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제가 당신 앞에서 길을 열겠습니다. 전하께선 앞으로 수백의 기사들을 거느리시겠지만, 허락해주신다면 제가 영광스러운 당신의 첫 번째 기사가 되고 싶습니다. 허락……해주시겠습니까?”

가시투성이의 연꽃을 닮은 황태자. 그분을 지켜드리고 싶었지만, 검을 잃은 나는 아직 어리고 나약한 그분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6년 후…… 왕관을 거머쥔 그분이 다시 만난 내게 말했다.

그대는 나를 지켜. 나는 그대를 지킬 테니.

“이사나. 그대는…… 아직도 내 기사인가?”

“폐하께서 저를 버리지 않으시는 한 언제든지요. 그러나 검을 잃은 제게 자격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검을 잃었기 때문에 해줄 수 있는 일이 하나 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대, 나와 혼인해주지 않겠어? 대신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돼. 오직 내 첫 번째 기사인 그대와 나만의 비밀이다.”

2. 작가 소개

소리엔

이야기를 사랑하는 공상가.

친한 친구처럼 편안한 글을 쓰고 싶습니다.

‘2015 카카오페이지X도서출판 가하 공모전’특별상 수상.

▣ 출간작

공작성의 하녀님

3.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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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미리 보기

복도처럼 긴 방의 끝에 황금을 그대로 녹여 만든 것처럼 보이는 왕좌가 놓여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왕좌에 펠릭스가 앉아 있었다. 그는 흡사 조각가가 심혈을 기울여 깎은 신상(神像) 같았다. 더없이 섬세하지만 약해 보이지 않고, 태양처럼 홀로 빛났다. 이사나가 들어서자 그가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강렬한 눈빛이었다.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서늘한 외모와 어울리는 은빛 머리칼이 따라서 물결쳤다. 그것은 퍽 눈이 즐거울 만한 광경이었으나 긴장으로 머릿속이 하얗게 된 이사나에게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둘은 서로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심장도 걷잡을 수 없이 뛰었다. 그녀는 문득 펠릭스의 신장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고개를 젖혀 겨우 올려다볼 정도가 되어서야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문득 이사나의 코에 좋은 향내가 맡아졌다. 그윽하면서도 어딘가에 날카로움을 숨기고 있는, 매력적인 남성의 향기였다.

키가 놀라우리만치 자라셨습니다. 머리도 많이 기르셨고요. 이제 어릴 때의 귀여움은 남아 있지도 않고 훤칠한 미남이 되셨네요. 아마 어떤 이라도 폐하로부터 눈을 떼지 못할 겁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무얼 하시면서 긴 시간을 보내셨나요? 전 그럭저럭 잘 지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말입니다. 매 순간 당신이 참 많이 그리웠습니다…….

하고 싶은 많은 말들이 입속에서만 맴돌았다. 입을 열면 또 어느 날의 꿈처럼 사라져버릴까 봐 그녀는 쉴 새 없이 아름다운 주군을 눈에 담을 뿐이었다. 가까워지자 열네 살 어린 시절의 모습도 군데군데 보였다. 치우침 없이 반듯한 저 이마라든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는 입술이라든가…….

자신을 뜯어보는 그녀를 향해 펠릭스가 갑자기 손을 내밀었다. 손끝이 향한 곳은 이사나의 하얀 볼이었다. 방비도 못 하고 볼을 찔린 그녀가 얼이 빠져 눈을 깜박이자 그가 빙긋 웃었다.

“미안. 혹시 꿈인가 하여.”

성인이 되어 다시 듣는 그의 음성은 놀랄 만큼 깊은 저음이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녀도 소리를 내었다.

“꿈일 리가요. 이사나 스노든이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황제 폐하라니. 우리 사이에 그런 예는 접어두자.”

얼굴의 장난기를 채 지우지 못한 펠릭스가 부드럽게 말했다.

“원래는 직접 데리러 갈 계획이었어. 하루라도 빨리 만나고 싶었고, 그대가 태어난 곳이 어떤지도 보고 싶었거든. 그런데 갓 즉위한 황제다 보니 그만 일에 발목이 잡혀버렸지 뭐야. 그간 황궁의 묵은 때를 벗기는 작업을 일일이 지시하고 감독하느라 바빴어. 사실 이런 일은 누구한테 맡겨둘 것도 못 되니까.”

작업을 지시하고 감독하셨다? 궁 어디에 큰 공사라도 마치셨나. 뜻 모를 말에 멀뚱히 서 있으려니 그가 다시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대를 본 게 양팔에 화살을 맞고 쓰러지는 모습이었지. 이렇게 보니 조금은 안심이다. 미심쩍은 내 기억보다도 그대가 훨씬 더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나주어서.”

“사고로부터 벌써 6년이나 지났으니까요. 팔도 잘 움직이고 일상생활을 하는 데는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검을 들 수 없을 뿐이다?”

대답 대신 이사나는 무릎을 꿇으며 예를 취했다.

“즉위를 축하드립니다, 폐하. 오면서 대관식을 마치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다시 뵙게 되어 기쁩니다.”

호수를 닮은 펠릭스의 눈이 슬픔으로 흐려졌다. 그는 무릎을 꿇은 그녀를 향해 손을 뻗다 주먹을 쥐며 내렸다.

“이사나. 혹시…… 날 원망하나?”

“원망은요. 폐하와 함께한 시간이 제 일생 중 가장 빛나는 한때인데요.”

“그동안 한 번도 찾지 않은 내게 서운했어?”

“나름의 사정이 있으셨으리라 짐작합니다. 일개 백성으로 돌아간 절 지금이라도 다시 찾아주심에 감읍할 따름이지요.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직하기만 한 대답에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조금쯤은 서운했다, 보고 싶었다 말해주길 바랐는데. 뼛속까지 기사인 그녀에게는 역시 무리일까? 아니면 검을 잃어버린 그녀에게 황궁은 잊고 싶은 장소가 된 걸까?

“핑계로 들리겠지만…… 그대를 위해 연락을 취하지 않았어. 젊은 황후에게 빠져 있는 줄만 알았던 아바마마께서 그녀를 위시로 한 수도귀족과 치열한 권력다툼 중이었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별궁으로 날 보낸 건 방치가 아니라 보호였다는 사실도. 아바마마께선 죽을 뻔한 날 공국으로 빼내고 장자의 권리까지 보장해주었지만 그럼에도 지난 6년간 줄곧 안전하지 않은 상태였어. 서신이라도 한 장 주고받았다간 그대까지 괜한 위험에 처하게 만들까 두려웠지. 하지만 나는 늘…… 모든 순간마다 그대가 그리웠어.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가 함께했던 그때가 내게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으니.”

마음속 혼잣말과 꼭 같은 얘기를 하는 그를 이사나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당신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셨습니까? 그럼 혹, 지금 여기 선 것만으로 벅차오르는 제 마음도 알고 계십니까?

망설이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떼어 대답했다.

“저도요, 폐하.”

짧은 한마디에 기쁨을 참지 못한 펠릭스의 볼에 보조개가 팼다. 아이처럼 좋아하던 그가 짐짓 호기롭게 말했다.

“혹시 바라는 소원이 있다면 말해봐. 지금의 나는 이 델피시오 제국의 주인. 그대가 바라는 모든 걸 들어줄 수 있다.”

“소원 말씀이십니까?”

순간, 이사나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가는 오라버니 부부, 도박꾼 아버지, 손바닥만 한 판잣집, 그리고 팔백 골드의 빚. 그러나 생각은 잠시뿐, 그녀는 아까보다도 깊게 머리를 숙였다.

“그런 건 없습니다. 전 지금 제 삶에 만족하고 있으니까요.”

“어떻게 아무것도 원하는 게 없어? 뭐든 좋으니 말해봐. 다른 이들처럼 황금과 보석, 좋은 집을 달라고 해. 하다못해 팔을 망가뜨린 날 원망이라도 해봐.”

“제 팔을 이렇게 만든 건 폐하가 아니잖습니까? 그리고 전 호위기사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또 그렇게 할 겁니다. 도리어 끝까지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할 따름이지요.”

여전히 곧기만 한 그녀를 펠릭스가 복잡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이사나. 그대는…… 아직도 내 기사인가?”

“폐하께서 저를 버리지 않으시는 한, 언제든지요. 그러나 제게 자격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검을 잃은 제가 당신께 해드릴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으니.”

잠시 침묵하던 그가 조용히 읊조렸다.

“아니. 검을 잃었기 때문에 해줄 수 있는 일이 하나 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대, 나와 혼인해주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