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사라지기 전, 제시카와 루카스가 만난 것은 겨우 두어 번에 불과했다. 그것도 아무 생각 없이 잠깐 만난 것이었고 서로에 대해서도 그리 호감을 갖지 않은 편이었다.
“네 생각은 어떠냐? 루카스, 넌 연출가야. 그리고 제시카는 여배우지. 너도 잘 알고 있다시피 이 세상에서 가장 재기가 뛰어난 여배우들 중의 하나란다. 내가 은퇴를 하면 그녀는 내 자리를 물려받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겠지. 그녀는 눈부시게 아름답고, 비록 손녀뻘 되는 어린 나이지만 나의 가장 친한 친구들 가운데 한 사람이야. 그런데 넌 그녀를 좋아하지 않을 뿐더러 잘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 같더구나. 지난밤에 너희 두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지?”
콘스탄스가 다그쳤다.
“연극에 관해서죠. 무대 위에서 할머니와 그녀가 함께 얼마나 멋지게 일을 해냈는지에 대해서 말했어요. 개막 파티 날에 항상 올라오는 화제잖아요.”
“항상 올라오는 화제라고? 루카스, 네게는 화젯거리가 무궁무진해! 넌 연극 세계에서 사는 사람이고, 그녀는 마음씨가 따뜻하고 총명하며 모든 것에 대해 흥미를…….”
“그녀에게 흥미 있는 대상은 자기 자신뿐이에요.”
자신의 목소리가 참을성 없이 들린다는 것을 알아차린 그는 부드럽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개막 첫날밤은 여유 있는 대화를 나눌 만한 분위기가 아니에요. 할머니도 잘 아시잖아요. 어제는 그녀의 날이었어요. 그리고 할머니의 날이었죠. 또한 승리의 날이에요. 모든 사람들이 두 사람과 말을 나누고 싶어했어요. 그녀는 나에게 흥미가 없고 나도 마찬가지예요. 물론 무대 위는 예외죠. 내가 그녀를 내 연극에 출연시키기 위해 그녀의 에이전트에게 얼마나 여러 번 전화를 했는지 아세요? 그녀는 항상 바빴고 그게 아니면 런던에 가 있었어요. 그녀는 그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더군요.”
“그녀는 런던을 좋아하고 그곳 사람들도 그녀를 좋아해. 오, 루카스, 난 말이다…….”
콘스탄스는 그의 얼굴에 손을 대더니 한참 만에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난밤에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니?”
“클라우디아 때문이라는 뜻이군요. 그녀와는 아무 상관 없어요.”
마음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나는 성급함 때문에 입 속의 단어들이 퉁명스럽게 튀어나왔다. 그는 분노를 가리기 위해 할머니의 손을 감싸 쥐고 볼에 입을 맞추었다.
“할머니가 내 사생활에 신경을 쓰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더 행복해질 거예요.”
“글쎄, 넌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가 더 행복할 이유는 없는 것 같구나.”
그들은 함께 웃었다. 거의 대부분, 그들이 서로 반대되는 의견을 내놓은 다음에는 그렇게 마무리 짓고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몇 년 동안 콘스탄스는 루카스와 제시카를 맺어 주기 위해 몇 번의 시도를 해 보았으나 빽빽이 짜여진 그들의 스케줄이 방해를 하는데다 그녀가 희망을 가질 만큼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콘스탄스는 세상을 떠났다. 루카스는 할머니가 살던 집을 정리하기 위해 이태리로 왔다가 이상하고도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제시카와 다시 대면하게 되었다.
쾌적한 콘스탄스의 서재에 들어간 루카스는 그녀가 잠자면서 숨을 거둔 벨벳 등받이의자에 앉아 삶의 마지막 시간에 그녀의 몸이 닿았던 모든 물건들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다마스코 천으로 덮인 둥근 테이블, 마개 있는 유리병과 와인이 담겨 있던 잔, 은박 테두리 액자들에는 그가 처음 그녀와 살려고 왔던 일곱 살 때의 모습, 고등학교와 대학생 시절, 그가 처음으로 연극의 연출을 맡았을 때, 그리고 <황무지>의 연출로 처음 토니상을 수상하고 축하 파티 때 찍은 사진들이 함께 들어 있었다. 콘스탄스의 손에서 가장 가까이 있던 것은 금과 호박이 정교한 솜씨로 박히고 부드러운 검은 광택이 흐르는 이태리제 상자였다. 안에는 수백 통의 편지들이 서로서로 몸을 부대낀 채 빼곡히 들어 있었는데, 제일 앞에 있는 것이 가장 오래 된 것처럼 보였다. 말뚝 울타리를 긴 막대기로 훑으며 지나가는 것처럼 루카스의 손가락이 그 위를 따라 움직였다. 모두 같은 사람의 필적이었다. 그는 무작위로 한 장을 뽑아 펼쳐 들었다.

친애하는, 친애하는 콘스탄스. 지난밤에 당신이 내게 주신 멋지고 따스하며 아낌없는 용기에 다시 감사드려요(만약 다른 방법들이 있다면 다시, 또다시 그리고 다시 한 번 감사드렸을 거예요!). 나에게 페기의 역을 잘해 냈다고 말해 주셨을 때, 내 자신이 진짜 배우이며 나머지 생애도 그렇게 살아가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고, 그것은 바로 콘스탄스 번할트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랍니다. 물론, 그 연극은 모두 당신의 것이었으며 그 누구도 나를 보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내게 있어서 무대에 함께 있는 사람이 바로 당신뿐이라는 의미이기도 해요. 엄마는 휴양지에서 하계에 열리는 연극 공연을 하기에 열여섯 살의 나이가 너무 어리다고 했지만, 난 하고 싶었어요. 오, 내가 해냈다는 것이 너무나 기뻐요! 고마워요, 또 한 번 고마워요! 영원한 사랑을 드리며, 제시카.

제시카, 루카스는 생각했다. 처음 자신의 일에 발을 들여놓고 잔뜩 흥분에 젖어 있는 어린 제시카 폰테인이었다. 편지 윗부분에 씌어진 날짜를 흘끔 보았다. 이십사 년 전이니 지금 그녀는 마흔 살일 테지. 그녀는 그 동안 줄곧 편지를 썼고, 그것은 그의 할머니 역시 계속 편지를 썼다는 뜻이다. 기나긴 우정, 하지만 콘스탄스가 그 말을 입에 올린 일은 거의 없었다.
그는 손 가는 대로 편지 하나를 뽑아 펼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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