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제가 당신 앞에서 길을 열겠습니다. 전하께선 앞으로 수백의 기사들을 거느리시겠지만, 허락해주신다면 제가 영광스러운 당신의 첫 번째 기사가 되고 싶습니다. 허락……해주시겠습니까?”

가시투성이의 연꽃을 닮은 황태자. 그분을 지켜드리고 싶었지만, 검을 잃은 나는 아직 어리고 나약한 그분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6년 후…… 왕관을 거머쥔 그분이 다시 만난 내게 말했다.

그대는 나를 지켜. 나는 그대를 지킬 테니.

“이사나. 그대는…… 아직도 내 기사인가?”

“폐하께서 저를 버리지 않으시는 한 언제든지요. 그러나 검을 잃은 제게 자격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검을 잃었기 때문에 해줄 수 있는 일이 하나 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대, 나와 혼인해주지 않겠어? 대신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돼. 오직 내 첫 번째 기사인 그대와 나만의 비밀이다.”

2. 작가 소개

소리엔

이야기를 사랑하는 공상가.

친한 친구처럼 편안한 글을 쓰고 싶습니다.

‘2015 카카오페이지X도서출판 가하 공모전’특별상 수상.

▣ 출간작

공작성의 하녀님

3. 차례

#7

#8

#9

#외전 1. 랜달의 ‘좋은 날’

#외전 2. 지켜드리겠습니다, 폐하

#외전 3. 근위대의 어느 평화로운 오후

#외전 4. 미래를 그리는 무지개

4. 미리 보기

잠시 후 시작된 공연은 이사나도 익히 알고 있는 고전문학을 노래로 각색한 것이었다. 익숙한 줄거리에 쉬이 흥미를 느낄 법도 하건만 이사나는 아까부터 하품만 연달아 하고 있었다. 웬일인지 내용이 하나도 머릿속에 들어오질 않는다. 감동이 느껴진다거나 흥미롭지도 않았다.

새삼 실감했다. 역시 자신은 역시 예술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오페라 따위 알 게 뭐란 말인가. 본 적도 없는데. 이렇게 부담스럽게 차려입고 남의 노래를 듣는 게 뭐가 좋은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사나가 자신의 왼쪽을 힐끔 쳐다봤다. 미추를 분간하지 못하는 그녀지만 무대를 감상하는 폐하의 모습만큼은 아름답다고 느꼈다. 아아. 어쩌면 정말 얼굴만 보고 홀딱 반했는지도 모른다. 섬세하면서도 단단해 보이는 옆얼굴이 빛나기 위해 태어난 태양처럼 근사하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은 꼭 한 번 만져보고 싶기도 하고…….

깨닫고 보니 폐하의 긴 머리가 제 손에 쥐어져 있었다. 언제 잡은 거지? 얼떨떨해하던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머리칼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부드러운 감촉이 손바닥을 간지럽히는 걸 얼마 즐기지도 못한 채 그만 내려놓아야 했다. 장난이 지나쳤는지 그만 머리칼의 주인과 눈이 마주쳐버린 것이다.

미쳤어. 대체 왜 이런 행동을 한 거야? 이사나는 자책하며 얼른 손을 떼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해드리려고요. 그것뿐입니다.”

“거짓말. 아까부터 계속 날 보고 있었잖아.”

다 들켰구나. 이사나가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숙이자 그런 그녀를 펠릭스가 눈을 빛내며 바라보았다.

“내가 오페라보다도 재미있었나? 그래서 그리 정신없이 바라본 거야?”

“아뇨!”

이사나는 딱 잘라 부정했다. 하지만 곧 다시 변명을 시작했다.

“아니, 아닌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재미라고 하기는 그렇고요. 그게 그러니까…….”

더듬거리며 변명을 이어갈수록 펠릭스의 웃음은 더욱 짙어졌다.

“노래가 별로라면 재미있는 걸 하나 알려줄까?”

갑자기 이사나의 어깨로 손이 닿았다.

“폐하?”

“저길 봐.”

어깨의 온기를 신경 쓰기도 전에 그녀는 펠릭스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봐야 했다. 손끝이 향한 박스석에는 붉은색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깨닫지 못했는데 그 바로 옆 좌석도 커튼이 반가량 쳐져 있다. 저러면 무대가 하나도 보이지 않을 텐데.

의아해하는 이사나를 위해 펠릭스가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애정행위를 하기 위해서야.”

“설마,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요?”

“흔히들 극장을 살롱의 축소판이라 부르지. 치장을 뽐내기 위해 여기만큼 좋은 곳이 없으니. 특히 박스석은 귀족들의 사교장 역할과, 그들의 은밀한 과시욕을 드러내는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다. 공공연히 자신들의 관계를 드러내고 싶어 하는 이들이 종종 있거든. 바로 나처럼.”

촤라락.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야 정면으로 붉은 커튼이 내려왔다. 동시에 펠릭스의 얼굴이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위험해!’

이사나가 급히 물러나자 앉아 있던 의자가 따라서 덜컹거렸다.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가려던 그녀를 잡아준 건 펠릭스였다.

도움을 준 건 고마운 일이었지만 덕분에 피하려던 시도가 무색하게 둘은 더욱 가까워져버렸다. 다시 뒤로 가려 해도 손이 잡혀 옴짝달싹할 수도 없었다. 졸지에 천장을 올려다보게 된 이사나 위로 펠릭스의 체중이 실렸다.

“눈…… 감아.”

나지막한 음성과 함께 천천히 그의 입술이 다가왔다. 입술 사이로 외설스러운 선홍빛 혀가 드러나자 짜릿한 전율이 발끝부터 등을 타고 올라온다. 이런 종류의 긴장감에는 도무지 익숙하지가 않았다. 매력적인 입술이 막 자신의 입술에 내려앉으려는 찰나, 기어코 이사나의 발이 움직이고야 말았다.

퍽!

두 발로 가슴을 걷어차인 펠릭스가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등을 보이며 엎드린 그는 금방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흠칫 몸을 굳힌 이사나가 얼른 다가갔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폐하!”

“쿨럭, 쿨럭…….”

몇 번을 불러도 돌아오는 건 기침뿐,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서 그만…….”

“쿨럭!”

그놈의 책은 이제 정말 갖다 버려야겠어. 펠릭스는 오페라 박스석에서의 입맞춤은 뭇 여성들의 꿈이라던 엉터리 내용을 떠올리며 이를 북북 갈았다.

제가 어리석었다. 다시 만나기만 하면 모든 게 끝일 거라 여기다니. 6년이 흘러버렸다. 성인에게도 긴 시간인데 하물며 둘은 어린 시절 한 계절을 함께한 게 전부. 상대에 대해 아는 게 전무하니 서로 간에 마음의 거리를 좁히기 어려운 것도 당연했다.

그래, 한 사람의 마음을 갖는다는 건 이다지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선물도, 달콤한 말도, 공연도 안 된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이사나를 얻을 수 있단 말인가? 펠릭스는 제 가슴을 끌어안은 채 애써 태연한 얼굴을 했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극심한 통증이었지만 명색이 황제라 내색도 할 수 없었다.

“좋아할 거라 생각해서 데리고 온 건데. 이번에도 잘못 짚은 건가?”

“설마요. 제가 언제 또 이런 경험을 해보겠습니까. 익숙지 않아서 그럴 뿐이니 마음 쓰지 마십시오. 방금 전 발차기도 폐하를 거부하는 게 아니라……. 그저 당황해서 저지른 실수일 뿐인걸요.”

“미리 예고만 하면 하게 해주긴 하는 거고?”

“예? 그, 그런 건 아니고요. 폐하께선 참 짓궂으시군요.”

얼굴이 붉어진 이사나를 보며 펠릭스가 피식 웃었다. 많이 당황했는지 머리를 손으로 벅벅 긁어 곱게 땋아 장식했던 머리모양은 엉망이 된 지 오래였다. 그런 모습까지도 못내 사랑스러웠다.

“농담이야. 하지만 내게 그대는 너무 어렵단 말이야. 그러니까…….”

그는 헝클어진 붉은 머리칼을 살며시 잡았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또다시 발이 날아올까 봐 긴장했지만 다행히 그녀는 움찔할 뿐 소파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조금만 더 마음을 열어. 날 너무 기다리게 만들지 말라고.”

일어나지 않고 무릎을 꿇고 있던 펠릭스가 그대로 머릴 숙여 이사나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서 아리아 따위는 저 멀리 어딘가로 날아가버렸다. 귓가로 들리는 건 온통 자신의 심장 소리뿐이다. 이사나는 손을 들어 닿지도 않은 입술에 대었다.

아픈 것도 아닌데 온몸에 힘이 빠진다. 자꾸만 눈을 감고 싶어진다. 꼭 술에라도 취한 것처럼.

폐하의 말은 어려웠다. 저분이 하는 모든 말은 마치 영원을 약속하는 것 같아 착각을 하게 만든다. 할 수 없는 약속은 하고 싶지 않다. 한번 욕심을 내기 시작하면 모든 걸 갖고 싶어질 테니까.

하지만…… 하지만…….

“예, 폐하.”

대답을 하게 되고 마는 건 왜일까? 마음을 따라 몸이 움직이고 마는 건. 앞으로의 일은 미뤄두고 오늘만큼은 이 달콤함을 즐기고 싶었다.

아름다운 아리아를 배경 삼아 둘은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