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제가 당신 앞에서 길을 열겠습니다. 전하께선 앞으로 수백의 기사들을 거느리시겠지만, 허락해주신다면 제가 영광스러운 당신의 첫 번째 기사가 되고 싶습니다. 허락……해주시겠습니까?”

가시투성이의 연꽃을 닮은 황태자. 그분을 지켜드리고 싶었지만, 검을 잃은 나는 아직 어리고 나약한 그분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6년 후…… 왕관을 거머쥔 그분이 다시 만난 내게 말했다.

그대는 나를 지켜. 나는 그대를 지킬 테니.

“이사나. 그대는…… 아직도 내 기사인가?”

“폐하께서 저를 버리지 않으시는 한 언제든지요. 그러나 검을 잃은 제게 자격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검을 잃었기 때문에 해줄 수 있는 일이 하나 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대, 나와 혼인해주지 않겠어? 대신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돼. 오직 내 첫 번째 기사인 그대와 나만의 비밀이다.”

2. 작가 소개

소리엔

이야기를 사랑하는 공상가.

친한 친구처럼 편안한 글을 쓰고 싶습니다.

‘2015 카카오페이지X도서출판 가하 공모전’특별상 수상.

▣ 출간작

공작성의 하녀님

3. 차례

#1

#2

#3

4. 미리 보기

“참으로 신기하구나. 아직도 돌아다니는 이들이 있다니.”

“펠 님, 사람들이 바깥에 나와 있는 이유가 궁금하십니까? 그건…… 바로 저것 때문입니다.”

이사나가 가리키는 곳에는 천막을 친 장사꾼이 바닥에 알록달록한 종이봉지들을 늘어놓고 팔고 있었다. 얼른 다가간 그녀가 그중 노란색으로 된 것을 하나 구입하자 곁에서 보고 있던 펠릭스가 마뜩잖게 물었다.

“그 봉지는 뭐냐?”

“하하! 봉지가 아니라 풍등이라는 물건입니다. 단단한 나무와 종이를 이용해 만든 등인데 이렇게 안에 제대로 심지도 들어 있죠. 보세요. 사람들의 손에 비슷한 물건이 하나씩 들려 있죠? 잠시 후 달이 완전히 붉게 변할 때에 맞춰 불을 붙여 하늘로 띄우면 됩니다.”

“혹시 등불의 빛으로 붉은 달의 사악한 기운을 쫓기 위함인가?”

“네! 정답입니다!”

이사나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그럼 잠시만 장소를 옮겨볼까요? 등이 나는 광경을 제대로 보기 위해선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편이 좋거든요.”

낡은 건물의 계단으로 자리를 옮긴 둘은 옆에 있던 사람들에게 불을 빌려 풍등과 함께 구입한 초에 붙였다. 바람에 꺼질 듯 말 듯 흔들리는 초를 불안하게 보고 있으려니 광장에 모인 군중들 사이에서 밝은 빛이 하나둘 늘어났다.

“앗, 지금입니다. 심지에 불을 붙여주십시오!”

신호가 떨어질 때에 맞춰 펠릭스는 얼른 풍등 안 심지에 초를 댔다. 심지에 불이 붙자 등은 겉에 바른 종이 색깔을 따라 노란빛을 띠었다. 그러자 이사나가 있는 힘껏 들고 있던 풍등을 하늘로 띄웠다. 다행히 풍등은 그대로 추락하거나 부딪치는 일 없이 두둥실 날아올랐다. 동시에 둘의 입이 쩍 벌어졌다.

새카만 밤하늘에 수백, 수천 개의 풍등이 떠다니며 색색의 빛을 발했다. 바라보기만 해도 황홀한 장관이었다. 흡사 하늘의 별이 통째로 쏟아져 내린 듯했다.

“아름답다…….”

절로 흘러나온 펠릭스의 감탄사에 이사나가 동감했다.

“정말 그렇지요? 실은 저도 직접 보는 건 처음입니다. 몇 해 전 붉은 달 때는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라 심야외출을 금지당했었거든요. 창문 너머로라도 구경하고 싶었는데 사감과 학생회가 조를 짜 순찰까지 또는 바람에…… 흠, 흠. 어쨌든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동이 느껴지는군요.”

“그래서, 이게 내게 보여주고 팠다는 광경이었군?”

펠릭스가 눈꼬리를 접으며 기분 좋게 웃었다. 모처럼 보는 귀한 미소에 망설여졌지만 그녀는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틀린 말씀은 아니지만…… 사실 제가 보여드리고 싶었던 건 풍등보다는 광장에 모여 있는 저 무수한 인파입니다. 저희들 귀족들은 붉은 달이 뜨는 날은 낮부터 외출을 꺼리고 온 집 안의 커튼을 친 채 몸을 숨기지요. 한 조각 달빛을 받는 게 두렵다는 이유에서요. 그런데 귀족보다 용감한 저 백성들을 좀 보십시오. 몸을 숨기기는커녕 광장에 나와 풍등으로 삿된 기운을 내쫓으려 하고 있지 않습니까? 땅의 인간들 주제에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막으려고요. 저들이 바로 앞으로 당신께서 다스릴 백성들입니다. 그러니 펠 님께서도…….”

“나도 내 백성들처럼 지지 말고 싸워라, 이런 건가? 흥! 건방진 소릴 하는구나. 나 역시 붉은 달 따위는 무섭지 않다. 그랬다면 널 따라 여기까지 나오지도 않았어.”

“그런 말씀을 드리려던 게 아니라…… 어어? 전, 아니, 펠 님!”

거칠게 베일을 걷어 젖힌 펠릭스가 밤하늘을 노려보았다. 핏빛으로 완전히 물든 달은 흘러가는 검은 구름들 사이에서 불길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빛이 지상까지 도달하는 일은 없었다. 환하게 불을 밝힌 풍등들 덕분이다. 하나였을 때는 미약한 불빛에 불과하던 등불들이 한데 모이자 하늘의 현상마저 거스를 수 있는 거대한 힘이 되었다.

그는 다시 이사나를 바라보았다. 베일을 벗은 자신을 누가 발견하기라도 할까 검을 넣어둔 겉옷 안쪽에 손을 집어넣고 주위를 살피는 게 그야말로 호위기사다웠다.

처음부터 그녀에게는 아무런 기대도 걸지 않았었다. 까마득한 신입여기사가 어딘지도 모르고 제 궁까지 찾아왔을 때는 이 일의 배후가 어딘지, 어떤 연유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충분히 짐작이 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별생각 없이 들인 사람 하나가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리라고는 조금도 예상치 못했다.

신입인 주제에 시종장도 놓아버린 궁의 기강을 잡으려 든다. 여자면서 제 신장과 맞먹는 대검을 들고 온몸으로 덤벼든다. 골려먹기 위해 시켰던 잡일도 마다 않고 해내고, 배를 잡고 큰 소리로 웃고, 손수건이 아닌 손등으로 허겁지겁 눈물을 닦는다. 그 눈물은 본인이 아닌 펠릭스 자신을 위해 흘린 것이었다.

‘이사나, 너와 함께일 때면 난 자꾸만 난생처음 겪는 사건들과 맞닥뜨리게 되는구나. 그럴 때마다 당혹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전에 없던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쩌면 정말로 이 상황을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꿈같은 생각 말이다. 내 첫 번째 기사여, 너와 함께 다시 꿈꿔봐도 될까? 그래도 될까?’

그때 그에게 다가온 이사나가 흘러내린 베일을 머리에 씌워주었다.

“죄송합니다. 많이 답답하시겠지만 조금만 더 참아주십시오. 펠 님의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다소 무뚝뚝하지만 걱정이 담뿍 담긴 목소리였다. 묵묵히 그녀의 손길을 받아들이던 펠릭스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가 싶더니 그로부터 가만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은…… 밤이다. 해는 무력해. 몸을 웅크린 채 긴 밤이 지나길 기다릴 뿐이지. 하지만 어둠이 물러가고 푸른 새벽이 찾아오면 그때는 하늘로 오를 준비를 시작할 거다. 가장 높은 곳까지 떠오르기 위해.”

그렇게 말하는 펠릭스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다. 그럼에도 그를 통해 이사나가 떠올린 건 한 자루의 검이었다. 병색이 완연한 모습이나 타인의 기운에 예민한 검사이기에 느낄 수 있다. 호수 같은 눈동자 너머 형형하게 일렁이는 흉포함을. 언제고 담금질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마음속 칼날을.

부르르 몸을 떨던 이사나가 따라서 속삭였다.

“해가 뜨는 그날, 저 역시 당신의 곁에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