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 한지혁.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취향이 남다른 것도 아니다. 다만, 여자가 싫었을 뿐이다. 여자란 내숭과 가식을 무기로 삼아 자신이 가지지 못 한 것을 얻기 위할 뿐이란 생각을 했다.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선 자리에 나가 1분 만에 끝내고 오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재미없던 일상을 즐겁게 해줄 특이한 여자를 발견했다. 그 여자는 솔직하고 꾸밈이 없었다. 그래서 흥미를 느꼈고, 점점 빠져드는 것을 느꼈다.



그 여자, 주해령.

6년 전,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친구이자 연인인, 자신의 전부인 남자가 사라졌었다. 생사를 모르는 연인을 기다리며 지칠 대로 지쳤다. 이미 어릴 적, 부모에게서 버림받은 기억과 옛 연인에게서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마음의 문은 닫혀만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채색 일상에 한 마리 우아한 야수가 뛰어 들었다. 그는 저돌적이면서도 거침이 없었다. 빠른 시간 안에 자신의 일상에 그가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본문 중에서-

“한지혁 씨. 질문 하나만 해도 되나요?”

“뭐지?”

“쭉, 생각해 봤어요.”

“무엇을.”

“한지혁 씨를 처음 만나, 지금까지의 일을.”

해령이 고개를 들어 지혁을 바라보았다. 지혁은 해령의 집 앞에 도착하자마자 차를 세우고선 시동은 끄지 않은 채, 가만히 두 눈동자를 응시하다 낮고 어둡지만, 어딘가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는 목소리를 꺼냈다.

“그래서.”

“저한테…… 왜 그러는 거예요?”

“알고 싶어?”

유혹하는 목소리와도 같았다. 홀릴 것만 같았다. 해령은 귀를 막고 싶었지만 목소리에 몸이 구속된 것처럼 지혁을 가만히 바라보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혁은 아예 시동을 꺼버렸다. 시동이 꺼지자 고요함만이 존재했다. 잠시 운전대에 팔을 기대고 정면을 바라보던 지혁이 고개를 살그머니 돌리며 숙였다. 해령과 눈이 마주치자 천천히 입 꼬리를 올리며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 역시. 해령은 당장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알고 싶지 않은, 감춰두었던 감정들이 나오려고 하고 있었다. 입술을 꽉 깨물고 얼른 말을 해달라고 하려던 순간이다.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었다.

“내가 왜 그랬는지, 주해령 씨가 더 잘 알 텐데.”

“…….”

“내가, 널…….”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대로 시선을 옭아매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내 귓가에 뜨거운 숨결이 내려앉았다.

“사랑하거든.”

그의 말에, 해령은 보이지 않게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런…….”

그러나 그것 뿐, 해령은 붉어진 얼굴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재빨리 내렸다. 처음 만났던 날, 총알같이 사라지던 해령은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총알같이 튀어 나가 집으로 바로 올라갔다. 한참 동안 해령의 집을 응시하던 지혁은 불이 켜지자 그제야 시동을 걸었고, 차를 출발시켰다.

해령이 불을 킨 것은 한참 후였다. 가만히 창문을 바라보던 지혁의 미소가 점점 진해졌다.

“이걸로 끝인 줄 알면 오산이야.”

나는, 한 번 정한 표적은 놓치지 않거든.

“계속해서 내 생각을 해.”

그의 매혹적인 미소는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가 차를 출발시킨 것은, 해령의 집을 한참 동안 바라본 후였다.



<미리보기>

“야근이 좀 잦았어. 일이 많았거든.”

“아…….”

그래서 연락을 하지 않았나 보다. 괜히 혼자 무슨 일이 있으면 어쩌나 했던 생각이 떠올라 얼굴이 붉게 물드는 기분이 들었다. 오른쪽 뺨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 같았으면 그걸 왜 저에게 말을 하냐고 할지 모르지만 지금은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분위기 탓이라며 애써 자기 합리화를 했다.

“고르도록.”

“뭐, 뭘요?”

“아쿠아리움. 동물원. 놀이공원.”

“어, 그건 저번에…….”

“얼른 골라. 셋 셀 동안 골라. 하나, 둘…….”

“도, 동물원이요!”

더 이상 만나지 않겠다고 말을 해야 하는데 엉겁결에 대답을 해버렸다. 하필 그것도 동물원이 뭐람. 그래도 놀이공원보다는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접수.”

“아, 그, 근데 동물원…….”

“내일 주말이야. 10시까지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어.”

“에? 진짜 가요?”

해령의 물음에 지혁은 대답 대신 피식 웃으며 차를 다시 운전하기 시작했다. 벌써 돌아가나 싶다가도 왜 자신이 아쉬워하는지 모르겠다. 흠칫 놀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해령을, 어느새 지혁이 바라보고 있었다.

집 앞에 도착했고, 지혁은 해령을 따라 내렸다. 오피스텔 정문 앞에 선 해령은 지혁을 바라보다가 얼른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들어가려던 찰나였다. 해령은 다시 뒤를 돌게 되었다. 지혁이 손목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놔주세요.”

“내일 대답해.”

“무슨 대답이요?”

“나랑…….”

잠시 고개를 숙이던 지혁이 순수하니 어린아이처럼 웃어보이고선 해령의 앞으로 한 발자국 다가왔다. 거리는 너무 가까웠고, 지혁이 천천히 고개를 숙여 해령과 눈을 마주하다 귓가에 속삭였다.

“연애하는 거.”

달콤하게 속삭이는 그 목소리는 악마의 유혹과 같은 목소리로 들렸다.

“내일까지야. 더 이상 기간 안 줘.”

“…….”

“그렇게 바라보지 마.”

새빨개진 얼굴로 저도 모르게 지혁을 응시하고 있던 해령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귓가를 문지르고 싶어도 어느새 두 손을 꽉 잡고 있는 지혁으로 인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지혁은 어느새 귓가에서 얼굴을 떼어낸 뒤, 한 손으로 해령의 턱을 살짝 들게 하더니 이마에 쪽 소리가 나게 입맞춤을 했다.

“기대하게 되잖아?”

“…….”

“그럼, 해령아.”

“…….”

“잘 자.”

잠시나마 달콤한 로맨티스트처럼 속삭이며 웃던 지혁은 손을 흔들거리며 차를 타고 사라졌다. 어둠속으로 지혁의 차가 사라지자마자 해령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버렸다.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바, 방금 뭐야……?”

방금 이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지혁이 맞나 싶을 정도로 해령은 믿을 수 없는 현실에 계속해서 앉아 있어야만 했다. 연애하는 걸 생각해 보라고 하지 않나, 해령아, 라고 달콤하게 제 이름을 부르질 않나.

“……싫다, 정말.”

덕분에 해령은 지혁에게서 빠져나올 수 없음을 알아버렸다. 얼굴은 붉게 물들었지만 울상을 짓고 있는 해령의 표정은 아이러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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