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키워드: 동양풍, 황궁, 궁정로맨스, 가상시대물, 왕족/귀족, 순정남, 다정남, 순정녀

[작품 소개]

“제 운명이 폐하를 찌를 것입니다.

저를 곁에서 내치지 않으면 폐하가 다치십니다.”

황조를 수호하는 신녀이되,

지존을 해할 비극적 운명까지 함께 갖고 태어나 버린 가희.

그 가혹한 운명을 홀로 삭이며 지내던 어느 날

황제가 될 이가 그녀를 찾아온다.

“곁에 있으라, 운명조차 바꿀 것이다.”

수수한 목련 같은 가희를 첫눈에 사랑하게 되어 버린 치오.

처음으로 갖고자 욕망하게 된 단 하나의 사랑을

감히 운명 따위에게 빼앗길 수 없었다.

“네 눈앞에서 황제를 찢을 거야.”

건널 수 없는 강을 사이에 둔 그들 앞에

또 하나의 시련으로 찾아든 무진.

늘 형의 그림자로 살고자 했다.

근본을 뒤흔드는 사모의 감정을 느끼기 전까진.

거센 운명의 파도에 뒤엉킨 세 사람.

그들의 비극적 서사를 담은 운명의 수레바퀴는

과연 어떤 결말로 향하고 있을까.

[작가 소개]

아일라(Ailla)

출간작: <빠담 빠담 빠담>, <그대 사랑을 꿈꾸나요>

[본문 중에서]

고개조차 들지 않는 치오를 바라보던 가희는 무릎 위에 놓인 치오의 손을 꼬옥 쥐어 주었다. 자신의 두 손안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 그 단단한 손을 잡으며 가희는 자신의 위안이 그에게 닿길 바랐다.

그리고 그런 가희를 비로소 치오가 고개 들어 바라보았다. 늘 침착하고 정갈한 그녀의 모습은 오늘도 변함이 없었지만 어쩐지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두 눈이 흔들리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제 황궁 안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실 것이오니 마음을 단단히 붙잡으셔야 합니다. 어디 황궁뿐이겠습니까. 모든 백성들이 이제 전하를 하늘로 모실 것입니다.”

치오는 좀 더 내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신녀로서 하는 말이 아닌 자신을 위로하는 그녀의 마음 속 이야기들이 듣고 싶었다. 자신의 손을 붙잡은 이 뜨거운 그녀의 손처럼 그의 아픔을 같이 느끼고 있다 말해 주길 바랐다.

“신녀님은…… 신녀님은 어떠십니까.”

며칠째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서일 것이다. 호기로운 말을 이토록 무방비하게 뱉어 내는 것은.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하.”

“이제 제가 백성들에게 하늘이라면 신녀님께는 뭐가 되는 거냔 말입니다.”

도전적인 그의 말에 가희의 두 눈이 일순 크게 흔들리는 것 같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내 그녀는 다시 정갈한 표정을 지었다.

“제게 무엇이 되시다니요. 비록 신녀이긴 하나 저도 똑같은 백성이니 제게도 하늘…….”

“정녕 그리 생각하십니까?”

가만히 가희가 입을 다물었다. 입 밖으로 내어서는 안 될 말들을 기어이 뱉어 내느니 차라리 침묵을 택한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쩐지 그런 그녀의 모습이 치오를 격하게 흔들었다.

“신녀님께서 머물고 계신 이 서화궁이 어떤 곳인지 아십니까?”

감정들이 엉키며 자신을 극으로 몰고 있었지만 치오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늘 곁에 있어도 그녀를 잡을 수조차 없는 이 상황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더는 참을 수 없을 것처럼 그의 목을 죄었다.

상실감이려나. 아버지를 잃은 상실감이 그녀를 더 원하게 만드는 것이려나.

“이 궁은 황태자비의 궁입니다.”

아-. 탄식 같은 외마디를 내고 가희는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피할 수 없는 현실처럼 황태자의 손을 쥐고 있는 자신의 손이 다시 하나 가득 눈에 보였지만 그의 고집 센 얼굴을 마주 보는 것보단 차라리 이편이 나았다.

“제겐 비가 없어 이곳은 비워져 있었습니다. 처음 신녀님을 서화궁에 모신다고 했을 때 많은 반대가 있었지만 제가 고집을 부렸습니다. 지금 주인 없는 궁 중에 서화궁이 가장 좋은 곳이니 귀한 분을 이곳에 모셔야 한다고 말입니다.”

“왜…… 왜 그러셨습니까. 황태자비의 궁에 신녀가 머물다니요. 궁의 법도에 어긋…….”

“법도가 무엇이 중요합니까. 가까운 곳에 신녀님을 모시고 싶었던 제 마음보다 그것이 더 중요하겠습니까.”

“전하…….”

“이래도 모른다고 하실 겁니까?”

가희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귓가에 윙윙거리는 소리가 안개처럼 번지고 있었다. 할매의 목소리가 들리려나. 또다시 나를 짓이기려는 운명이 내게 말을 걸려나. 감은 두 눈으로 절벽에서 떨어지는 자신의 모습이 비치는 것만 같았다.

“신녀님, 눈을 뜨십시오.”

어느새 가희의 손이 치오의 손 안에 있었다. 자신의 마음을 전하기에 이처럼 난감한 때도 없었지만 치오는 더 이상 감추고 있을 수가 없었다. 가슴이 고통으로 옥죄어 오는 것 같아 참을 수가 없었다.

“저를 보세요, 신녀님.”

하지만 가희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이미 시작된 운명을 뒤집을 수는 없겠지만 그 흐름에 마냥 같이 흘러 장단을 맞출 수는 없는 것이다. 가희는 겨우 뜬 눈으로 자신의 손을 삼켜 버린 그의 커다란 손만 바라볼 뿐 미동도 없이 그대로 황태자를 외면했다. 하지만,

“가희야…….”

치오의 목소리가 그녀의 심장으로 날아와 꽂혔다. 불현듯 치켜든 그녀의 시선 안에 외롭게 흔들리고 있는 가엾은 황태자의 모습이 보였다. 가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아, 이래선 안 되었다. 그도, 나도, 이렇게 아프게 흔들려서는 안 되었다.

“가희야…….”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 뿐,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그녀를 치오가 다시 불렀다. 마치 이렇게 그녀를 불러 아무 데도 가지 못하게 붙잡으려는 사람처럼 치오는 한숨처럼 그녀의 이름을 흩뿌리고 있었다.

“정녕…… 끝까지 모른 척할 테냐?”

할매, 나는 이제 정말 어쩌란 말이오. 무섭고 두려워서 저토록 애타게 나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도 아무런 대답조차 하지 못하겠는데. 죽을 것처럼 서러워질까 봐 내 이름을 처연히 부르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겠는데 말이오.

“이래도 모른 척하고 말테냐?”

모든 것은 그렇게 순식간에 일어났다. 고통으로 억- 하는 소리를 낼 정도로 자신을 거칠게 끌어안는 황태자를 차마 밀어내지도 못한 것은. 마치 기다려 왔던 사람처럼 속절없이 그 넓은 가슴에 파묻혀 제 입술만 깨물고 만 것은. 잠시나마 자신의 신분을 까맣게 망각하고 말 정도로 모든 것을 놓았다고 생각한 것은 그렇게 모두 순식간이었다.

“나를 탓해라. 내가 신녀인 너를 끌어안아 더럽혔다고 나를 탓해라.”

“전하…….”

“나는 너를 탓할 것이다. 나를 이토록 끊임없이 흔들어 괴롭히는 너를 탓할 것이다.”

격하게 날뛰는 치오의 심장 소리가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밀어내야 했지만 자신을 단단히 옭아매고 있는 그의 팔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황태자가 이럴 수는 없다고 그를 야단쳐야 했지만 하늘의 노여움을 사더라도 지금은 그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심장이 튀어 올라와 목을 누르고 있는 것이리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는 것을 보니. 손가락 끝으로 온갖 기운이 다 빠져나가 그런 것이리라. 자신을 짓누르는 그의 힘에 속수무책 압도당해 그를 밀어내지조차 못하는 것은. 그래서…… 그래서 그랬을 것이다.

[목차]

1권

01~07

2권

08~14

3권

1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