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그 사람한테만큼은, 내가 제일이었으면 좋겠어.”

화사하고 청초한 소녀, 리즈벳.

살아남기 위해, 공포를 견디기 위해

신이 되어버린 남자에게 손을 뻗었다.

차디찬 그에게 닿은 손이

슬프고 아련하였다.

처절하게 외로운 그가 안쓰러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나중에 나는 누군가와 사랑을 하게 될까?

그저 눈앞이 너무 캄캄해서,

발밑이 단단하게 느껴졌던 적이 한 번도 없어서

누군가에게 매달리고 싶었다.

누군가가 제 닻이 되어주기를 바랐다.

언젠가부터 잊어버리고 있던 감정.

그 감정.

2. 작가 소개

박소연

Mstream/솔라르.

한길만 가는 한 마리 소가 되어 오늘도 열심히 스스로 우물을 팝니다.

3. 차례

##Part II - Adolescence

#Season 7. Summer – Confession

#Intermission

#Season 8. Fall - Strain

#Intermission

#Season 9. Winter – Break

##Reminiscence II. For Seasons Yet to Come

4. 미리 보기

아모르, 바르카스트, 라 트레디앙과 살바티아의 한 세트를 쉼 없이 추고 윈터는 리즈벳의 손을 끌어 발코니로 나섰다. 본관으로 이어지는 문을 닫아걸고 커튼을 치자 안에서 들리는 소음이 칼로 내리친 듯 잘려나갔다. 드리운 적막 속, 무도회의 음악과 벌레들의 울음소리만이 여상스레 들려왔다.

밤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오자 그의 팔 위에 얹었던 손을 뗀 리즈벳이 크게 기지개를 켰다.

“와, 시원하다…….”

툭, 혼잣말처럼 내뱉은 탄성 후 그녀는 새삼스레 달빛이 떨어지고 있는 밤의 정원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마지막으로 춘 살바티아는 8분의6박자의 빠른 춤곡이었기에, 익숙지 못한 스텝을 따라가느라 땀을 흘린 그녀의 양볼은 달빛 아래에서도 보일 만큼 바알갛게 상기되었다. 윈터는 그 옆모습을 홀리듯이 바라보았다. 웨이브 진 머리칼을 틀어 올려 고정한 헤어핀과 훤히 드러난 목덜미를 장식한 목걸이, 그리고 밀려왔다 하얗게 부서져 내리는 파도를 모티프로 한 드레스 자락에 장식된 다이아가 손짓 하나하나에 따라 오색으로 빛나며 반짝였다. 마치 아이가 빛무리에 휩싸인 듯했다.

비현실적이었다. 꽃잎에 내려앉은 밤이슬마냥 이 밤이 지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사락, 아이가 몸을 돌려 그를 바로 마주하자 드레스 자락이 흔들리며 다리를 어루만지듯 감았다 떨어져 내렸다.

“안 올 줄 알았어요.”

오지 말아야 할까,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했다.

“기대에 부응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만 공교롭게도 그럴 기분은 들지 않아서.”

숨기는 것에 익숙해진 몸은 태연히도 속내를 감춘다. 인생의 반 이상을 감정에 종속되지 않은 채로 보내왔던 몸은 평범한 이들이 보일 감정에 따른 변화조차 없다. 그는 아이의 손을 잡을 때 떨지도, 체향을 맡았을 때 숨을 멈추지도, 웃음을 봤을 때 심장이 엇박을 치지도 않는다.

그저, 계속해서 멍하니 자문을 반복할 뿐이다.

이것이 정말 현실인가.

[죽을 각오로 감히 각하께 올립니다.]

저절로, 단 한 번밖에 면식이 없던 소년이 오늘 보내왔던 편지가 떠올랐다.

[어째서 각하보다 먼저 영애를 만나지 못했나 원망했었습니다. 제가 만났을 때에는 이미 영애의 마음은 각하께로 완전히 기울어 있었고, 때를 놓친 저는 마음을 전한다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편지를 가져온 충실한 하인은 그가 편지를 읽기 전에는 돌아갈 수 없다며 감히 제 앞에서 드러누웠다.

[그러나 만일 각하께서 영애의 마음을 거절하신다면 기회가 제게도 다시 찾아오겠지요. 그때가 되면 망설임 없이 마음을 전하고자 하니 허락하여주십시오.]

깜찍한 꼬마.

스스로도 감히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불쾌해하면서도 동시에 그 용기를 동경했다. 그러나 이 아이야말로 리즈벳에게 모자라지 않으리라 생각하면서도 납득하려 하지 않았다.

눈앞의 꿈결같이 아름다운 소녀를 바라보자 저도 모르게 아찔해져 그는 꽉 눈을 감았다 떴다.

“마지막으로 묻지, 리즈벳 클렌디온. 이번이 마지막 기회이니 잘 생각하고 대답해.”

내뱉는 목소리가 미미하게 갈라졌다. 말끄트머리의 떨림은 눈치챘을까? 윈터는 필사적으로 평생에 걸쳐 제련해온 태연함을 가장해 리즈벳과 눈을 마주쳤다.

“내가 인스켈 황제에게 더 이상 복속되는 것을 거부했기에 안드로베카는 날 찾고 있다. 지금까지 들키지 않은 것은 사실상 기적이지. 재산이 많다 해도 마음대로 쓰지 못하고,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몇 번이나 옮겨다녀야 할지도 몰라. 나는 다른 이들 앞에 쉬이 모습을 드러내지 못할 것이고 네가 필요할 때 앞에 나서 널 지지해주지 못할지도 몰라.”

한번 털어놓기 시작한 속내는 마치 둑이 무너져 내리듯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사실 얼굴을 가렸다고는 하나 이번의 무도회 참가도 본래라면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가 성장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훨씬 더 일찍 거처를 들켰을지도 모른다.

제가 협력을 거부했으니 이제 여황은 리즈벳을 이용해 그를 조종하려 들 것이다.

“또한, 네가 나를 택한다는 것은 내 적들의 표적이 된다는 것이고, 내 적들의 적이 된다는 거다. 나조차도 수도, 정체도 다 알지 못하는 그들은 나와 깊이 관여했다는 것만으로도 널 증오하며 해하려 들 거다. 날 공격하는 방법으로 너를 짓밟고, 모욕하고, 갖은 방법으로 상처 입힌 후 죽이려 들 거야.”

윈터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중에는 네 오라비도 있을 거다.”

처음으로 아이의 눈동자에 동요가 번졌다. 꾹, 저도 모르게 치맛자락을 쥐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 윈터는 이를 갈며 시선을 떨구었다. 마치 보고를 하듯, 요구를 강제하듯 일부러 딱딱하게 내뱉던 어조가 저도 모르게 부드러워졌다.

“그게 정말 네가 감당할 가치가 있는 것인지 잘 판단하렴, 영특한 리즈벳. 이 선택으로 잃어야 할 것들, 감수해야 할 것들이 정말 시간이 지나서도 가치가 있을지. 네가 만약 지금이라도 마음을 접는다면 우리의 관계는 예전으로 돌아갈 거다. 나는 여전히 네 후견인일 것이고, 네가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을 응원하며 원조할 거야. 영원토록, 이 끝나지 않는 삶의 끝까지 나는 네가 필요할 때면 곁에 있을 거다. 그러나 만일, 네가 이 모든 것을 감수하고라도 나를 택한다면.”

두근, 크게 심장이 뛰었다. 눈앞이 울렁일 것만 같은 긴장에 입안이 바싹 말랐다.

“죽여! 죽여버려! 박살을 내!”

귓가에서 끈질기게 맴도는 죽은 조카의 저주를 애써 무시하며 윈터는 이젠 딱딱하게 굳어 있는 소녀의 눈을 정면으로 직시했다.

“나는, 결코 너를 놓지 않을 거다.”

폐부에서 스멀거리며 솟아오른 열기가 목구멍을 채우고 입안을 바짝 말렸다. 지금까지 존재조차 잊고 있었던 심장이 세차게 뛰며 존재를 증명한다. 안개 같았던 개념이 말로 하여 입 밖으로 낸 순간 순식간에 형태를 갖춰 옭아맨다.

철컥, 제 목에 채워진 단단한 족쇄를 느꼈다.

“내가 빼앗아갈 네 자유, 미래, 가능성 대신에 끝없이 이어지는 내 시간을 주마. 내 긴긴 시간 속에서 내 봄은 오로지 네가 될 거다. 내 모든 행위, 의도, 꿈은 너를 위한 것이 되리라. 내게 남아 있는 그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을 네게 주마.”

다가가는 대신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윈터는 소녀를 한눈에 담았다. 눈, 콧날, 입술, 턱에서 목을 지나 어깨로 떨어지는 선, 날씬한 허리와 손가락, 이마 위로 떨어져 내린 머리카락과 손톱, 소녀의 그 모든 것을.

시선이 다시 아이의 선명한 연녹빛 눈과 마주치자 그는 북받치는 감정에 파르르 떨리는 눈을 감았다.

“그러니 다시 한 번 택하렴, 나의 리즈. 지금의, 그리고 미래의 네가 행복하리라 여겨지는 선택을 해.”

그렇게 말을 하면서 윈터는 재차 깨달았다.

지금 그가 했던 모든 말들, 모든 약속들, 모든 맹세들.

그 모든 일을 해줄 자격을 얻을 수 있기를 제가 얼마나 간절히 바라는지…….

“비겁하네요, 윈터. 또 나더러 선택하라는 거예요?”

잠시간의 침묵 후, 소녀가 해사하게 웃었다.

“지금 당신이 무슨 말을 늘어놔도 그걸로 마음을 바꿀 정도의 각오로 한 선택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것만 말해요, 윈터.”

사박, 크게 한 걸음을 내딛어 순식간에 그녀가 거리를 좁혔다. 고개를 숙이면 바로 코끝이 닿을 거리까지 다가온 리즈벳이 꽉, 힘을 주어 그의 팔을 잡았다. 연녹색 눈동자에서 춤추듯 정열적인 빛이 흔들렸다.

“날 원해요?”

발꿈치를 들어 귓가에 속삭인다.

“……아아, 그래.”

등골을 따라 전류가 흐르는 감각에 눈앞이 새하얗게 점멸했다. 지금까지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던 두려움, 망설임, 죄책감이 몽땅 화르륵 불 질러져 사라졌다. 홱 소녀의 어깨를 잡아챈 윈터는 다른 손으로 그녀의 뒷목을 끌어들여 단번에 입을 맞췄다.

아아 하는 작은 탄성과 함께 품 안의 몸이 유연하게 휘었다. 입술에 몇 번이나 각도를 바꿔 키스를 떨어트린 후 아랫입술을 빨아들이며 표면을 핥자 리즈벳이 전율하며 목에 매달려왔다. 어디를 잡아야 할지, 뭘 해야 할지 몰라 더듬거리던 손이 목을 꼭 안아오자 윈터의 입술 사이로 떨리는 한숨이 터져 나왔다.

선악과는 끔찍하게 달았다. 한번 취하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저를 제지하고 있던 모든 굴레들을 벗어던지고 그는 정신없이 과실을 베어 물었다. 탐하면 탐할수록 터질 듯이 흘러나오는 달콤함에 머리가 아찔해졌다.

차르륵, 쇠사슬이 몸을 감았다. 사지를 휘감고 가슴을 옥죄어 그를 구속해 무릎을 꿇렸다.

기나긴, 해갈하는 듯한 입맞춤 후 윈터는 리즈벳의 왼손을 잡은 채 무너지듯 무릎을 꿇었다.

“그대의 고통과 슬픔을 받게 하소서.”

심장에서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터져 나와 온몸을 잠식했다. 지금까지 인스켈의 기사들은 이런 심정으로 언약을 맺었던 것인가.

“나의 기쁨과 영광을 드리옵니다. 영원의 마지막 날까지 곁에 머물기를 청하오니 부디 허락하소서.”

마지막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윈터는 잡았던 소녀의 왼손에 입을 맞췄다.

입술을 떼지 않은 채 시선을 올리자 그를 내려다보던 눈동자와 마주쳤다.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열기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리즈벳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한 번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허합니다.”

“이스켈리안 잘리어.”

가볍게 잡았던 손에 꽉 힘을 주어 움켜쥔 윈터가 몸을 일으켰다.

“이스켈이라 불러라, 사랑스러운 리즈벳. 그것이 이제 너만이 알고 있는, 내 잊힌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