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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어느 날 대공이 은혜를 갚겠다고 찾아왔다 4권
솔솔 지음도서출판 가하2021.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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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자평점 | :  [참여수 0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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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BN | : 979-11-300-521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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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품 소개
“은혜를 갚기 위해 왔습니다, 일레나 님.”
일레나는 만신창이의 남자를 주워다 정성껏 돌봐줬다. 치료해놓고 보니 흐뭇하게도, 남색 머리에 황금안을 지닌 엄청난 미남이었다.
제 이름이 체르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기억 못 한다던 꽃미남은, 어느 날 편지만 한 장 남겨놓은 채 날아가버렸다.
그리고 1년 뒤, 일레나는 제집을 둘러싼 시커먼 무리를 발견하는데.
“정말 대공 전하가 맞으시다구요?”
“예. 맞습니다.”
“대체 왜…… 대공 전하가 대체 왜.”
“은혜를 갚기 위해서입니다.”
돌봐줬던 꽃미남은 은혜 갚는 대공이 되기 위해 돌아왔다.
체르디에 르벤다르트, 르벤다 제국의 대공.
일레나가 한사코 거절하는데도 은혜를 갚겠다며, 물러나질 않고 버틴다.
“그러니까. 같이 갑시다. 제국으로.”
“대공님.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여길 떠날 수 없어요.”
“그럼 저도 여기 있을 텐데요?”
일주일의 실랑이 끝에, 결국 일레나는 르벤다 제국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대공가에서 일레나는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서서히 제 목표를 정비한다.
그녀는 본디 로지아트 자작가의 영애, 하나 가문은 누명을 뒤집어쓰고 멸문당했다. 원수들에게 복수를.
“저는 도와드릴 수 있거든요. 일레나 님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도록.”
그런데 이 남자. 뭐 알고 있는 거 아니야? 왜 자꾸만 이런 말을 하는 거지?
“모든 건 일레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왜 자꾸 흔들리는 거지?
2. 작가 소개
솔솔
꽉 닫힌 새드 빼고 다 좋아합니다.
3. 차례
#르벤다르트 대공령
#마음과 진실 (1)
#마음과 진실 (2)
4. 미리 보기
“일렌.”
“……네.”
“이제는. 좀 괜찮은 것, 맞습니까?”
“네. 덕분에요.”
“확실한 거 맞죠? 믿어도 됩니까?”
“네. 이제 다 진정됐어요.”
“…….”
내 차분한 대답에 체르는 침묵했다. 눈을 내리깔고 얽혀 있는 나와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러기를 몇 분.
체르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려 내게 시선을 맞췄다. 아주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피할 수 없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제게 말해줄 수 있습니까?”
“…….”
“아니, 말해주면 안 됩니까?”
부탁이 아닌, 간곡한 애원이었다.
나는 바싹 마른 입술은 작게 달싹거리기만 했다.
체르는 내 입술이 열리기를 묵묵히 기다렸다. 그러나 끝끝내 내 입은 열리지 않았다.
체르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얼핏 절망한 듯도 보였다.
그는 결국 열리지 않는 내 입술 대신 제 입술을 열었다. 언제나 붉기만 했던 입술이 그 빛을 많이 잃었다.
“저는 말이죠, 일렌. 인내심이 제법 강한 편입니다. 그래서 기다리는 것도 잘하고, 기다리려고 노력도 많이 하는 편입니다.”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곤,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지금 내가 어떤 표정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알 수 없다. 날 보고 있는 지금, 그가 어떤 감정인지.
체르는 느릿하게 말을 시작했다.
“기다리려고 했고, 참으려 했습니다. 내내 인내했습니다. 그런데, 더는 못 하겠습니다. 이젠. 너무 힘듭니다, 일렌.”
내 손등을 덮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체르는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저는…….”
“당신이 위험에 처할 때마다, 아플 때마다, 가만히 아무것도 못 한 채 무력하게 있는 거. 더는 못 하겠어.”
그리고 언제나 견고하던 그의 성이, 모래처럼 순식간에 무너졌다. 그의 목소리에서 힘이 빠졌다.
언제나 맑기만 하던 체르의 눈이 점차 붉게 물들어갔다. 그의 손이 가늘게 떨린다.
“……너무 힘들어. 그러니 제발. 제발 알려주십시오.”
그의 고개가 힘없이 떨어졌다.
감정을 최대한 죽인 목소리에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감정들이 새어나왔다. 슬픔, 비참함, 비통함, 애처로움…….
달래주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침묵했다.
체르는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흐려진 그의 눈동자가 일순 어둡게 빛났다. 언뜻 가끔 보던 붉은빛이 돈 것도 같았다.
체르는 망설이듯 입술을 몇 번 달싹였다. 어쩐지 결연해 보이기도 하는 얼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동안 마음을 다시 먹기라도 한 건가.’
최소한 내 마음이 아플 정도로 슬퍼하고 애원하지는 않으니 괜찮았다. 하지만 곧, 나는 소중한 무언가가 산산이 조각나는 기분을 맛봐야 했다.
마치 전쟁 선포를 앞두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던 체르는 드디어 마음을 정했나 보다. 그의 목소리는 다소 작지만 단연했다.
“일렌. 고백할 게 있습니다.”
고백?
분위기에 맞지 않는 너무 뜬금없는 소리로 들렸다.
내가 눈썹을 들어올리자, 체르가 시선을 저편 어딘가로 옮겼다 되돌렸다.
“일렌이 제 말을 듣고 화를 낼 수도, 욕을 할 수도,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게 저는…… 두려워서 차마 고백할 용기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일렌이 먼저 말해주기를 기다렸지만…….”
체르가 잠시 숨을 골랐다.
“……지금 이 순간까지 그런 날은 오지 않더군요. 그동안 저는 도끼에, 마물에, 불길에 위태로운 일렌의 모습을 견뎌야 했고, 드디어 오늘에서야 용기를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습게도 온전한 무력함을 느끼고 나니 이제야 가능할 것 같네요.”
“…….”
“제 딴에는 일렌에게 간접적으로 알렸다고도 생각하지만 어쨌거나 지금 이 상황까지 치달은 건, 다 제 탓이겠죠. 일렌. 그대가 저를 용서하고 말고는 두 번째입니다. 저를 영영 피해도 좋고 용서하지 않아도 좋으니 제발 당신을 도울 수 있게만 허락해주십시오. 그걸 위해서 고백합니다.”
말이 점점 길어질수록 체르의 얼굴에 옅게 묻어나던 결연함도 점차 짙어져갔다. 종래에는 제법 경건해 보이기까지 했다.
‘대체 무슨 이야기이기에.’
나는 무서웠다.
체르는 나를 위해 고백한다고 하지만, 내 감이 말한다. 듣지 않는 게 좋겠다고.
무서워, 듣고 싶지 않아.
……그래도 들어야겠지.
이 이중적인 감정은 아마 내가 어렴풋이 알고 있기에 그런 걸 거다. 아마도.
나는 고요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체르도 올곧은 시선을 내게 맞추었다.
우리는 서로를 피하지 않았다.
“저는 일렌의 과거사를 대략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체르가 담담하게 입을 뗐다.
“일렌이 헤이스트 왕국 로지아트 자작의 여식이었다는 것, 그 로지아트 가문은 약 3년 전 멸문당했다는 것, 그리고 그 참극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가 바로 일렌이라는 것. 알고 있었습니다.”
별로 놀랍지 않았다.
그가 은근히 뿌려댔던 힌트 탓일까, 아니면 대공이라는 그의 권력으로 다 알아낼 수 있을 만한 정보라고 생각해서일까.
의외로 담담했다.
“1년 전, 일렌이 절 막 구해주었을 당시에는 몰랐습니다. 이후 은인에게 은혜를 갚고자 알아보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이 부분에서 뒷조사를 했다는 사실에 일렌이 기분 나쁘다고 욕하셔도 괜찮습니다. 당연하니까요.”
“……계속하세요.”
“제국으로 돌아온 이후에는 정말 많이 바빴습니다. 마물, 노예 매매 등 여러 문제가 터졌고, 당시에 이 문제들은 왕국에서 더 심했거든요. 저는 어떻게 해서든 일렌을 제국으로 데려오고 싶었습니다. 첫째로는 일렌의 목적이 복수이리라 짐작했고, 어차피 할 거라면 제 손을 통해 하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더 수월할 테니까요. 어떻게든 일렌이 모르게 은근하게 도움을 주고 싶었습니다.”
“…….”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그대가 바라는 건 뭐든 이루어주고 싶은 이중적인 감정 때문이었죠. 그리고 두 번째로는 일렌이 안전하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마물이 활개 치고 인신매매가 빈번하고, 불법적인 약물이 극심한 곳에서 여성이 홀몸으로 혼자 외진 곳에 사는 게 너무 불안했습니다. 일렌이 마법사라는 사실만큼은 저도 몰랐거든요. 그래서 당시에는 반드시 제국으로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제 곁에 있는 게 왕국에서보다 안전할 테니까요.”
“마법사인 건 정말 몰랐나요?”
“예. 정말 몰랐습니다. 그것만큼은 제 정보력으로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모두가 굉장히 놀랐고 또 일렌에게 감탄했죠. 어떻게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숨길 수 있었을까.”
“……제 가족들밖에 몰랐으니까요.”
“덕분에 하늘에 감사했습니다. 일렌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안전할 확률이 올라가는 거니까요.”
그는 진실로 기뻐 보였다.
나는 그에 대고 무어라 해야 할지 정말로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만히 눈만 깜빡거렸다.
계속 이야기해보라고.
“일렌을 찾아가기 전, 고민했습니다. 혼자 가야 할지, 아니면 기사들을 데려가야 할지. 기사들은 사실 필요 없지만, 그래야 일렌이 믿어줄 것 같아서 데려갔습니다. 덕분에 그 마을 영주에게 제 재력과 무력을 과시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고요.”
이 와중에 농담이라니.
바람 빠진 헛웃음이 튀어나올 뻔했다.
내 미간에 힘이 막 들어가려던 찰나, 체르가 선수를 쳤다.
“우선 제 고백은 여기까지입니다. 때리셔도 좋고, 욕을 해도 좋고, 뭘 해도 다 좋습니다. 다만 일렌의 일을 돕게 해주세요. 말했다시피 저는 이미 일렌의 사정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만약 일렌의 계획을 망치고, 일렌이 절망하는 걸 보고 싶었다면 이미 하고도 남았겠죠. 물론 지금도 미래는 불확실하기에 저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약간은 서운하지만. 덧붙이자면, 일렌을 괴롭힌다고 해서 제게 이득이 되는 건 없습니다. 일렌을 왕국에 넘긴다고 해서 제게 좋을 것도 없고요. 그러니 이것만은 믿어주세요, 일렌. 제가 일렌에게 진심이라는 것을요.”
그가 이렇게 길게 말했던 적 있던가.
체르는 담담하고, 또 차분하게 자신의 심정, 나에 대한 본인의 마음과 설득, 이 모든 것을 밝혀나갔다.
마침내 지난 시간 동안 눌러 담았던 속마음을 온전히 꺼내놓은 체르는, 내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대체.
나는 대체.
“저는…….”
무어라 말해야 하지?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나를 속일 수가 있냐고? 알면서도 왜 모른 체했냐고? 나를 기만하니까 좋았냐고? 내가 우스웠냐고? 나를 왕국에 팔아버릴 거냐고?
‘이걸 물을 자격이 내게 있을까?’
속였던 건 나도 마찬가지인데.
이용까지 하려고 생각했는데.
체르는 내게 한껏 욕을 먹고 외면받는 상황까지 각오했는지, 내가 정작 말이 없자 오묘한 표정이 되었다.
너는 지금 어떤 마음일까.
‘나는……. 나는.’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긴장감이 엷게 스며든 침묵이 우리 둘 사이에 꽤 오랫동안 머물렀다.
체르는 내내 고개를 숙인 채 내 시선을 피했고, 나 또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손과 손이 맞닿은 그 피부의 온기는 여전했다.
나는 그 짧고도 긴 침묵 동안 생각을 정리했다.
막 잠에서 깨어난 덕분인지 마치 바로 어제 일어난 일들인 것처럼 생생한 나의 과거.
그 시작부터 끝까지를 주르륵 훑어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옮겨 힘없이 떨어진 체르의 머리와 내 손을 덮고 있는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내가 정신을 잃기 전 체르와 나누었던 대화를.
내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는 명확했다.
그와의 시간이 거짓으로만 점철돼 있진 않을 터다. 아니, 아니었다고 확신한다.
확실한 근거를 대보라고 한다면? 그걸 명확히 말로 표현할 순 없지만, 눈에 보이는 확연한 답을 부정할 만큼 나는 어리석지 않다.
“체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작게, 하지만 다정하게.
“예. 일렌.”
그가 고개를 들었다. 빠르게, 하지만 요란하지 않게.
그는 내 목소리를 좇았고 그렇게 해서 내 이름에 닿았다.
나는 천천히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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