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제대로 얘기 좀 하자. 너 언제부터 나 좋아했어?”

“저기…… 성유야. 그거 고백 아니었는데.”

손님과 업주, 피고용자와 고용인, 그리고 동갑내기 친구로 지난 3년 동안 관계가 휙휙 변한 우성유와 소해금. 그러다 어느 순간, 둘은 연인이 되었고 전남친, 전여친이 되어버렸다.

성유는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자신을 떠나 포르르 날아가버린 전여친이자 절친을 찾아 독일로 향했지만 더 이상 가벼운 마음일 수 없어졌다. 아니, ‘가벼운 마음인 척’할 수 없어졌다.

이제야 겨우 발견한 진심을 오롯이 서로에게 내보일 수 있을까.

“왜 거짓말까지 하면서 나를 만났어?”

“만나야 헤어질 수 있을 것 같아서.”

안 만나면 못 헤어질 것 같았으니까.

“헤어지려고 날 만났다는 거야?”

“맞아. 우성유 너랑 헤어지고 싶어서, 그래서 만났던 거야.”

“…….”

“빨리 해치워버리려고.”

2. 작가 소개

유나리

취미로는 싫어서 노력껏 열심히 씁니다.

3. 차례

#프롤로그

#1. 그거 고백 아니었는데

#2. 말한다, 말하지 않는다

#3. 뭐든지 처음이 가장 어려운 법

#4. 잠깐만, 깜깜한 곳에

#5. 깊이, 깊숙이

#6. 가을, 밤, 비밀과 비밀

#7. 너는 그때 나한테 왜 그랬어?

#8. 너무 다정하여 나를 외롭게 만드는 사람

4. 미리 보기

“왜 왔어? 들어오지 말고 거기서 말해.”

해금은 보조걸쇠를 걸어둔 채 얼굴만 빼꼼 내밀었다. 마치 신원을 확인하기 이전의 도시가스 검침원을 대하듯이.

성유는 그의 가슴께를 가로막고 있는 은색 걸쇠를 내려다보다가 되물었다.

“오면 안 돼?”

“안 되지, 되겠니.”

해금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당연한 걸 묻는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대답은 들으나 마나였다. 그녀는 냉담히 문을 닫았다. 아니, 닫으려 했다. 그러나 성유가 문틈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기에 결국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놔.”

위험하잖아. 그 말은 일부러 삼켰다. 이미 성유는 노림수가 빤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전혀 불쌍하지도 않은 놈이 한껏 불쌍한 척을 했다.

“추워. 들여보내줘, 해금아.”

“네가 왜 여기 왔는지 알아. 근데 안 돼.”

“될 수도 있잖아. 될 거야.”

그는 미약한 가능성에 철석같이 매달렸고, 해금에겐 그것을 단호하게 끊어내줄 의무가 있다.

“아니, 나는 헤어진 사람과 친구로 지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

“너하곤 달라, 우성유.”

또박또박 말했다. 몇 시간 전 휴대전화에 대고 읊조릴 때와 같이.

“헤어지자.”

- 그래, 알겠어.

단 한 번의 미련도 없이 순순히 받아들일 땐 언제고, 왜 또 갑자기 남의 집에 찾아왔을까 궁금했는데, 그럼 그렇지 보름간의 연애는 일탈로 분류해두고서 다시금 친구 행세를 하겠단 거다. 뻔뻔하긴.

누가 따라줄까 보냐고, 누구 좋으라고……. 그녀는 똑바로 성유를 올려다보았다.

“나 아침에 출국해. 가면 적어도 5년은 안 돌아와.”

“……뭐?”

성유의 표정이 대번 딱딱해졌다. 해금은 그 충격을 외면하지 않았다.

“독일로 가서 사진 공부하기로 했어. 그래서 가게도 정리했고, 보시다시피 집도 비우는 거야.”

흘긋, 그녀가 턱짓으로 자신의 어깨 뒤를 가리켰다. 어느새 살림을 텅 비워낸 거실이 을씨년스러웠다.

“그러니까, 오늘 네가 날 바람맞히고 내가 알려준 식당에서 아이돌이랑 데이트하지 않았더라도 우린 헤어졌을 거야. 하필 몇 시간 뒤가 네 생일이라서 미안했지만 덕분에 죄책감도 안 들어. 나 이 정도는 못돼도 괜찮지? 너도 이 정도는 감수해.”

“…….”

성유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다만 굳은 눈빛으로 질문을 대신했다. 언제부터 예정되어 있던 일이냐고. 일부러 숨긴 거냐고. 처음부터 속일 생각이었느냐고. 해금은 귀찮은 기색 없이 하나하나 해명해주었다.

“원래는 아무 말도 안 하고 떠날 생각이었어. 간 뒤에 엽서나 한 장 보낼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너와 사귀게 돼서.”

잠깐, 시선을 피했다.

“거짓말……, 했어.”

“왜 거짓말까지 하면서 나를 만났어?”

더럭 그가 다그쳤다.

“너 거짓말 제일 싫어하잖아.”

성큼. 동시에 한 발 다가온 그림자가 장애물에 가로막혀 흔들렸다. 철컹! 그 소리에 해금은 제 안에 걸어두었던 마지막 빗장이 열렸음을 느꼈다.

소해금이 왜 우성유를 만났느냐고? 그건 답을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해금은 무의식중에 걸음을 한 발 물렸다.

“만나야 헤어질 수 있을 것 같아서.”

안 만나면 못 헤어질 것 같았으니까.

만나지 않으면, 헤어지지 않으면, 이러다 죽을 때까지 그를 좋아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성유의 말투가 약간 험악해졌다.

“헤어지려고 날 만났다는 거야?”

“맞아.”

대답이 술술 흘러나왔다. 진심이었다. 그동안은 그와 헤어지기 싫어서 친구로 지냈을 뿐이다.

그래서 그녀가 추구해온 보편적 삶의 가치관과 정반대되는, 원래대로라면 진작 절교하고도 남았어야 할 군상을 꾸역꾸역 참아가며 여태 버텨온 것이다. 비겁하게.

“우성유 너랑 헤어지고 싶어서, 그래서 만났던 거야.”

“…….”

“빨리 해치워버리려고.”

“…….”

“네가 가져온 수박을 보는데 무섭더라. 넌 진심 같은 거 없는 애라는 걸 알면서도 흔들리는 내가.”

그 어느 순간 성유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휘잉, 문틈으로 찬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그가 물러섰기 때문이다. 깜빡거리는 복도 등이 성유의 뺨을 어두운 오렌지빛으로 물들였다. 별안간 조금도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가 뒤를 따랐다.

“해금아.”

“…….”

“넌 내가 상처도 안 받는 줄 알지?”

“……몰라.”

왜였을까. 담담하게 그녀를 내려다보는 성유를 보자 해금은 제멋대로 입술이 움직였다.

“하지만 지금은 안 받았을 거 알아.”

이렇게나 못난 사람이었다니. 스스로에게 실망할 새도 없이 쾅, 문을 닫은 뒤엔 보조키까지 몽땅 잠가버렸다. 그제야 다시 중얼거렸다.

“받았어도 내가 더 많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