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딸이 나가거나, 내가 나가거나 둘 중 하나예요.」
‘헬렌 네빌’이 두 손을 엉덩이에 얹고 남편 ‘길버트’를 내려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길버트는 창 옆의 쿠션이 들어간 의자에 사지를 축 늘어뜨리고 앉아 있었다. 오래 된 석조 창으로 스며든 햇빛이 파란색으로 칠해진 목조 덧문을 비추고, 그는 갈아 만든 조그만 고기 조각을 맛있게 먹으며 좋아하는 사냥개의 두 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자신의 요구에 아무런 반응도 나타내지 않는 남편의 태도에 헬렌은 화가 나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자신보다 열두 살 위의 남편은 정말이지, 매사에 게으르기 짝이 없는 남자였다. 대부분의 시간을 말을 타고 높이 날아오르는 매나 뒤좇으며 보내는 데도, 툭 불거진 그의 배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솟아오르는 중이었다.
헬렌은 오로지 돈 때문에 그와 결혼했다. 물론이고말고! 금광, 수백 만 평에 달하는 그의 땅과 여덟 개의 성 一그는 그 가운데 두 곳은 아직 본 적도 없다. 그의 말과 그가 거느린 엄청난 수의 일꾼이며, 그녀와 그녀의 두 딸에게 줄 수 있는 예쁜 드레스가 결혼한 이유의 전부였다. 그녀는 길버트 네빌이 가진 재산 목록을 읽어보곤 그 남자를 한 번 보자는 말도 없이 결혼 신청을 승낙했다.
결혼한 지 일 년이 지난 지금, 헬렌은 스스로에게 묻고 싶어졌다. 난 미리 길버트 네빌을 만나 그의 나태함을 알았더라면, 네빌 가의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 했을까? 주인의 게으름을 대신하는 머리 좋은 집사? 헬렌은 그에게 합법적인 자식이 하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결혼 전까지 자신에게 한마디도 건네지 않을 만큼 창백하고 수줍음이 많아 보이는 아가씨였다. 혹시……. 길버트에게는 그의 재산을 관리하는 배다른 아들이 있을지도 몰라.
결혼한 후에야 헬렌은 남편이 다른 분야 못지않게 잠자리에서도 게으르다는 것과 네빌 집안의 땅을 경영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리아나! 헬렌은 두 번 다시 그 이름을 듣고 싶지 않았다. 상냥하고 수줍음을 몹시 타는 듯이 보였던 길버트의 딸은 변장을 한 악마였다. 리아나는 자기 어머니처럼 모든 일을 관리했고 사람들을 휘둘렀다. 집사의 책상에 버티고 앉아 소작인들이 내는 일 년치 소작료를 꼼꼼히 계산했고, 말을 타고 농작지를 둘러보며, 부숴진 지붕을 수리하도록 명령했다. 또, 성이 너무 지저분해졌다거나 저장해 둔 곡물이 떨어지는 시기를 감안해 가신(家臣)들의 이주를 결정했다. 헬렌은 지난해에 세 번, 어떤 하녀가 잠자리를 꾸리는 것을 보고서야 가신들이 이주하고 있다는 소리를 처음으로 들을 수 있었다.
처음에 헬렌은 이제 자기가 장원(莊園)의 안주인이 되었으니 리아나가 해온 일들을 새어머니인 자신에게 넘겨야 한다고 길버트 부녀에게 열심히 설명했지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웬 부랑아 하나가 떠들고 있다는 듯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헬렌을 쳐다보더니, 리아나는 일꾼을 부리러 밖으로 나갔고, 길버트는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그 후에 헬렌은 직접 나서서 하인들을 부리려고도 해보았다. 얼마 동안一하인들이 그녀의 명령을 수행하기에 앞서 리아나에게 해도 되는지를 묻고 있다는 걸 알기 전까지는 모든 일이 뜻대로 되고 있다고 믿었다.
길버트에게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을 무렵의 헬렌은 비교적 온화한 모습으로, 대개는 잠자리에서 한껏 남편을 즐겁게 해준 후를 선택하곤 했다. 그러나 그에게선 아내의 말에 신경을 쓴다는 기미를 찾아볼 수 없었다.
「리아나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둬요. 당신은 그녀를 막을 수 없소. 당신은 바위가 떨어지는 것을 멈추게 할 수는 있어도 리아나나 그 애의 엄마를 단념시킬 수는 없을 거요. 그들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최상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요.」
그는 돌아누워 태평스럽게 잠들어 버리곤 했지만, 헬렌은 분노로 몸이 달아 밤새 뜬 눈으로 지새워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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