평민 아니셨어요?”

“네? 저 귀족이에요.”

“에엑?! 그럼 왜 저한테 존댓말을…….”

“아, 그게 어쩌다 보니……. 그리고 초면이구요……. 어, 또……. 저는 어렸을 때부터 하녀가 좀 어려웠고…….”

중얼중얼 말하자 하녀는 어머어머, 하고는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그러시군요. 아버지를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 아버지가 자상하신가요?”

이런 걸 물어오는 사람은 처음이라 좀 놀랐다. 보통 귀족들과의 교류에서 우리 집의 사정은 유명한 이야기였고, 그래서 누구도 저런 걸 물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매우 곤란한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사실 나는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한 번도 제대로 정의 내려 본 적이 없었던 탓이 컸다. 이렇게 보니 내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산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나는 이래 봬도 많은 생각을 하고 살고 있다. 예를 들면 내일의 날씨는 어떨까 같은 것 말이다. 세상에서 제일가는 미스터리를 벌써 20년째 탐구하고 계신 라핀트 박사님이십니다! 짝짝짝.

“어……. 아버지는, 음……. 자상한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버님을 특별히 좋아하시는 이유가 있으세요?”

귀걸이를 이것저것 대보던 하녀의 물음에 이건 대답할 수 있다는 마음에 해죽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게, 아버지랑 저랑은 닮았거든요. 그래서 저를 예뻐해주실 거예요. 그리고 제가 아홉 살 때 긴 머리가 예쁘다고도 해주셨구요. 그런 칭찬은 처음 들어서…….”

하녀는 잠시 거울 너머로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다시 싱글싱글 웃으면서 그러시군요, 하고는 잠시만요, 하고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왜지! 갑자기 화장실이 가고 싶었나? 이 집 하녀는 손님방 화장실도 갈 수 있나 봐. 우리 집 하녀들이 이 사실을 알았다가는 당장 이 집 하녀로 취직하려 할지도 몰랐다. 이 사실은 비밀에 붙여야지. 

하녀는 급했는지 들어가자마자 티슈를 왕창 뽑더니 코를 크게 풀었다……. 코푸는 척해봤자 화장실 간 거 다 아는데. 그러더니 물도 안 내리고는 손만 씻는 것 같더니 내게 왔다. 저기 화장실 안 가야지. 안 가고 재빨리 집으로 사라지겠어.

“흠, 잠깐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요.”

“아, 그러시구나. 음……. 그렇군요.”

혼자 이상한 상상을 한 내가 부끄러워서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예쁜 언니라서 저도 모르게 질투했나 봐요.

“저기, 이제는 괜찮으세요?”

“네. 이 귀걸이 마음에 드세요?”

음……. 고개를 갸웃해서 바라봤지만 알 길이 없었다. 마음에 들면 예쁜 건가?

“어울리나요?”

내가 진지하게 고심하는 얼굴을 하고 묻자 하녀는 가볍게 대답했다.

“어울려요.”

“저는 그러면 괜찮아요. 근데, 이렇게 막 써도 되나요? 제 귀걸이 써도 되는데…….”

“아, 그 파란색 귀걸이요? 그것도 도련님이 버리셨는데.”

그 말까지 듣고 나자 나는 도무지 걱정이 되어 묻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후작님 혹시 분리수거에 취미가 있으신가요?”

하녀님은 아쉬운 듯이 내 머리를 만지작거리시더니 종종종 땋아주면서 웃음을 참는 듯한 얼굴을 했다. 

“분리수거에는 취미가 없으시지만, 예쁜 걸 무척 좋아하셔서요.”

“아! 그거 저도 알아요!”

내가 아는 게 나와서 신나는 마음을 숨길 수 없어 손을 번쩍 하고 들었다. 저요저요! 저 알아요!

“후작님 이상형! 부담스럽게 예쁘고 참한 여자!”

정답입니다! 하고 외쳐줄 하녀님을 애타게 바라봤지만, 하녀님은 그게 무슨 소리야, 하고 나를 바라보실 뿐, 전혀 정답입니다! 부상으로 후작님과의 1회 무상 결혼권을 드립니다! 라고 외쳐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왜죠.

“도련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이상형이 생각보다 평범하네요.”

이집 사람들은 의외로 글자의 뜻에 취약한 듯했다. 저게 어딜 봐서 평범이요.

“아니, 그……. 부담스러울 정도로 예쁘고, 부터가 이상하지 않아요?”

“에이, 도련님 쯤 되는 귀족 분들은 죄다 예쁜 여자 원하시는데요. 그 정도야 무난하죠. 게다가 우리 도련님이 어떤 분이신데, 부담스러울 정도로 예쁘기라도 해야 급이 맞지 않겠어요?”

“생각해보니까 그 말이 맞기도 하네요. 후작님이 좀……. 잘생기셨죠, 후작답지 않으시게…….”

옛날 얘기 보면 황태자라든지, 황자라든지 하는 분들은 얼굴에 금칠을 하고 다니는 미모의 소유자이고 후작이라든지 공작은 그냥 신하 1, 2 정도더만 이번 대 황자님이라든지 황태자님은 후작님 옆에 서 계시면 그냥 얼굴 없이 걸어 다니는 왕관 1, 2로 보였다. 다른 말로 하면 내 최선의 얼굴 따위 아리아나 영애 옆에서는 걸어 다니는 드레스로 보인다는 거였다. 그래서 그런 건지 요즘 드레스 상인들이 신나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나 역시……. 희생자……!

“아뇨, 그……. 얼굴 말고, 다른 부분이…….”

“어느 부분이요?”

뭔가요, 하고 말간 얼굴로 물어보자 하녀는 머뭇거리다가 두근두근한 얼굴로 어디 가서도 이런 얘기하면 안 되는데, 사실 우리 도련님은……까지 말을 하셨다. 이러면 안 되는 건 알지만 나는 두근두근, 숨겨진 은밀한 후작님의 비밀! 이라는 흥분을 숨기지 못하고 쪼끔 기대해버렸다.

“로맨스 소설을 모으세요……!”

팬티쯤 나왔으면 놀란 얼굴 해줄 자신 있었는데……. 시무룩해진 얼굴은 숨기지 못한 채로 그거 저도 알아요, 라고 말하자 하녀는 깜짝 놀란 얼굴로, 그럼 아가씨께서 바로 그, 클레멘타인의 노래 한정판……! 하고 외쳤다. 

앗, 이거 쑥스럽군요. 하는 얼굴로 배시시 ‘네, 제가 그 책 빌려준 사람이에요.’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그러셨구나아. 그 취미도 알고 계신 분이라니, 신기하네요. 그러면 그 로맨스 소설을 모으시는 이유도 아시나요?”

“에……. 좋아해서?”

책은 좋아서 모으는 거지, 별 이유가 없지 않나. 아, 물론 나 같은 경우는 모으는 걸 좋아하기도 하지만 나중에 하나하나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려는 장대한 계획이 있기도 했다. 근데 후작님께서는 대대로 물려받으실 재산도 있을 거고, 이래저래 절대로 굶어죽으실 위험은 없을 거 같은데 뭐지.

“음……. 불온서적은 좋아해서 모으시는 거지만, 로맨스는 좋아해서 모으시는 건 아니에요.”

“그런 책을 좋아해서 모으신다고요?”

거 되게 특이한 좋아함이시네요. 우리나라 불온서적 선정은 나름대로 정확한 근거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 불온서적인 경우는 정말 불온(!)하고 이상한 책일 가능성이 높았다. 예를 들면 사이비 종교라든가, 사이비 종교라든가, 사이비 종교 같은 거 말이다. 아니면 정치색이 다르다든지, 뭐 동물 실험을 권장한다든지, 살인 기록이라든지……. 나는 모두 가지고 있었지만 그 책들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정치색 때문에 선정된 것이나 철학서는 차라리 괜찮았지만 그 이외에는, 이런 걸 종이 아깝게 출판하다니……. 라고 생각한다고나 할까. 그래서 후세에 의미가 있을 것 같은 내용만 내 나름대로 선별하고 있었는데, 내가 책을 모으기 시작한 이후로 그 중 몇 권을 찾는 요청이 있었으니 나름대로 성과가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아니면 말고!

“……그런데 공작가는 원래 하녀분들이 이런 걸 다 알고 있으세요?”

“어머나! 물론 아니죠! 저를 하녀라고 보셨어요? 저는 음……. 하녀죠, 하년데……. 공작님께서 일선에서 물러나시고, 후작님께서 공작위에 오르시면 자연스럽게 제가 집사가 된답니다!”

“우와, 능력자셨네요!”

“후후후, 이게 다 저의 완벽한 일처리 솜씨 덕분이지요! 사생활은 엉망진창이지만!”

그 말을 듣자마자 자연스럽게 얼마나 엉망진창일까 궁금해졌지만 물어봐도 되는지 몰라서 꾹 참았다. 엉망진창이라면, 집에 가면 씻지도 않고 자고 그런 거 아닐까나. 아니면 방 청소를 안 한다거나, 아니면 밥을 굶고 그냥 산다거나.

“전(前) 남자친구만 해도 스물네 명!”

“우와!”

이거야말로 깜짝 놀랄 엉망진창이었다. 도대체 뭘 하면 ‘전’ 남자친구가 스물네 명이 되는 거지? 그리고 뭘 했기에 다시는 안 보게 된 거야.

“신기해요! 저는 전 남자친구는 없는데!”

그러자 하녀님은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봤다. 

“아니, 현(現) 남자친구는 있으세요?”

“있죠, 후작님이 제 현재 남자친구잖아요.”

물, 물론 제가 억지로 친구 하자고 조른 거기는 하지만, 하면서 웅얼거리자 하녀님은 아, 그 친구……. 하면서 김샌 표정을 지었다.

“제가 말한 남자친구는 그게 아니랍니다. 애인이라는 거죠, 요는.”

그 소리에 나도 모르게 눈을 내 인생에서 다시 떠본 적 없을 정도로 크게 떴다. 뭐, 애인이 스물네 명이었다고. 이 사람은 무슨, 엄청난 기술을 가지고 있다거나, 사실은 마녀라서 모든 사람들을 홀릴 수 있다거나!

“애, 애인을 스물네 명이나 만드셨어요?”

“귀족과는 달리 평민들은 꽤 자유로운 연애가 가능하니까요. 그런 것 치고서라도 저는 상당히 많이 만난 편이지만요.”

“대단하세요. 그 많은 사람들이랑 사귀느라 고생도 많이 하셨겠어요.”

“예, 아뇨……. 저기……. 고생은 그다지.”

“저는 남자분들이라든지, 여자분들이랑 말하기만 해도, 피곤하고 힘들고 그러던데.”

“예에……. 그……. 음……. 네. 그렇습죠.”

어쩐지 굉장히 부끄러워하는 모습에 나는 굉장히 의아해졌다. 아니, 충분히 자랑스러워하셔도 되는데. 남자를 스물네 명이나 애인 삼아 뒀다니, 어머니께서 아셨으면 카레아만큼이나 예뻐하는 딸이 됐을 것이었다. 카레아도 추종자는 많지만 집에 꽃다발을 보내거나 정식으로 교제한 남성은 열 명이 안 되는데. 대단해, 대단해.

“제 동생도 되게 예쁘거든요, 그런데 애인이 그만큼 있지는 않았어요. 하녀님은 대단하세요”

“아……. 음……. 네……. 그……. 도, 도련님 이야기로 돌아갈까요?”

“계속 얘기 하셔도 되는데. 근데 왜 그게 사생활이 엉망진창인 거예요? 제가 보기에는 대단한 사생활인 거 같은데. 자랑하고 다니셔도 될 거 같아요. 내 전 남자친구는 스물네 명이나 된다! 이렇게. 아니, 이미 동네에 소문이 다 나셨으려나.”

“아뇨, 소문나면 큰일 납니다! 저기, 도련님, 도련님 얘기로 돌아갑시다. 우리! 도련님 얘기 재밌겠죠? 자아, 여기 보세요!”

손을 살랑 살랑 흔드는 모습에 헤에, 하고 그녀의 손을 바라보자 아이 귀여워, 하는 식으로 내 매무새를 금세 고쳐주었다. 어쩐지 귀여움 받는 기분이라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녀는 바퀴가 달린 큰 전신 거울을 끌고 오더니 내 모습을 비춰주었다.

“어떠세요, 예쁘지요?”

말끔하게 차려입은 청초한 소녀가 서 있어서 깜짝 놀랐다. 우왓, 내가 내 입으로 말하기는 참 뭣하지만 확실히 최선은 최선이라고, 어느 때와도 다르게 정말로 내가 조금은, 아주 조금은 예뻐 보였다. 피부는 크림색에, 뺨은 자연스러운 다홍색으로 생기 있어 보였는데, 파란 드레스에서 칙칙하고 지쳐 보였던 것이 언제였느냐는 듯이 빛나는 것이, 이 드레스 염치 불구하고 가져가고 싶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아니, 하녀님을 데리고 가는 게 맞는 건가? 음, 그렇군……. 

하지만 생각해보면, 후작가 집사쯤이나 되는 하녀를 내가 감당할 수 있을 수도 없으며, 무엇보다 우리 집에 데리고 갔다가는 이분의 신세를 망칠 게 뻔히 보였다. 힝.

고개를 살짝 끄덕끄덕하면서 돌라는 대로 돌아보고 앉아도 보고 했더니, 하녀는 아주 만족스럽다는 눈으로 내게 향수를 뿌려주고는 참, 제 이름은 올리비아예요. 올리비아 로렌스. 라고 말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릴리아나 라핀트예요.”

그러자 로렌스 양의 눈이 내가 커졌던 만큼 커졌다.

“그 못생겼다고 소문난, 그 귀족 가 망나니 아가씨요?!”

“어……. 음……. 네. 아마도 맞을 거예요.”

“아니, 무슨 소문이 그따위로 나요?!”

“그……. 그걸 저한테 물어보셔도……. 어……. 그게, 별로 안 예쁘고, 음……. 망나니인 거는, 제가 결혼을 일찌감치 포기해서, 그리고 편지도 못 쓰고……. 춤, 춤도 그다지 소질도 없고요.”

“아니, 그걸 진지하게 묻는 게 아니라, 아니 아가씨가 어때서요! 이만하면 예쁘지!”

진지하게 열을 내줘서 오히려 신기했다. 근데 제가 안 예쁜 거는 하늘이 알고 땅이 알아서요. 그게 제가 귀족이라서 그렇게 말해주시는 건 알겠는데, 저한테 아부해봤자 변하는 것도 없구요. 으으, 이런 칭찬에 도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모르겠는 데다 뭣보다 듣고 있기 불편하고 창피했다.

“그게, 후, 후작님께서는…….”

“아, 그래. 도련님이 왜 로맨스 소설을 모으시고 읽으시느냐면요, 방을 꾸미기 위해서예요.”

“방이요? 무슨 방?”

혹시 푸른 수염 이야기 아세요? 하고 로렌스 양이 얄궂은, 고양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 앗, 재채기 나올 것 같아. 

“엣츄! 어, 음……. 네, 그 내용 알아요.”

“후작님도 약간 푸른 수염 같은 구석이 있으시거든요, 그게…….”

“사실은 집에 시체가 있나요?!”

약간 스릴 있어! 하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물으면서도 진짜로 있으면 당장 이 집을 떠나겠다는 각오를 하고 있자 로렌스 양은 삐끗하고 잠깐 몸을 비틀거리더니 말했다.

“아니, 무슨 상상을 하시는 거예요!”

“푸른 수염은 그런 내용인데…….”

“아, 글쎄 그런 구석이 있으시다니까요!”

“그럼 혹시 수염이 파랗게 나신다거나…….”

“들어보세요!”

넹. 얌전히 똘망똘망한 눈으로 바라보자 다시 심각한 분위기를 잡은 로렌스 양은 고개를 숙이고 낮은 목소리고 그게에! 까지 말했다. 이런 내용은 보고서에 없어서 사실 나도 꽤 긴장하고 있었다. 방? 무슨 방을 꾸미시길래.

“후작님께서는 사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끄야아아아다아아야다!”

말하던 로렌스 양이 소리를 질러서 나는 와장창 넘어졌다.

“도, 도련님! 아니 꾸미는 도중에 들어오시면 어떻게 해요!”

“안 나오고 왜 아직까지 떠들고 있나.”

후작님께서는 거침없이 걸어오더니 의자에서 굴러 떨어져 추하게 넘어진 내 팔을 잡더니 일으켰다. 후, 후작님. 아픈데……

힘도 세신 후작님께서는 나를 거침없이 일으키셨는데, 나는 얌전히 일어나면서 후작님에 의해서 죄다 재정비 당해야 했다. 보통 이러면 떨려야 하는데, 떨리기는 떨린데 두근두근, 사랑에 빠질 것 같아! 하는 떨림이 아닌, 창고에 숨어 있는데 살인범이 창고 문을 하나씩 확인할 때의 그 떨림이었다. 사……, 살려주세요.

청람색의 눈이 화사한데 너무 화사해서 거기서 빛이 나와서 나를 쏴죽일 거 같았다. 나는 자꾸 터져 나오려는 딸꾹질을 꾹 눌러 참고 얌전히 후작님이 돌리면 돌리시는 대로, 칼라를 고치면 고치는 대로 차렷,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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