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7년, 런던

「너와 결혼해달라고? 꼬마 요정?」
울프 론트리는 그녀를 안고 무도회장을 빙글빙글 돌면서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농담은 하는 게 아냐. 혼혈인 야생마 사냥꾼이 영국 귀부인과 어울린다고 생각해?」
「난 영국인이 아니라 스코틀랜드인이에요.」
제시카 챠트리스는 반사적으로 그의 말을 정정했다.
「알아.」
오래 전 길게 땋아 늘어뜨린 제시카의 붉은 머리채를 잡아당기며 장난을 치던 그때처럼 울프는 미소를 지었다.
「넌 여전히 배고픈 송어처럼 그렇게 덥석 미끼를 무는구나.」
화려하게 꾸민 외모 아래 절박함과 두려움을 숨기면서 제시카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울프를 향해 밝은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완벽한 결혼이 될 거예요.」
그녀는 그를 달래보았다.
「당신은 넘겨주어야 할 작위나 영지가 없으니까 상속자가 필요 없잖아요. 나 또한 돈이나 결혼에 대한 환상은 없거든요. 우리 둘 다 침묵을 즐기는 편이고, 말도 잘 통하잖아요. 아니면 함께 말을 타고 사냥을 나가거나 난로 앞에 앉아 책을 읽을 수도 있을 거구요. 결혼생활이라는 게, 그 외에 또 뭐가 필요하겠어요?」
울프가 재미있다는 듯이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자, 제시카의 스무 번째 생일을 빛내주기 위해 참석한 몇몇 귀족들과 숙녀들은 그들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울프는 이제까지 귀족들의 시선이나 사교 모임 따위는 무시하고 살아왔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자작의 야만인 아들’이라 부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이미 수년 전 자신의 삶의 터전은 비합법적인 출생과 작위에 대한 냉대가 흐르는 영국이 아니라 자유롭고 거친 미국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결혼이라…….」
그 말을 되풀이하면서 울프는 머리를 흔들었다. 태양빛도 무색하리만큼 밝은 빨강머리의 요정과 함께 춤추는 것은 그를 즐겁게 했다.
「꼬마 요정? 난 너의 그 성급한 행동과 말썽이 너무나 그리웠단다. 이곳을 떠나, 너 없이 지낸 몇 년 동안 거의 웃을 일이 없었던 것 같아. 내가 듣기로는 로버트 경이 다음 사냥 여행에는 널 데려가겠다고 하셨다면서? 미래의 신랑감이 운동선수인가 보지? 고어 경이라 했던가? 아직 네 약혼자를 만나보지 못했는데…… 혹시 이 자리에 와 있니?」
순간, 멈칫하며 제시카는 자연스럽게 흘러가던 왈츠의 스텝을 그만 놓치고 말았다. 울프는 그녀를 붙잡고 항상 그랬듯이 유연한 동작으로 몸을 바로 잡아주었다.
「미안! 오늘밤에는 영 서투른데…….」
그가 중얼거렸다.
「당신은 마치 커다란 검은 고양이 같아요. 내가 틀렸다는 걸 잘 알고 있잖아요. 내가 실수한 거예요, 당신이 아니라.」
제시카는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울프는 그녀의 눈부신 표정 안에 숨겨진 뭔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해냈다. 그는 왈츠를 추는 내내 어두운 눈동자로 그녀를 살펴보았다. 솔직히 그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차가운 푸른 눈동자에 불타는 듯한 빨강머리를 지닌 그리고 웃음을 참지 못하고 시도 때도 없이 웃던 빼빼 마른 꼬마는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이제껏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불편한 감정들을 적나라하게 불러일으키는 아름답고 고집스러운 숙녀가 서 있었다.
「요정이 서투르다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마치 혼혈인 사생아와 레이디 제시카 챠트리스의 결혼처럼 말이야.」
그는 어두운 피부에 대조되어 새하얗게 보이는 이빨을 드러내면서 씩 미소를 지었다.
「도대체 네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어 있는 거니? 하여간 그 재치는 칭찬해줘야 한다니까.」
다시금 제시카는 발을 헛디디며 비틀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함께 왈츠를 추고 있던 강인한 남성의 팔을 움켜쥐고 자연스럽게 균형을 잡을 수있었다. 이런 무도회장이 아니라도 울프의 힘은 늘 영향력을 발휘해왔다.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던 지난 수년 동안, 그녀는 그의 힘과 능력을 자신의 피난처로 삼아왔었다. 그녀는 늘 추억 속에서 살아온 셈이었다. 그녀가 아는 한, 지구상에서 그녀의 피난처가 되어줄 곳은 단 한 군데뿐이었다. 제시카는 후견인이 고어 경과 결혼하라고 강요할 때마다 자신에게 밀어닥치는 공포를 그 믿음 하나로 극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피난처가 더 이상 쓸모 있어 보이지 않았다. 이제 제시카는 살아남기 위해 혼자 싸워야 하는 것이다. 혼자서…….
‘주님, 이제 전 뭘 해야 하죠? 울프는 저와의 결혼에 동의를 해야만 한다구요. 어떻게 하면 그를 확신시킬 수 있을까요?’
「손가락이 무척 차갑구나, 제시.」
울프는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떨고 있잖니. 어디 아픈 거야?」
걱정이 가득 담긴 울프의 표정과 목소리에 제시카는 다시 한 번 희망을 품었다. 그는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제시카는 검정색도 푸른색도 아닌, 황혼 무렵의 어둠과도 같고 촛불에 흔들리는 사파이어와 같은 묘한 색을 띤 울프의 눈동자 속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제시카는 자신의 섬세한 얼굴 위로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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