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빨리 튀어와. 여기 홍대 앞인데 , 두 시간 안에 안 오면 일자리는 없던 걸로 한다.”

알고 지낸 지 25년.

하지만 조찬희와 구세온의 관계는 악연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었다.

왜 쟤는 나한테만 시비야?

아버지의 사업 악화 후 걸려온 전화 한 통에 세온의 태국 음식점 <팔리>에서 웍을 잡게 된 찬희.

그런데 세온은 ‘왜’ 태국 음식점을 차린 걸까?

“조찬희, 너 나 좋아하지?”

얘가 미쳤나? 정신이 나간 거 아니야? 누가 누구를 좋아해?

“너 왕자병 있니?”

2. 작가 소개

정지원

‘깊은 밤을 날아서’로 2004년 신영 사이버 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하였고 2005년 ‘인연’으로 북박스 장르 문학상 로맨스 부문 가작을 수상하였다.

최근 출간작으로는 ‘행복의 레시피’, ‘경성사건부’, ‘하데스와 페르세포네’, ‘하우스 허즈번드’, ‘초혼사’, ‘진홍의 마녀’ 등이 있고, 단편집 ‘일상 혹은 환상’, ‘커피 잔을 들고 재채기’, ‘한국 환상문학 단편선’ 등에 참여했다.

이메일 주소는 sandmeer@hotmail.com이다.

3.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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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4. 미리 보기

갑자기 손에 들고 있던 블랙베리가 드르륵 울리는 바람에 찬희는 정신을 차렸다. 액정에 떠 있는 번호는 낯설었지만, 한국에 있는 친구들의 번호 중에 바뀐 게 하도 많아서 이것도 그런 것 중 하나일 수 있었다. 아니면 면접 보고 온 레스토랑 중 한 곳에서 연락한 걸지도 모르지. 갑자기 희망에 들떠서 그녀는 조신하게 전화를 받았다.

“네, 조찬희입니다.”

- 야, 백수. 뭐 하냐? 어디 커피숍에서 우아하게 커피 빨고 있지?

스, 스토커인가? 찬희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본 다음 전화기 액정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모르는 번호였다. 목소리도 모르겠는데, 대체 누구지?

- 여보세요? 대답도 안 하냐? 역시 놀고 있었구만. 당장 튀어와라. 일거리 줄 테니까.

“저, 저기, 누구세요?”

조심조심 묻자 전화기에서 요란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 사람 목소리도 잊어버렸냐. 진짜 너무하는데. 너랑 나랑 안 지가 한 25년은 될 텐데.

25년? 25년이나 안 남자가 누가 있지? 25년이라면 여섯 살 정도부터니까 그때부터 알았던 남자라면 부모님 친구 아들들뿐이다. 그러니까 송기택, 박찬성, 그리고…….

구세온.

SHITSHITSHIT.

‘지금 거신 전화는 잘못된 국번이오니 확인 후 다시…….’ 그 말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이미 조찬희입니다 하고 전화를 받은 주제에 그런 방법을 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방법이라면 누구신지 모르겠는데요, 장난전화 하지 마세요, 하고 끊는 정도일까. 하지만 왠지 천하의 구세온이 그런 방법에 넘어가진 않을 것 같았다.

- 야, 전화 끊었냐? 빨리 안 오면 일자리 없어. 누군 일자리가 남아돌아서 너 같은 날백수한테 연락하는 줄 알아?

“그럼 날백수 아닌 훌륭한 사람한테 줘. 왜 나한테 주겠다고 선심 쓰고 그래? 너 선심 같은 거 쓰는 타입 아니잖아, 구세온.”

전화기에서는 다시금 웃음소리가 울렸다.

- 너 미국 몇 년 갔다 오더니 성격 버렸다? 미국 물 먹으면 그렇게 되나? 전에는 좋은 게 좋은 거 어쩌고 하며 실실 웃기만 하더니.

제기랄, 난 너 싫으니까 전화 끊어, 라고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미국에서 얼마나 성격을 버렸건 간에 남에게 그렇게까지 싫은 소리는 못하는 게 조찬희, 만 29세 2개월의 타고난 성품이었다.

- 어쨌든 간에 빨리 튀어와. 여기 홍대 앞인데, 두 시간 안에 안 오면 일자리는 없던 걸로 한다.

너 아니라도 일자리 구할 데 많거든, 이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지만, 솔직히 일자리는 없었다. 최소한 가서 이야기라도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 혹시 월급이 많을지도 모르잖아. 어쨌든 구씨 집안은 외식업계에서 대단히 잘나가고 있으니까.

정민과 나윤의 이야기를 들은 후에 호기심에 인터넷을 찾아보고는 진심으로 놀랐다. 공무원이라든지 변호사처럼 시험을 봐서 통과하는 직업이야 열심히 공부해서 됐나 보다 생각할 수 있지만, 사업은 이야기가 달랐다. 그런데 3년 전부터 공식적으로 사업에 뛰어들었다는 세온의 이력은 굉장했다. 뭐, 신문 인터뷰 같은 데서 과장하는 건 흔한 일이지만, 과장이라고 해도 대단했다. 치열한 국내 외식업계에서 3년 만에 이탈리안 레스토랑 체인을 성공시키고, 고급 프렌치 퓨전 레스토랑을 열어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프렌치 레스토랑의 쉐프는 찬희도 들어본 적 있는 유명한 사람이었다.

자사의 브랜드를 키우는 것뿐만 아니라 최근 새롭게 런칭한 자회사에서는 일반 음식점의 컨설팅도 담당했다. 망해가는 음식점을 개선하여 유명 음식점으로 키우는 과정을 케이블 TV 쇼 형식으로 방송도 하는 중이라고 했다.

인터뷰 기사에는 당연하지만 사진도 실려 있었다. 양복 차림에 팔짱을 끼고 살짝 옆으로 서 있는 모습이 무슨 모델 같았다. 생각해보면 구씨 아저씨도 부모님 모임에서는 제일 인물이 좋은 분이었다. 종종 모임에 다녀오면 그녀의 아버지는 남자는 외모가 아니라 배짱이야, 그놈은 집안 사업을 물려받아서 사업하는 배짱이라는 게 없다구, 하고는 큰소리를 치시곤 했다. 그게 순전히 외모에서 밀리기 때문이라는 건 집안의 세 여자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근데 너 내 전화번호 어떻게 알았어? 나 전화번호 바뀌었는데.”

문득 찬희는 인상을 찌푸리고 물었다. 다시금 전화기 안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얘가 이렇게 잘 웃는 타입이었던가? 그런데 영 사람의 신경을 건드리는 타입의 웃음이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비웃음?

- 네 동생이 알려주더라. 하여튼 빨리 와라. 나 바쁘니까.

전화가 뚝 끊겼다. 허, 참, 기가 막혀서. 통화시각만 반짝이는 휴대전화 액정을 바라보다가 찬희는 가방에 전화기를 집어넣고 일어섰다. 아르바이트생의 시선이 따가운 것 같기도 하고, 자리가 없어 서성거리는 사람들의 눈길에 기가 죽기도 해서 더 앉아 있기가 어려웠다. 커피숍에서 우아하게 커피 빨고 있냐고? 먹고 죽을 돈도 없어서 그냥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다, 떫냐, 그렇게 말해줄걸. 난 왜 늘 지나가고 나면 할 말이 생각나는 걸까.

“내가 그렇지, 뭐.”

찬희는 한숨을 푹 내쉬고서 중고로 팔아도 커피를 삼백 잔은 넘게 마실 수 있을 것 같은 작년 한정판 로에베 가방을 들고서 터벅터벅 스타벅스를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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