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늦기 전에, 내 뇌가 터져버리기 전에 한마디만 해줘.
가지 말라고, 네 곁에 있어달라고.
네가 없으면 난, 온전한 나로 살아갈 수 없어. 제발, 제발…….

내가 아픈 만큼 네가 아팠으면 좋겠어.
내가 힘든 만큼 네가 힘들었으면 좋겠어.
이건 모두 네 탓이야.
그러니 날 원망하지 마.

사랑이라는 말과 감정에 트라우마를 지닌 여자, 박지연.
이별이 두려워 사랑을 거부하는 그녀 앞에
사랑이냐 지독한 외로움이냐는 선택의 갈림길이 나타났다.

한 여자를 10년 동안 변함없이 사랑한 남자, 공재판.
오랜 기다림 끝에 희망의 빛 한 줄기가 비치자
사랑을 얻기 위해 인생을 건 최후의 도박을 계획한다.

사랑을 외면당해 상처받아 독기를 품은 남자의
무서우리만치 처절한 최후의 방법이
겹겹이 장벽을 쌓아올려 닫아버린 그녀의 마음을 녹일지
아니면 더욱 깊은 곳으로 숨어버릴 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본문 중에서>

지연은 다시금 침묵했다. 재판은 숨을 들이쉬고 본론을 꺼냈다.
“어제는 미안했어. 네가 너무 거부하니까 자존심이 상해서 조금 이성을 잃었던 것 같아.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그는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네가 원하면 내 마음 접을게.”
거짓말이다.
“어제 밤새도록 생각해봤는데, 전혀 모르고 전혀 상관없는 남으로 돌아가는 것보단 좋은 선후배 사이로 남는 게 나한테도 좋을 것 같아.”
그녀를 안심시킬 수만 있다면 더한 거짓말도 할 수 있었다.
“서로 모르는 척 잊고 살기에 넌 너무 괜찮은 녀석이거든.”
--------------------- 1권 p.152

* * *

“가주세요. 보고 싶지 않아요.”
“지연아.”
“안 들려요? 가라구요.”
“지연아.”
어깨에 손이 닿았다. 지연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버럭 소리치며 상체를 일으켰다.
“내 몸에 손대지 마!”
수술 부위가 찢어질 듯 아팠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수술 부위를 누르고 눈을 부릅떴다.
“엄마가 죽는 순간 당신과 나의 인연도 끝났어. 내게 당신이란 아버지는 없고 당신에게도 나라는 딸은 없어. 그러니 내 눈앞에서 꺼져. 당장 사라지란 말이야!”
“지연아.”
그는 눈시울을 붉혔다. 지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왜? 엄마를 죽인 것도 모자라 나까지 죽이려고? 이 세상에 나란 존재도 없애고 그 여자랑 그 아이랑 오순도순 살아보게?”
“지연아!”
경악의 외침 따윈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는 화끈한 눈가를 거칠게 비비고 쐐기를 박았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 당장 여기서 나가. 그리고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만약 다시 나타난다면 정말로 당신 눈앞에서 죽어버릴 거야.”
그래도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왜? 지금 죽어주길 바래? 좋아, 그래주지.”
--------------------- 2권 p.80~81



<등장인물>

•박지연 - 뚜렷한 인생의 목표를 세워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억척형 인물로 중고생 및 공무원 시험 인터넷 강의를 하며 인기가 좋다. 어릴 때 받은 충격으로 사랑과 결혼에 대해 심한 트라우마를 지닌 탓에 재판의 속을 새까맣게 타게 하는 존재.

•공재판 - 훤칠한 키에 핸섬한 외모와 더불어 부유한 집안 덕분에 부족함 없이 자라 종합병원 차기 원장감인 최고의 신랑감이지만 그의 마음엔 오직 박지연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10년의 기다림이 그를 지치게 했고,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결혼을 결심한다.

•공삼판 - 재판의 쌍둥이 동생. 지연과는 대학 동기이며 산부인과 레지던트 1년차이다. 다른 형제들과 달리 여성 편력이 심하며 유쾌하고 활발한 성격의 소유자로 지연과는 항상 티격태격하지만 그만큼 그녀를 걱정해주고 있다. 나름 차분하다고 생각하는 지연을 단 세 마디로 분노하게 만드는 특기를 지녔다.

•공사판 - 재판의 쌍둥이 동생. 지연과는 대학 동기이며 성형외과 전문의를 꿈꾸고 있다. 판 트리오 중에서도 심하게 과묵한 성격이며 말수가 극히 적지만 삼판의 영향인지 최근의 그는 다소 말 주변이 늘어난 편이다. 돈가스의 달인이기도 하며 삼판과는 다른 형태로 지연을 걱정해주고 있다.

•공오판 - 위의 세 형과 나이 차이가 꽤 나는 막내 동생으로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다. 특이하게 양성의 생식기를 지니고 있어 집안에서는 내심 여자가 되기를 바라고 있지만 본인은 누가 뭐래도 ‘남자’다. 누나가 없어 지연을 친누나처럼 잘 따르며, 그가 여자가 되기를 유치원 때부터 바란 익현이라는 죽마고우를 수족처럼 부린다.

•공원판 - 공씨 4형제의 아버지로 종합병원 원장. 극악의 작명 센스를 지녔으며 근엄한 아버지의 표본이지만 부인인 차공주 여사에게만은 한없이 부드러운 남자다. 지연을 친딸처럼 생각하고 있으며 내심 며느리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차공주 - 공원판 원장의 부인이자 공씨 4형제의 어머니로 뛰어난 요리 실력을 지녔다. 독특한 훈육 방식으로 고수한 탓에 판 트리오는 그녀의 말이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서슴지 않는다. 그 덕분에 판 트리오는 상당한 수준의 요리 실력과 더불어 집안 일에도 고수가 되었다. 공 원장과 마찬가지로 지연을 친딸처럼 생각해 혼자사는 지연을 위해 밑반찬을 자주 챙겨주기도 한다.

•차익현 - 오판의 소꿉친구로 바로 앞집에 살고 있으며 오판과는 먼 친척 관계이다(익현의 아버지가 차공주 여사의 팔촌이다). 어렸을 적부터 오판의 비밀을 알고 오판이 자신의 반쪽임을 천명하고 현재까지도 그를 수족처럼 따르며 어떤 남녀도 불문하고 접근을 불허하는 집념의 사나이.

•한유진 - 스튜어디스로 재판이 있는 병원의 수간호사와는 친구인 덕분에 재판과 알게 된다. 재판이 지연의 그늘을 벗어나고자 결혼상대로 결정할 만큼 재색을 겸비했지만 소비벽이 심해 자금 곤란을 겪는 등 다소의 문제를 지니고 있지만 재판의 마음을 알고 그를 나름대로 도와주고 배려하고 있다.



<줄거리>

지연은 재판과는 대학 선후배 사이이고, 재판의 쌍둥이 동생 삼판, 사판과는 동기이다. 그로 인해 그들은 물론이고 그들의 가족들과 허물없이 지낼 정도로 친하게 지낸다. 반면 재판은 지연과 달리 단순히 후배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10년 전부터 사랑하고 있지만 그녀가 정신적 쇼크를 받을 정도로 고백을 거부하자 그 이후 애써 표현하지 않고 마음속에 담아두고만 있다. 그러기를 10년, 기다리는 것에 지쳐버린 재판은 유진이라는 적당한 상대가 나타나자 결혼을 결심하고 이를 발표한다. 지연은 그런 재판의 결혼을 축하하지만 유진을 소개 받는 자리에서 묘하게 감정이 뒤틀리며 꿈틀대는 것을 느껴 당황하며 자리를 피한다. 그리고 그날 재판은 지연과의 사랑에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발견하게 되면서 다시 한 번 그녀가 마음 여는 것을 기대하게 되는데…….

“이번에는 네가 먼저 나서줬으면 좋겠다. 네가 정한 그 시간이 끝나기 전에 네가 먼저 다가와 내 손을 잡아줬으면 좋겠다. 믿을게, 널 믿을게. 바보야, 내 사랑하는 바보야, 다시 한 번 널 믿을게.”

2001년 6월 처음으로 넷 상에 글 연재.
2002년 6월 장편「절름발이 사랑」출간 후 잠수.
2005년 8월 단편「그 놈들 그리고 내 놈」전자출간.
2006년 1월 중편「아담을 만나다」전자출간.
2006년 하반기 장편「적고적」출간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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