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집 나간 엄마에게서 청담동 한 귀퉁이에 있는 국숫가게와 3억을 유산으로 받았다.
아니, 잘난 남자도 받았다. 그 남자의 마음을 잡아 결혼 고군분투하는 발칙한 여자, 진수인.
그런 수인을 사랑스러워 미칠 것 같은데도 용케 넘어가지 않고 버텨보려고 발악하는 남자, 민수혁이 벌이는 조금은 발칙하지만 예쁜 사랑 이야기.


-본문 중에서-


“저 사람들 눈에는 우리도 연인처럼 보일까요?”
“아마도…….”
“우리를 잘 어울리는 커플이라 생각할까요?”
“아마도.”
“아마도……. 훗, 아마도 아닐걸요. 남자가 아깝다고 속으로 흉보고 지나갈걸요. 아니면 내가 돈이 많다고 생각하던지.”
웃자고 한 말이었다 어색한 기운에 괜한 생각들이 너무 앞서가게 될까 봐. 그래서 또다시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까 봐 분위기를 바꿔 보려고 던진 말이었다. 그런데 남자는 웃지 않았다. 오히려 정색을 하며 그녀에게 야단이었다.
“왜 그렇게 내 말을 믿지 못하는 거죠? 내가 말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그쪽은 정말, 충분히 아름답다고. 이제부터라도 제발 스스로를 존중하도록 해요. 내 말도 좀 믿고…….”
남자가 버럭 화를 내면서까지 그녀에게 아름답다고 말해 주어 기분이 좋았다. 그녀에게 그 남자는 세상 둘도 없는 바보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원래 사랑에 빠지면 바보가 된다고 했다. 그녀를 보고 아름답다고 말한 순간 이미 남자는 자신이 바보라는 것과 그녀와 사랑에 빠졌음을 고백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그런 생각들을 하며 그녀는 앞에 앉아 있는 잘난 남자를 건너보았다. 참 기가 막히게 잘생긴 얼굴의 그 남자가 자신에게 아름답다고 말했다고 하면 아무도 믿어 줄 사람이 없겠지만 상관없었다. 이 늦은 밤에, 그녀가 보고 싶어서 이렇게 먼저 찾아온 사람도 그녀가 아니라 그 남자라는 사실에 우쭐했지만 그냥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기기로 했다.
어쩌면 밤이 다 지나가기 전에 그녀 안에 있던 모든 통제의 끈이 끊겨 버리고 불타는 밤을 남자와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야릇한 기대를 하며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행복하다는 것이 이런 것인지. 그녀는 오랜만에, 아니다. 기억조차 없는 행복의 순간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오래오래 이렇게 행복하고만 싶었다. 이젠 그녀 자신도 행복할 자격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남자가 다시 채워 준 와인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그윽하게 바라보면서.
“어어, 이봐요. 지금 뭐하는 거요?”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그녀를 채근했다.
“…….”
“참기름을 입에 부을 태세인 것 같은데 무슨 짓이오?”
“예?”
“참기름을 들고 뭘 그렇게 멍하니 서 있는 거냐고 묻고 있잖소. 이제 몇 시간 남지도 않았는데 얼른 서두르지 않고 뭐하는 건지.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장승처럼 서 있을 거면 난 그만 가도 되겠죠? 엉뚱한 말이나 늘어놓더니 내게 도와 달라고 해 놓고 정작 본인은 멍 때리고 있으니…….”

[미리 보기]


“그 남자, 그냥 내가 하지.”
“예?”
“그 남자 그냥 내가 하겠다고.”
“무슨 말인지 알아듣게 말해 봐요. 무슨 말이에요?”
“밤도 같이 보내고 아침밥도 같이 먹을 그 남자……. 내가 하겠다고. 형은 씨에게 별다른 감정 없다는 것 알아. 그러니까 이제 그만 형은 씨 풀어 주고 나랑 진짜 연애하자고.”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그가 하자는 것은 연애였다. 형은처럼 결혼하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그녀는 이제 그 여자가 말하는 도박이라는 것을 해야 하는 순간임을 알 수 있었다. 매일 밤 같은 침대를 쓰고 싶은 사람은 형은이 아니라 그였다. 그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살갗에 살갗이 닿아도 기분 나쁘지 않고 타액과 타액이 섞여도 기분 상하지 않는 사람이 형은이 아니라 수혁이었기에 그녀는 도박에 모든 것을 걸어 보기로 했다.
[그 모든 것을 다 갖추었음에도 그 남자의 손길이 닿는 것이 싫거나 가슴이 뛰지 않을 때에는 과감하게 버리는 것이 옳다.]
그 여자의 메모장 마지막을 장식한 글귀였다. 그 여자가 본 시각에서의 사윗감 후보는 형은과 수혁, 둘이었다. 그러나 수혁에 대해서는 에피소드 위주였다면 형은에 대해서는 세세한 정보와 가족과 집안, 경제력에 대한 포괄적인 기록까지 있어 사윗감으로 그 여자가 원하는 사람은 형은이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여자가 원하는 사윗감, 아니 그녀가 결혼하면 편안하게 살 수 있을 남편감으로 형은을 지목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형은이 아닌 수혁에게 마음이 쏠리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걱정이 있다면 그녀는 모든 것을 확인하고 마음을 정한 후 수혁이어야 한다고 마음먹었는데 정작 당사자인 수혁은 아직 미적거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결혼은커녕 연인이 되고 싶은지 아닌지조차 확실해 보이지 않는 그로 인해 다시 만나기 어려운 조건과 사람됨을 갖춘 형은을 버리자니 두렵고 걱정되었다. 그러나 이제 망설이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버려야 할 패와 손에 쥐어야 할 패를 선택함에 있어 이제는 망설이지 말아야 하는 순간이었다.
“좋아요. 그전에 한 가지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 있어요.”
“확인?”
“뭘?”
그는 그녀의 대답에 안심이 되지 않았다. 뭔가 확인해 보고 그 결과에 따라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여지가 남아 있다는 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그는 거부할 여유가 없었다. 그녀의 얼굴이 테이블을 넘어 그에게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천천히…….
눈빛키스, 거품키스, 콜라키스, 사탕키스. 수많은 이름의 키스가 있지만 그는 지금 그에게로 다가오고 있는 그녀의 뻔뻔할 만큼 노골적이고 실험적인 키스보다 더 가슴 떨리는 키스는 없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녀가 무엇을 하기 위해 그에게 다가오는지 너무나 뻔히 보이는 그녀의 표정에 한껏 긴장한 채 기다리고 있자니 그는 그 순간이 너무 길어서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이윽고 그의 얼굴을 잡아 자신에게로 끌어당긴 후 천천히 그녀의 입술이 그의 윗입술을 삼켜 버렸고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그의 입술을 가르고 보드라운 혀를 밀치고 들어와 그의 혀를 냉큼 빼앗아 가 버렸다. 물컹하고 달달한 뭔가가 그의 목젖을 따라 찌르르 넘어간 순간 심장이란 놈이 튀어나올 것처럼 날뛰는데 여전히 그의 얼굴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그녀 때문에 그는 딱 죽을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을 조사하듯 샅샅이 핥고 호흡이 딸리기 시작할 무렵, 몸의 모든 기운이 그녀에게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온몸에 힘이 서서히 빠져나가기 시작할 때 드디어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술에서 떨어져 나갔다.
“하아, 역시……. 맞네요.”
“뭐, 뭐가 맞는다는 거지?”
그를 놓아주고 마치 전쟁터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사람처럼 가쁜 숨을 고르며 그녀가 빙그레 웃었다.
“우리 이제부터 진짜 연애 한번 해 보죠.”
“……그 확인이라는 것이 키스였나?”
“예. 내 가슴을 뛰게 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거든요. 오늘 오후에 형은 씨하고도 확인해 봤는데……. 형은 씨는 아니더라고요.”
“…….”
그는 말을 잃고 말았다. 너무나 발칙한 그녀의 말에 기가 차서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말인즉 오후에 먼저 형은과 키스를 해 봤다는 말이었다. 그가 아닌 다른 남자와 키스를 했음을 숨기지도 않고 너무나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하는 그녀를 그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녀에게 그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사랑한다는 말 따위는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그녀 혼자 상상을 하곤 했던 그때도 단 한 번도 사랑 운운하지 않았다. 지금도 가슴이 떨리는지 확인부터 한 다음 연애를 할지 말지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너무나 이성적인 그녀의 모습이 그로 하여금 그녀에게 온전히 다가가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식사하세요. 다 식겠어요.”
“응? 응.”
“그럼 이 순간부터 우린 연인인 거예요. 그죠?”
“응.”
그는 기계적으로 음식들을 입에 떠 넣었다. 너무나 맛있던 고등어조림도, 두부 부침도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만이 가득했다. 그녀의 마음이 진심인지 아닌지 알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것처럼 언젠가 그도 그녀에게서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두려움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아직은 완전히 그녀에게 속내를 털어내지 말라고. 그녀가 먼저 사랑한다고 하기 전에 먼저 사랑한다고 고백하지 말라고. 영원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기 전에는 절대 온전히 그녀를 사랑하진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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