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전자책으로 출간되었던 작품의 종이책 개정판 작품입니다.>


-본문 중에서-


“사장님이 여기엔 웬일이세요?”
사장이었다. 차에 기대어 서 있던 그는 아지를 발견하자마자 다가왔다. 고개를 낮추고 뚫어져라 아지의 눈을 보더니 알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난 양쪽 다 그런 적 없는데, 눈이 왜 그래?”
“저희끼리 친해져 한편 먹었나 봐요. 근데 진짜 여기까지 어쩐 일이세요?”
“보자 보자 하니 예의가 없잖아. 왜 인사도 안 하고 간 거야?”
썰을 푸세요. 혼자서 많이 배 터질 때까지 푸세요. 
“심심하셨나 봐요. 함께 놀아 드리기엔 제가 지금 배가 고파서. 그럼 전 이만.”
“기다려. 레고.” 
대문을 들어서려다 손목이 잡히자 아지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도환을 응시했다. 이런 남자에게 계속 흔들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다. 무서운 게 없어 보이는 이 남자에게는 세상만사가 장난처럼 보이는 모양이다. 집 앞까지 찾아와서 마음 추스르는 사람 기대하게 만들고 정작 하는 말은 왜 인사를 안 하고 갔느냐는 타박이니. 객관적으로 봐도 이미 그만둔 직원에게 집까지 찾아와 사장이 할 말은 아니었다. 내가 그렇게 우스워요? 하긴 우스울 만하지. 당신에게 난 처음부터 수준 이하였을 테니까.
“할 말 더 있으세요?”
“확인할 게 있어서 그래. 다섯까지 세면 놔줄 테니까 카운터 시작해.”
“내가 내 손목 되찾는데 그런 걸 해야 해요? 사장님 혹시 일본인이세요?”
“본. 론.”
“아니. 독도 자기네 땅이라고 지질 탐사 오는 애들이랑 마인드가 비슷하시네.”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다섯이면 돼요?”
아지는 귀찮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알았으니까 약속 지키세요. 다섯…… 넷…… 셋.”
이게 무슨 숨바꼭질도 아니고 손목까지 잡힌 채 카운터라니? 
그 순간, 소중한 컴퓨터를 갈아엎은 철수가 실실거리며 지나가는 게 보였다. 사장만 아니었다면 로우킥을 날렸을 아지는 카운터를 세다 보니 제 꼴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카운터를 멈추고 도환에게 물었다. 
“이거 꼭 해야 돼요?”
“둘.”
도환이 아지를 쳐다보며 강요하듯 말하자 눈을 세모꼴로 만든 아지가 도환을 노려보았다.
“대체 왜 그러시는데요. 내 손으로 사직서 직접 냈으면 됐지, 혈서라도 쓸까요?”
도환이 자신을 냉랭하게 쳐다보자 아지는 기가 막혔다. 다 큰 노처녀 도리도리 죔죔 시키면서 그렇지 않은가? 
“그러다 저 잡아드시겠습니다.”
“하나.”
마지막 카운터를 스스로 세어 버린 도환이 흐릿하게 입술 끝을 끌어올렸다. 눈 한 번 깜빡 했는데 도도히 치켜든 아지의 얼굴이 사라졌다. 채 무슨 일인지 알아채기도 전에 거대한 파도처럼 순식간에 밀려든 도환의 키스에 아지의 항의성 어린 말들이 공기 중에 흩어졌다. 
숨이 막혔다. 그의 큰 손으로 감싼 뺨이 얼얼하다 못해 뻣뻣하게 굳었다. 팔을 모아 도환의 가슴팍을 밀쳤지만 돌을 때린 것처럼 아프기만 했다. 
몸을 비틀며 발버둥치는 아지의 가는 허리를 도환이 확 낚아챘다. 너무 놀라 눈을 감지 못한 아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었다. 허공에서 깊어진 도환의 눈과 마주친 아지는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새까만 유리처럼 반들거리는 그의 눈동자에 비친 모습을 보고 버틸 수가 없었다. 

정원 라임모모
머릿속에 맴도는 사랑 이야기는 많으나 손발이 사맞디 아니하다.
그래서 느리지만, 느린 대로 풍경 보며 걷는다.

출간작 [늪, 아찔한 결혼, 사장님과 미스 금]
출간 예정작 [불편한 연애, 륜, 히포크라테스 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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