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듣고. 영화 보고. 맛있는 것도 먹자. 놀러 와.”

“초대해주면.”

“초대하잖아, 지금.”

아이스크림 마니아이자 식품뉴스의 기자 윤세랑. 취재차 뉴욕에 갔다가 아이스크림 한 통을 두고 격전을 벌인 원수, 소매치기 당한 지갑을 찾아준 은인, 거기다 회사에 떨어진 낙하산 임시 대표는 모두 동일인, 강준영이었다!

뉴욕에서건 서울에서건 투닥거리던 두 사람은 은인, 행인, 직장인, 귀인, 연인…… 세상의 모든 이름과 달콤함이 가득한 사이가 되어가는데…….

“생각해봤어? 인 자로 끝나는 말.”

“원하는 답이 있어?”

“질문을 질문으로 반사하네.”

“생각해둔 게 있으니까 물어봤을 거잖아.”

“윤세랑. 밀당하지 마. 못 알아듣는 척도 하지 말고. 나는…….”

곧게 쏟아져 내리는 눈빛. 보기 좋게 솟아오른 목울대가 움직이고, 고백이 흘러나왔다.

“나는 너한테 올인이야.”

하아…….

“지금부터 내내, 올인일 거야.”

2. 작가 소개

나자혜

‘사랑과 지혜’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사람

야구팬. Runner.

2005년부터 소설을 쓰고 있다.

▣ 출간작

아이스크림처럼, 레몬처럼

별의 바다

얼음불꽃

13월의 연인들

꿈꾸는 오아시스

우리들의 시간꽃

눈의 숲에서 봄을 만나다

눈의 성에서 너를 만나다

흑과 백

3. 차례

#14. 너의 눈물에 ‘ㅅ’을

#15. 우리가 우리답게 사는 방식들

#16. 인생 앞에 인턴이라 미안해

#17. 백 번 사랑해도 위태롭지 않도록

#18. 그 해 겨울, 서른의 편도표

#19. 세상의 모든 달콤함은 또한

#20. Snapshots

#‘세모달’과 함께하면 좋은 음악

4. 미리 보기

일요일. 아침이 설익은 시간. 차가운 공기가 감도는 놀이터가 고요했다. 준영은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서 세랑의 눈치를 봤다.

“연락 못 해서, 미안. 전화기 배터리가 다 돼서……. 메시지 확인하고 바로 왔어.”

“괜찮아?”

어젯밤 내내 네 집 앞에 죽치고 있었다고. 망설이다, 망설이다 끝내 전화를 못 했다고. 네가 안 받을까 봐. 만나자면 안 만나줄까 봐. 앞날에 대해 생각해보자거나, 당분간 사적인 연락을 하지 말자고 할까 봐. 겁에 질려서 동동대다가, 결국 아무것도 못 했다고.

네가 날 내칠 거라는 걸 안다고. 나는 네게 슬픈 날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니까. 내쳐지는 거라면, 조금이라도 유예하고 싶었다고. 우리가 멀어지는 거라면, 멀어지는 시간을 무한대로 늘리고 싶었다고. 넌 느린 걸 좋아하니까. 그렇게, 희망고문이라도 받고 싶었다고. 달빛 아래서 그런 마음이었다고.

지금도 네가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눈앞이 캄캄하다고. 숨 쉬는 게 힘들다고.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다고. 배가 고픈 줄도 몰랐다고. 그 와중에도 잠은 들이쳐서 눈을 붙였다고. 꿈까지 꾸면서 자는 동안 네가 걱정하는 줄 몰랐다고. 내가 이런 바보라고.

늦지 않았기를 바란다고. 너를 붙들려는 이 마음이 네게 가닿기를……

입이 열리질 않았다. 스스로가 한심해서 변명도, 사과도 할 수 없었다.

“뭘 좀 가져왔는데…….”

준영은 주머니 안의 물건을 만지작거렸다.

“세진이가 나한테 뭘 물은 것 같아서. 답을 하려고.”

어떻게든 진심을 전해야 했다. 초라하더라도. 이대로 세랑을 잃을 수는 없었다.

“답?”

세랑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단 하나의 것. 그런 세랑이 지금 흔들리고 있었다.

“용서해달라고 할 순 없어. 내 잘못이 아니니까. 그런데 네 옆에 있겠다고 우길 수도 없어. 난 그 말 못 해. 그러니까 네가 날 붙들어줘. 옆에 있어도 된다고 해.”

준영은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세랑은 준영이 내미는 물건을 내려다봤다. 붉은 한지에 뭔가가 싸여 있었다.

“이게 뭐야?”

말없이 손만 들이미는 준영. 세랑은 종이뭉치를 받아 펼쳤다. 나무젓가락이 나왔다. 표면이 까칠하고 두 개가 딱 달라붙은. 이건…….

준영의 오피스텔에서 처음으로 저녁을 먹던 날에 쓴 거였다. 아니, 쓰려고 했는데 쓸 수 없던 것이었다. 아무리 힘을 줘도 쪼개지지 않았으니까.

“떨어지지 않을 운명인가 봐.”

준영이 물기 머금은 목소리를 떨어뜨렸다. 그 밤에 그녀가 했던 말이었다.

손에 느껴지는 나뭇결의 감촉이 깔깔했다. 이걸 간직하고 있었던가. 스쳐 지나듯 했던 그 말을, 여태 기억하고 있었던가.

“어머니 이야기 그만할 일은 없을 거라고, 세진이가 그랬지. 거기에 대한 내 답이야.”

준영은 가슴에 얹힌 숨을 토해냈다.

“너와 붙어 있을 수 있으면, 기꺼이 불량품이 될 거야. 죄인이 될 수도 있어. 어머니 이야기 해. 들을게. 그 이야기가 칼이 돼서 심장을 찔러도 좋아.”

세랑이 그를 올려다봤다. 뭔가 말을 하려다가 못했다. 입술을 떨면서, 숨만 삼켰다.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안 된다고 하지 마.

준영은 세랑의 어깨를 잡았다. 눈 떠. 눈 뜨고 날 봐. 봐준다고 했잖아.

“견딜게. 뭐든. 뭐든 하고, 뭐든 될게.”

겨우, 따뜻해졌는데. 이제 너 없이는 안 되겠는데.

“지나가는 사람으로만 만들지 마. 나, 행인 싫어.”

다시는, 혼자 추운 겨울 보내기 싫어.

세랑의 눈이 열렸다. 온 세상이 열리는 것 같았다.

“세랑아.”

맑은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어린 눈이 웃었다.

“너…… 정말 엄마가 보내준 선물이잖아.”

오늘 아침 꿈에서 본 그 웃음이었다.

“어쩐지 내내 눈부시더라.”

눈에 고인 눈물이 넘쳤다. 아침 햇살을 머금고서 말간 빰 위로 굴렀다. 준영은 손으로 세랑의 눈가를 쓸었다.

“울지 마.”

“너도 죄인처럼 굴지 마. 네 잘못 아니야.”

“그게…….”

“알아. 말처럼 쉽지 않은 거.”

목이 메는지 세랑이 숨을 삼켰다.

“그래도 혼자라고 생각하지 마. 내가 동지 해줄게.”

희망이, 고문 같은 희망이 숨통을 옥죄었다.

“죄인처럼 느껴지는 날이면, 그 마음이 덫이 되면, 내가 널 구해줄게. 아빠나 세진이 보는 게 힘들 때가 있으면, 네 눈 가려줄게.”

“나는 괜찮아. 겪어봐서 알아.”

“안 괜찮을 거야. 나도 겪어봐서 알아.”

세랑이 그를 데리고 벤치로 갔다. 그를 앉히고 옆에 앉더니 11년 전 그날을 이야기했다. 지방출장 가는 엄마를 졸라서 따라 나섰다고. 맑은 날이었다고. 바람이 좋은 날이었다고. 초록의 풍경이 예뻤다고. 그런데 그 아름다운 날이 핏빛으로 산산조각 났다고.

“트럭이 달려들었어. 충돌하기 직전에 엄마가 핸들을 꺾었어.”

준영은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내가 그날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 엄마가 무사하셨을 텐데. 그 생각을 셀 수도 없이 했어. 내가 엄마랑 같이 가지 않았으면. 그랬으면 엄마는 엄마만 생각했을 텐데. 그 차를 피했을 텐데. 내가 휴게소에서 호두과자 먹고 가자고 조르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길가의 꽃들이 예뻐서 몇 송이 꺾어 가자 그러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그럼 우리가 그때 그 지점을 지나고 있지 않았을 텐데. 그 차랑 충돌할 일도 없었을 텐데. 그런 생각……”

“네 잘못이 아니야.”

“하지만 죄인처럼 살았어. 꽤 오래. 지금도 어떤 날에, 어떤 순간에 죄인 같아. 그래서 심장이 쪼개지는 것 같아. 하아.”

세랑이 서러운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두둑 떨어졌다.

“그래서 그날은 나의 날이 될 수 없어. 나에게는 다행스러운 날인데. 안 죽고 살아남았는데. 살아남은 건 좋은 일인데.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 없어. 엄마 목숨 값으로 살았으니까, 다행일 수 없는 거야.”

준영은 세랑을 와락 안았다. 내가 다행이라고 생각해줄게. 살아남아줘서 고맙다, 윤세랑. 우리 언젠가는 죽음이 아니라 삶으로 그날을 돌아보자.

세랑이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꺽꺽거리면서 맺힌 응어리를 쏟아냈다. 한참을 그렇게 울다가 맹맹한 소리를 쥐어짰다.

“고마워. 나를 만나줘서.”

준영은 가슴이 먹먹했다.

“세진이 말이 맞아. 우리가 엄마 이야기를 그만하는 일은 없을 거야. 엄마 추억이 빛바래지 않게 들여다볼 거고, 그 위에 우리 이야기를 더해갈 거야. 그러니까 옆에 있어줘. 그날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는 이해할 거잖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세랑아.”

“너 편하라고 하는 말 아니야. 진심이야. 너는 알아줄 것 같아. 괜찮지 않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은 거. 가슴이 시린데 행복한 거. 그 마음을 너는 알아줄 것 같아. 세상 사람들 다 몰라도, 너라면 알아줄 것 같아.”

누군가 다른 좋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에게 아픔을 열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이해하려고 애쓰겠지. 같이 슬프고 아파하려고 노력하겠지. 그래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날을 겪지 않은 사람이 이 상처를 이해한다는 것은. 하지만 준영은 다를 것이다.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것 같았다.

“그날을 견뎌낸 사람들을 한 줄로 세우면, 양쪽 끝에 너와 내가 있어. 그런 우리가 만난 거야. 기적처럼, 선물처럼.”

눈물이 쏟아져서 세랑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진심이야?”

준영의 가슴이 들썩였다.

“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내가 원망스럽지 않아?”

세랑은 고개를 저었다.

“강준영 씨.”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갑작스런 존대에 준영이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 오늘 안 괜찮았어요. 마음이 기우뚱했거든요. 꼭 지구가 기우뚱하는 것 같았어요.”

준영은 세랑의 목덜미를 감싸 안았다. 바보 같이. 존대라는 연막을 치지 않고는 응석도 못 부리는 세랑이 안쓰러웠다. 이게 네가 견뎌온 덫이구나. 네 명랑함의 이면이구나.

세랑이 울었다. 아이처럼 울었다. 서럽게, 억억거리며, 눈물을 쏟아냈다.

“그런데 지금 너무 좋아. 네가 안아주니까, 따뜻해. 이대로 세상이 망해도 상관없을 것 같아.”

내내 따뜻할게. 너에게만은, 언제나. 그리고……,

“흔들리지 않을게.”

세랑이 몸을 세우고 젖은 눈을 들어올렸다.

“지구가 기우뚱해도, 흔들리지 않을게.”

땅에 두 발 단단히 딛고 버틸게. 네가 흔들리는 날 와서 안길 수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