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귀(劌)

세상 단 하나뿐인 내 연인, 나의 에우리디케인 너.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아. 네가 잃어버린 것들, 모두 찾아주겠다. 이미 죽은 자들은 어쩔 수 없지만 너만은 반드시 살려 내겠다. 나는 악마와 계약한 오르페우스가 되어서라도 너를 살려 낼 거다. 그러니 더 멀리 가지 말고 잠시만 기다려…… 시야.

귀문(鬼門) 유가(幽家)의 자식들 중 한 명이자 인간과의 혼혈인 반혈귀(半血鬼), 유진후.
귀의 세계에 대해 그 무엇도 알지 못하는 평범한 인간의 여자, 한시야.

밤의 거리를 헤매던 시야는 우연찮게 한 혈귀 여자의 본색을 목격한 대가로 귀도(劌島)에 보내진다. 그곳에서 그녀가 본 것은 죽을 날만을 기다리며 유폐되어 있던 한 남자였다. 오래 전 생모의 배신으로 인해 무참히 버려지고 세상 전부에게도 외면당한 자.
시야는 본능적으로 진후를 두려워하지만 모종의 사건들을 계기로 차츰 그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그러나 직계 혈통의 진혈귀만이 타고나는 속성에서 비롯된 계율은 그들을 철저히 부숴놓고, 시야마저 죽음으로 몰고 간다. 그리고 진후는 그녀를 살리기 위해 인간을 혈귀로 만들 수 있는 귀주(鬼主)만의 능력, 완전한 진혈귀의 힘을 손에 넣고자 하는데…….



<1권 중에서>

전화기를 내려놓은 진후는 의식 없는 시야를 돌아보았다. 세상 단 하나뿐인 그의 연인, 그의…… 아내. 한 시간 전, 그는 죽어가는 그녀를 곁에 두고 혼자만의 언약식을 치렀다. 그의 피가 마르고 심장이 멎는 순간까지 한시야를 아내로 맞이하여, 평생토록 그녀만을 바라보겠노라고.
그들이 잃어버린 아이가 딸인지 아들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딸이었다면 시진이라 불렀을 것이며, 아들이라면 시후라고 이름 했으리라. 본디 유가의 직계는 진혈귀를 상징하는 돌림자 ‘진’을 붙이는 것이 원칙이지만, 진후는 그녀와 그의 이름자를 딴 이름이 더 마음에 들었다. 유시진, 혹은…… 유시후. 그 애틋하고도 안타까운 이름들을 곱씹어보던 그는 시야의 하얀 뺨을 어루만졌다.
‘이대로 죽게 내버려두지 않아. 네가 잃어버린 것들…… 모두 찾아주겠다.’
이미 죽은 자들은 어쩔 수 없지만 너만은 반드시 살려내겠다. 그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널 살려낼 거다. 그러니 더 멀리 가지 말고 잠시만 기다려…… 시야.
진후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 그녀의 입술에 입 맞추었다. 서늘한 한기를 머금은 채 창백하게 굳어진 입술은, 쓰라리기 그지없었다.
그녀의 가냘픈 어깨를 힘주어 끌어안은 그는 그대로 돌아섰다. 목적지는 단 하나, 지금쯤 진영과 진혁이 기다리고 있을 유가였다.
순혈통의 형제들에게 인간과의 혼혈인 그가 당해낼 수 없으리란 건 짐작하고 있다. 그러나…… 명색이 같은 아버지의 자식이고 직계 혈통인 이상, 아주 조금은 승산이 있었다. 단 몇 퍼센트에 지나지 않는 확률. 진후는 이미 그 가능성에 그와 그녀의 전부를 내건 상태였다.
눈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미래가 무엇일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 끝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 지옥이라는 건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의 누이에 의해 가족들을 잃고 뱃속의 아이마저 떠나보내야 했던 시야. 피 흘리며 힘겹게나마 진후를 응시하던 그녀의 눈 속에 서렸던 것은 처절한 고통과 원망이었다.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 강렬한 아픔, 그녀의 영혼에까지 깊숙이 새겨졌을 상처. 그러나…….
‘넌 그렇듯 날 떠나버릴 수 있어도 난 너를 놓칠 수 없어. 이제 난 죽음과도 너를 공유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러니…… 내 심장이 멎을 때까지, 내 몸의 피가 마르는 순간까지는 너도 내 곁에 있어야 해.’
흔하디흔한 다음 세상, 환생이란 말은 전혀 머리에 와 닿지 않는다. 그마저도 따라 죽어서 내세를 기약하고 싶지는 않았다. 현생에서의 기억을 오롯이 갖고 태어날 수 있는 가능성? 이 지구상에 살아가는 몇 십억의 사람들 중에서 운명처럼 그녀와 재회할 확률? 그런 것 따위는 전부 허상이었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지금 이 순간 그녀를 되살려야만 했다.
그가 품은 사랑이란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이제는 알고 있다. 소유욕을 가장한 집착, 상대의 모든 것마저 집어삼키는 애욕, 그리고…… 죽음마저 용납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광기. 그 광기에 그의 전부를 걸고 그녀를 살려낼 것이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귀주가 되어 완전한 진혈귀의 능력을 손에 넣고, 죽어가는 시야를 인혈귀로 되살리리라.
설령 그것이 그와 그녀의 영혼마저 산산이 부숴놓는 역천(逆天)의 죄라 할지라도.

진해림.

역사로맨스 홍연, 창연, 흑루, 화인, 적루를,

판타지로맨스 카인의 연인과 마황의 연인을 집필한 작가.

현재는 아홉 번째 소설 <환월(煥月)> 집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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