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스타 1권 - 로맨스 소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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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짧게 승하가 소리를 내었다. 가슴에 무언가 긋고 지나간 것처럼 맑고 청량한 것이 울렸다.
지연우다. 진짜 지연우야.
상대는 승하를 모르겠지만, 승하는 상대를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실물로 본 것은 처음이지만 그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더 조그마하고, 가늘고, 창백했지만…… 지연우다.
버스를 많이 타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버스 노선도가 불가사의의 일종처럼 느껴지는 법이다. 아이는 버스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인 듯했다. 연방 고개를 갸웃거리며 혹여나 도와줄 사람이 없나 주변을 둘러보다가, 다시 기가 죽어 노선도를 올려다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게 뭔지 당최 모르겠다는 서투른 태도가 인신매매범이나 소매치기에게는 금테를 두른 듯 눈에 띄는 표적이 될 정도로 어수룩해 보였다.
“타요.”
“네?”
승하는 손을 뻗어 아이가 보물단지처럼 끌어안고 있는 쇼핑백을 들었다.
“타라고. 데려다 줄게요.”
아이의 눈에 잠시 사라졌던 의심하는 기색이 돌아왔다. 참 교과서적인 반응이었다. 승하가 지금 타라고 하는 것이 차가 아니라 자전거라는 사실만 제외하면. 자전거로 납치 같은 걸 할 수 있는 인간이 있다면 얼굴 좀 보고 싶다.
“나 진짜 수상한 사람 아니에요. 그리고 둘이 타면 그렇게 빨리 달릴 자신도 없고.”
“나 완전 가볍거든요!”
엉뚱한 곳에서 태클이 들어왔다. 승하는 슬며시 웃고 말았다.
“그럼 다행이고요.”
잠깐 고민하던 아이가 쭈뼛거리며 묻는다.
“신분증 같은 거 보여 줄 수 있어요?”
승하가 어깨를 으쓱했다.
“잠깐 운동 나온 거라 지갑을 안 갖고 나왔어요. 하지만 신분증을 보면 어쩌려고? 거기엔 내 이름하고 주민등록번호밖에 없는데……. 꽁꽁 묶여서 새우잡이 어선에서 새우 까면서 내 주민등록번호 알면 좋나? 보다시피 난 자전거 말고 갖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어디 들어가서 뒤통수를 때려 기절시킬 일은 없을 거예요. 내가 그쪽보다 덩치가 두 배는 되는 것 같긴 하지만.”
그의 말에 이번엔 아이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다시는 이러면 안 되는 건데 말이죠, 이번에만 그냥 무조건적으로 믿어 봐요.”
“이번에만, 이라고요?”
“응. 하지만 다시는 이러면 안 돼요. 다들 나 같은 게 아니거든. 원래 무조건적으로 믿는 건 딱 한 번이면 충분해요.”
“그 딱 한 번을 지금 쓰라고요?”
여자 아이는 인상을 구기며 가볍게 웃는 승하를 바라보았다. 큼직한 선글라스 뒤에 가려진 커다래진 눈이 천천히 두 번 깜빡였다.
사람이 많은 버스 정류장이 기묘하게 조용해졌다.
바람이 녹음 짙은 나무의 잎사귀를 스치고 지나가자 마치 박수갈채 같은 소리가 들렸다. 어제 내린 비가 잎사귀에 남긴 빗방울들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마침내 아이가 큰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가 악착같이 잡고 있던 쇼핑백을 내밀자 승하는 그것을 자전거의 손잡이에 걸었다.
“깨지는 건 아니죠?”
“네. 곰 인형하고 초콜릿 같은 거예요.”
역시 선물이군.
예상했음에도 선물이라고 생각하자 약간 심통이 일었다.
“근데 류리현이 이런 걸 받을까 모르겠네…….”
놀리듯이 말하려 한 것이지만 뒤에 앉은 여자 아이가 팔을 그의 허리에 둘렀기 때문에 놀라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 혹시 땀 냄새 나지 않을까? 그런데 팔이 어쩜 이렇게 가늘고 따뜻할까?
이승하,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지. 열여섯 살밖에 안 된 아이인데.
별별 생각이 다 나는 것을 누르려고 노력하는데 여자아이가 등 뒤에서 한숨을 폭 쉬는 것이 느껴졌다.
“그냥 앞에다가 놓고만 오고 싶어요.”
어차피 앞에다가 놓고 오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후 4시. 이런 시각에 작년 온갖 영화제의 신인 남우상과 인기 남우상을 휩쓴 류리현이 집에 있을 이유가 없을 테니까. 아니, 집에 있다손 치더라도 팬들을 응대해 줄 리가 없을 테니까.
차라리 다른 팬들과 차별화된 수단을 쓰는 것이 더 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만이 할 수 있는 그런 일 말이다.
그러나 뒤의 아이는 아직 어려서 그런지 순진하고 순수하기만 하다.

[미리보기]

[고전적 관계, 해문재단의 외아들 vs 피겨 요정, 스폰의 이유
유명한 스포츠 저널리스트이자 해문재단의 외아들인 이승하(32)와 해문재단이 후원하고 있는 아이스쇼에 참가하기 위해 귀국한 지연우(26)의 데이트 현장이 포착되었다. 현재 밀착 기사의 명목으로 같은 호텔에 묵고 있는 두 사람은…….]

숨이 콱 막혀 연우는 저도 모르게 가슴 위로 손을 얹었다. 신문 낱장이 팔락하고 흔들리며 잉크 냄새가 피어올랐다. 일단 기사가 난 것도 문제지만 이렇게 악의적이라는 것은 더 문제였다. 해문 재단이 연우의 단독 스폰으로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붓고 있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었다. 그런데 만약 그 아들과 연우가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된다면…….
연우의 시선이 무의미하게 하영을 바라보고 다시 레이를 바라보았다.
“선배, 알았어요?”
한참 후 겨우 말을 꺼냈을 때, 연우의 목은 완전히 잠긴 상태였다.
“뭘?”
“이 기자님이 해문재단 사람이라는 거요.”
“전혀 몰랐지. 알려져 있는 사실이 아니잖아.”
잠깐 말을 끊었던 하영이 달래는 듯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기사 내용은 신경 쓸 것 없어. 음, 이런 이야기는 이런 식으로 진행시키는 게 제일 재미있거든. 어차피 얼마간 떠들어대다가 말 거야.”
파삭, 마른 소리를 내며 신문이 구겨졌다. 어차피 어떤 말로도 위로할 수 없을 걸 아는 하영은 입을 다물었다.
대개의 경우 상처 입을 말을 직설적으로 상대의 면전에 대고 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그것이 공인(公人)이 되면 조금 달라진다. 상처 입을 만한 말일수록 면전에서 큰 소리로 하게 되는 것이다. 아니, 상처 입을 말이기 때문에 하는 것일 수도 하다.
“진짜였군.”
하영이 혼자 중얼거렸다.
“뭐가요?”
“사진은 나왔지만 난 사실 허튼소리라고 생각했거든. 아직 이 기자님 쪽의 일방적인 감정이라고. 그런데 아니었구나?”
이 와중에도 더럽게 예민한 하영의 말에 연우가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표정이 변하지 않은 채로 하영은 대꾸했다.
“부분적이라도 사실이라면 이야기가 커질 수도 있겠다. 네가 전혀 몰랐다는 건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거야.”
알고 있는 건 뭐고 모르는 건 또 뭘까?
“그런 거 아니에요.”
문득 변명을 내뱉고 나니 승하가 ‘그런 일’이 아니라고 했던 그 밤이 떠올랐다. 그제야 그 여자의 목소리가 기억났다. 누나라고 말해서 어영부영 넘어갔는데 기사와 퍼즐을 맞춰보면 서해민이라고…… 주로 에이전시가 이야기하는 바로 그 사람의 목소리였다.
연우는 눈을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산소가 부족했다. 차가운 공기에는 산소 함량이 낮은 것처럼 그녀는 숨이 가빠 왔다.
“나, 나 좀 바람을 쐐야 할 것 같아.”
“그래.”
하영은 그녀의 어깨를 안은 채 일어나 레이에게 양해를 구했다.
본격적인 아이스쇼 연습이 시작되는 날이라 일찍 나왔던 선수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연우는 그대로 링크를 나섰다. 입술을 베어 물자 금세 피 맛이 혀끝에 감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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