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그래도 저 아가씨는 할만 왕국의 공주님이란 말이다! 그 크리트리프 왕의 딸이라고! 너는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도 되고 싶다는 말이냐? 너희들은 아직 어려!”

수학 강국, 할만. 어느 날 국왕에게 대륙 최고의 수학자 카이 렌으로부터 나라의 운명을 결정지을 중요한 편지가 도착한다. ‘에이롯샤 공주를 3년간 내게 보내달라. 그렇지 않으면 왕국방어선이 위태롭다.’ ……모든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수학의 탈을 쓴, 수를 사랑하는 수학자와 그를 사랑한 현명한 여자의 동화 같은 사랑 이야기!

“아, 참. 카이, 한 가지 말이 빠졌네요.”

“무슨 말이요?”

“아까 평생…… ‘믿으며 위하며’에 더해서…….”

아, 낯부끄러워라. 정말 사랑은 유치한 것이다. 부끄러운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말을 서슴없이 내뱉게 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대단히 용감한 것이다.

“행복하게 살아야죠.”

내가 밝게 웃었다. 행복하게, 라는 말이 나오자 카이는 뒤이어서 다시 내게 입 맞췄다.

※ ‘가하 에픽’은 다양한 시대, 색다른 소재, 독특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은 도서출판 가하의 새로운 브랜드입니다. 로맨틱한 판타지가 가득한 가하 에픽, 지금 만나보세요!

2. 작가 소개

한하연

쓰는 일이 좋아서 시작했다가 지금도 쓰고 있는 평범한 글쓴이.

동화와 귀여운 걸 좋아하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면도 있는 그런 사람.

▣ 출간작

그녀는 수학을 배운다

엘핀느의 꽃

붉은 벨벳 위 하얀 진주 한 알

달콤한 말 세 방울

푸른 단검과 흰 장미

집(House) - 단편집

비밀의 숲 - 박소연 작가와 공저

▣ 출간 예정작

맑은 하늘 푸른 잎새

목련화

3. 차례

#5. 평면각이란 한 평면 위에서 서로 만나고 일직선이 되지 않는 두 선 사이의 기울기이다

#6. 어떤 것의 끝을 경계라 한다

#7. 도형이란 하나 또는 그 이상의 경계에 의해 둘러싸인 것이다

#8. 원이란 그 도형의 내부에 있는 한 정점으로부터 곡선에 이르는 거리가 똑같은 하나의 곡선에 의해 둘러싸인 평면도형이다

#9. 그리고 이 정점을 원의 중심이라고 한다

#10. 평행선이란 동일 평면 위에 있고 어느 방향으로든지 무한히 연장해도 절대 만나지 않는 두 직선이다 (1)

4. 미리 보기

“카이.”

“왜요?”

“원래 이거 가끔 이렇게 빛이 나요?”

금빛의 수식이 마치 피아노의 건반이 눌린 것처럼 순차적으로 손가락을 맴돌며 빛을 내다가 다시 금빛으로 안정감 있게 반지처럼 걸렸다. 우리는 창밖에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티타임을 갖던 중이었다. 잔잔한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고 말이다. 낭만주의에 근거한 음악이다. 우리는 머리보다는 ‘가슴에 손을 얹고’ 이 음악을 듣고 있다. 아, 이 표현은 내 표현이 아니다. 어디선가 읽은 표현이다.

내가 갓 구운 쿠키를 한입 베어 물려다 카이가 내 손가락을 쳐다봤다. 쿠키가 이렇게 잘 어울리는 남자라니, 나는 처음 봤다. 그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잘 구워진 쿠키 맛 같은 느낌으로 웃어주었다. 그러나 내 손가락을 보는 그의 눈길은 꼼꼼했다.

“흐음……. 이번이 처음이 아니군요.”

“네. 저번에는 좀 더 불규칙했어요. 지금은 도레미파솔라시도, 같은 느낌이라면 그때는 도에서 시로 가거나 솔로 간다든가 하는 등의 불규칙? 그걸로 악보 하나 써도 되겠더라고요. 불행히도 나는 음악에는 수학만큼이나 전혀 소질이 없지만.”

“그럴 것 같아요. 내 눈에도 그렇게 보여요.”

“아……. 그렇지만 듣는 건 좋아해요.”

“그것도 알아요. 음악의 좋은 점은, 이해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는 거죠.”

카이는 내 손가락을 가만히 잡고 보았다.

“파쇄되지는 않았지만 이중으로 걸어보죠. 뫼비우스의 띠 모양으로 걸고 싶지만 그건 롯시 자체에도 위험부담이 가니 피하기로 하고요.”

“이거, 그냥 아이샤 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게 하는 장치랬잖아요. 뭔가 다른 게 더 있는 거예요?”

“아아, 롯시. 나를 좀 더 믿어봐요. 내가 롯시에게 해가 갈 만한 일을 할 것 같아요?”

“‘네’도 아니고 ‘아니요’도 아니에요. 나는 이 반지의 명확한 용도를 묻고 있는 거예요.”

“명확한 용도……. 명확한 용도……. 롯시를 위험에서 지켜준다고 말하고 싶지만 너무 막연한 이야기군요.”

“진짜 막연하네요. 도대체 수학자라면서 모든 게 왜 이렇게 불분명해요?”

“롯시가 너무 명확한 거예요. 구체적이고. 하지만 나는 그게 나쁘지 않아요.”

아, 저 두루뭉술한 표현. 하지만 그와 난 이렇게 정반대이지만 이제는 조금씩 합의점을 도출해내고 있다. 눈앞의 남자는 천천히, 그리고 느긋하게 내 손가락 위의 수식을 한번 손가락으로 훑어봤다. 마치 악기를 연주하듯이. 그리고 실제로 또로로롱, 하고 맑은 소리가 났다.

“왜요? 자기랑 다르면 흔히 부딪히잖아요?”

“우리의 근본적인 성격은 이해가 잘 닿는 편이죠. 그러니 그런 세부적인 점은 좀 달라도 괜찮아요.”

“아, 또 저 애매모호한 표현.”

“왜냐하면 그것이 서로를 채워주거든요. 당신의 급하고 구체적인 성격이, 나처럼 느긋하고 모호한 성격을 채워주고 변화시키고 닮아 가게 하죠. 사람은 부딪히면서 동글동글해지는 거예요. 좋은 거죠.”

“이번 건 좀 구체적이라 낫네요. 그렇지만 아직 원이 되기에는 우리는 그저 직선 두 개가 접점으로 맞닿은 것뿐이죠. 그래요, 평면각 같이. 그나저나 카이. 이건 좀 불공정해요.”

“재밌는 비유예요. 뭐가 불공평해요?”

“당신은 결국 이름 문제의 승자가 되었는데, 나에게는 주어진 것이 없잖아요.”

“아, 부족하단 뜻이죠. 기다려요.”

카이는 쿠키를 천천히 먹은 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은은한 재스민 향이 가득 퍼지는 좋은 차다.

“언젠가 유명한 보석 세공사한테 대가로 받은 건데, 이렇게 쓸 줄이야. 이런 건 필요 없다는 나에게 억지로 쥐어줬었죠. 사람 일이란, 정말 모르는 거야.”

마지막 말은 혼잣말이다. 이 남자, 은근히 혼잣말을 잘하는 편이다. 카이는 마치 마술사처럼, 내 손을 잡고 내 손가락을 한번 훑었다. 수식들이 마치 자석처럼 카이의 집게손가락에 달라붙어서 줄줄이 따라갔다. 내가 멍하니 보고 있는 사이에, 카이는 그 수식을 빙글빙글 돌려서 자신의 왼손의 네 번째 손가락에 다시 감고 돌리고 꼬았다. 그리고 그 왼손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원래 손가락이 감겨 있던 내 손을 덮었다.

카이의 손가락 위에서 나에게 걸려 있던 수식과는 다른 모양의 수식들이 형태를 갖추어 자리 잡았다. 은빛의 그것은 나 때의 섬세함과는 다르지만 단순한 아름다움이 영롱하게 빛났다.

내가 카이의 손가락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에 그는 내 손을 덮고 있던 자신의 손을 뗐다. 분명히 없어졌을 수식들이, 내 손가락에 다시 걸려 있었다. 다른 모양으로 다르게 배열되어 있는 그 금빛 공식들 사이사이에 자잘한 보석들이 반짝이면서 걸려 있었다. 무지갯빛으로.

“다음번에는 아까처럼 공식들이 요동치지는 않을 거예요. 보석들에 걸려서 말이죠. 빛이 가끔 나기는 할 테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말아요. 별문제 없는 거니까.”

“카이……. 예뻐요.”

나는 환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느릿한 카이는 그답게 반응도 느긋했지만 확실하게 만족한 것처럼 보였다. 선물 받은 것은 난데, 그가 더 뿌듯해 보여서 나도 좀 더 기분이 좋았다.

그의 맑은 하늘빛 눈동자가 행복하게 빛나게 해주고 싶다. 같이 지내다 보니 그런 기분이 좀 더 들었다. 그는 불행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행복해 보이지도 않았고 언제나 느긋하게 웃고 있었지만 쓸쓸해 보였다. 그런 그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고마움의 표시, 없어요?”

“고……마워요.”

그 말에 카이가 살짝 삐진 체를 했다. 맙소사, 앵두 같은 느낌이 드는 살짝 도톰한 붉은 입술을 비쭉이니 몹시도 귀엽다. 뭔가, 나 자신이 여성으로서의 귀여움에서 졌다는 기분이 든다. 조금 퉁명스러운 말투로 카이가 중얼거렸지만 그의 귀여움에 묻혀 투정으로도 들리지 않는다.

“아, 그것으로는 부족해요. 그건 최고의 보석 세공사한테 받은 거라고요. 일반인들은 찾지도 못하는, 서쪽의 티엔과 같이 지내는 여자한테 받은 건데 말이죠. 그 작업장으로 들어가는 문을 찾는 것이 어지간한 공식을 푸는 것보다도 어려워요. 그냥 고맙다는 말 한마디로는 부족하죠. 지금은 어디로 옮겼을지 나도 모를 정도라고요.”

서쪽의 티엔. 모든 게 가려지고 수수께끼인, 정체조차 불분명하며 벌써 몇 대째 계승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으면서도 실력은 티엔 중에 최강인 존재. 티엔들조차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비밀의 존재. 그런 그가 어디에 있는지 한 번쯤은 찾아봤다는 식으로 태연히 말하는 남자.

아, 카이와의 대화는 가끔 위치의 차이를 느끼게 해. 마치 옆집 아주머니를 말하듯 편안하게 읊어대는 그 이야기에 나는 어이가 없었다. 최고의 보석 세공사. 설마, 그 유명한 얼음 마녀를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나는 얼음 마녀가 서쪽의 티엔과 같이 지낸다는 사실은 들어본 적이 없다. 아마도 크로니클 제국의 황태자라 해도 모를 것이다. 이것은 극비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내가 이 저택에서 살다가 들은 이야기를 입 밖으로 잘못 내면 어느 순간 목이 뎅겅, 하고 잘리는 건 아닐까? 쥐도 새도 모르게. 위험부담이 큰 집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롯시,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이 사실이 알려지면 서쪽의 티엔이든 얼음 마녀이든 둘 중 하나에게 보복을 당하겠지만, 내가 있잖아요. 그리고 소문이 잘못된 것이지, 그들은 선량한 사람들이에요. 얼음 마녀는 그냥 별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잖아요?”

“지금 이 문제의 근원이 바로 당신이십니다만?”

“아하하. 괜찮아요. 롯시는 그런 유의 이야기는 나 외에는 말할 수 없어요. 무엇하러 내가 수식을 그렇게나 복잡하게 꼬아가며 걸어준다고 생각해요?”

“……병 주고 약 주고…….”

“아,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데……. 어째서 사람이 이렇게 애써서 도와주면 저렇게 까칠하게…….”

카이는 투정의 강도를 조금 더 올렸다. 아, 이건 여자들이나 쓸 법한 스킬인데, 어째서 내 눈앞의 귀여운 남자는 나한테 그것을 쓰는 걸까?

“도대체 뭐가 필요한데 이렇게 사람을 피곤하게 하십니까, 위대하신 현자이자 대륙 최고의 수학자님.”

나는 약간 딱딱해진 말투로 대꾸했다. 그러나 그런 내 태도에 오히려 카이가 더 달래는 듯이 애교 섞인 눈웃음을 치면서 나에게 말했다. 굳었던 내 얼굴이, 나도 모르게 탁, 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사람 맘 약해지게 하는 애교에는 일가견이 있다. 도무지 이길 수가 없다.

“여기, 여기…….”

카이는 웃으면서 턱을 괴고 자기 입술을 가리켰다. 가느다란 예쁜 손가락이 입술에 살짝 걸렸다. 새끼손가락을 물고 이야기하지 않은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자.

“감사의 인사.”

아무튼,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지!

“카이! 저번에 보름달 밤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그럴 마음도 없으면서 왜 자꾸 날 놀려요!”

“아하하. 그러게요. 하지만 롯시가 너무 귀여우니까…….”

말이 되는 소리를. 나는 밝은 내 갈색 머리를 뒤로 넘기며 대답했다. 갑자기 남자와 귀여움의 정도를 다투고 완패 당한 내 처참한 답변이 이어졌다.

“……누가 누구보고 귀엽대요! 가서 거울을 다시 봐요. 누가 더 귀여운가.”

그 말에 카이가 갸우뚱하니 고개를 기울였다. 골드브라운 계열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고갯짓과 함께 살며시 넘어갔다. 살짝 날 향해 동그랗게 뜬 하늘빛 눈동자는 순진함을 담고 있었다. 당연한 것을 내가 거부한다는 듯이.

“그래서, 안 해줄 거예요?”

“카이……. 이 비상식적인 사람! 너무 오래 혼자 산 게 분명해요! 애초에 마음에도 없으면서 날 놀리려고 왜 자꾸 그러는 거예요!”

“그렇지만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잖아요?”

“그게 문제라고요.”

흥분했던 나는 다시 가라앉아버렸다. 하아, 마치 풍선의 바람을 빼듯이 사람의 맥을 빼버리는 재주는 도대체 어디서 배운 걸까? 나는 퍼뜩 떠오른 생각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당신은 아이샤 님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도 괜찮아요?”

“아……. 나도 당신하고 비슷한 걸 자신에게 걸었어요.”

나는 납득한다는 듯이 대꾸했다.

“수학이란 참 편리한 학문이로군요.”

“그렇지만 참 잔인한 학문이기도 하죠.”

카이가 무 자르듯 숭덩 수학을 난도질했다.

“아하, 지금 표현은 우리 두 사람한테 바뀐 거 같지 않아요?”

“그러네요.”

나는 그때 놓친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카이의 손가락에 만들어진 수식의 모양과, 내 손가락 위에 만들어진 수식이 보석의 차이만 있을 뿐 몹시도 비슷한 모양새라는 것을. 그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나는 큰 의미를 둘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그때 당시 내 눈에는 그저 복잡한 수식들이 뒤엉켜서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어낸 형태로만 보였으니까.

더 이상의 대화를 포기하고 뒤돌아선 내 등 뒤에서 카이가 자기 손가락 위의 수식에 살며시 입 맞췄다는 것도, 나는 그때는 몰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