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중에서-

차라랑―
그의 갑작스런 손길에 의해 그녀의 머리에 씌워져 있던 화관과 너울을 잇는 장신구가 찰랑이는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그리고 돌려 세워진 그녀에게서 청량하면서도 은은한 향기가 전해져 왔다. 그 향기를 음미하며, 서휴는 천천히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너울을 걷어 올렸다.
맨 먼저, 갸름한 얼굴선에 수려한 곡선을 그리는 붉은 입술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불빛을 받은 숱 많은 속눈썹이 그녀의 양 볼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가운데, 그가 익히 알고 있고 좀 전까지 그의 머릿속을 온통 꽉 채우고 있던 어느 누군가와 너무나도 닮은 얼굴이 거기 있었다.
‘……!’
벅차오르는 희열이 저 발끝으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온전히 확인을 마치기 전까지는 그 희열을 좀 더 묶어둘 필요가 있었다. 저 아름다운 얼굴보다 그가 더욱 보고 싶고 확인하고 싶은 것은, 잊을 수 없는 은 공자의 청량하도록 맑은 신비한 두 눈동자였다. 과연, 내리뜬 저 눈을 들어 올리면 그가 그토록 보기를 열망했던 신비의 은안이 자리해 있을 것인가?
“눈을 들어 나를 보시오.”
그의 나직한 음성이 실 안의 고요를 깨뜨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내리뜬 눈을 들어 올리지 않은 채 그 모습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고 서있었다. 허나, 그는 그녀를 재촉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머리에 씌워진 화관과 너울을 조심스레 벗겨낼 뿐이었다. 그러자 너울 사이로 가려졌던 반짝이는 은발이 그의 시야를 가득 채워가기 시작했다.
‘은발이라니……. 역시 그로구나!’
예상하긴 했었지만, 벅차오르는 놀라움과 기쁨은 형언할 수가 없었다. 그가 여인이라니, 그건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그 놀라움도 잠시였다. 그녀가 눈을 들어 그를 똑바로 바라보자, 순간 서휴는 숨이 멎는 듯했다.
투명한 은색 눈동자였다. 그가 그토록 다시 보기를 열망했던 청명한 은색 눈동자가 지금 그의 눈을 조용히 직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은색 눈동자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신비함이 있었다.
‘그 신비함에 취해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 느껴질 정도로…….’
그 사실을 깨닫자,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뜨거운 환희가 물결쳐 올라왔다.
그리고 어느새 손을 뻗어 가만히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는 그였다. 마치 그녀가 환상처럼 사라져버릴 듯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그의 품에 안긴 그녀의 존재가 확실시되자, 서휴는 그녀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어 꼬옥 끌어안았다.
‘그다! 허나, 그는 사내가 아닌 여인이다. 내 품에 이리 쏘옥 안길 듯 여린 어깨를 지닌 분명한 여인인 것이다!’
서휴는 그녀가 환상이 아닌 실체라는 사실에 도저히 희열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녀를 끌어안은 팔 가득 힘을 주어 그녀의 실체를 오롯이 그의 품에 가두었다.
“그대의 은안을 결코 잊을 수가 없었소.”
“…….”
“그대가 여인이라니, 지금 어떠한 말로도 내 심정을 표현하지 못할 것이오.”
“…….”
여전히 그녀로부터는 어떠한 말도, 어떠한 반응도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족했다. 자신의 품속에 그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강인한 심장이 세차게 고동을 치고 있었다.
“언제나 나를 밀어내려고만 하던 그대이지만, 내 그동안 그대로 인해 열병을 앓았다오. 벗으로라도 그대를 내 곁에 두기 위해 출궁할 계획까지 모두 세워두었던 나요. 헌데, 그대가 이리 여인의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나다니…….”
그의 너무나도 솔직한 고백에, 수려는 더 이상 침묵으로 일관할 수 없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를 사내로 알지 않으셨습니까? 헌데, 열병이라니요.”
드디어 그녀의 입이 열리면서 그녀 특유의 낮은 음성이 흘러나와 서휴의 귓가를 간질이자, 그가 품에 안고 있던 그녀와의 사이를 벌리며 그녀의 고요하고도 맑은 은안을 마주하였다.
“후훗, 그러게나 말이오. 여인도 아닌 사내에게 연정 같은 감정이라니…….”
그의 입가에 걸린 부드러운 곡선이 사내다운 그의 얼굴을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였다.
“허나, 남녀를 떠나 그대 존재 자체가 내겐 소유하고픈 열병의 대상이었소. 내 생애 처음 누군가를 곁에 두고 싶다, 그리 간절히 열망했었소.”
이게 그의 본 모습일 것이다. 현재 그는 한 톨 거짓도 없는 솔직한 마음을 그녀에게 표현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가식도 위엄도 한 점 없는 그의 이런 모습은 그저 연정을 품은 한 사내일 뿐이었다. 그녀의 앞에서만은 분명.
“헌데, 그대는 참으로 나를 내치려 하였었지. 이젠 그 의문을 풀어야겠소. 어찌하여 그리 나를 거부한 것이었소?”
예진국에 머물 당시, 객잔의 별채에 여러 번 찾아갔던 그에게 번번이 축객령을 내리고 짧은 만남 뒤 아무런 말없이 떠나버린 연유를 묻고 있는 것이었다.
“폐하께서는 제 도움이 필요한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저여성이나 하명처럼 그녀의 도움이 꼭 필요한 이가 아니라면, 굳이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연을 맺을 필요성이 없었다. 속 편히 유람을 나온 것이 아닌 만큼, 서한에 도착하기 전까지 그녀의 존재는 가능하면 세상에 드러나지 말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허면, 그대의 도움이 필요한 자는 그대 곁에 머물 수 있는 것이오?”
서휴가 보고받은 바에 의하면, 가란에서부터 그녀의 호위를 맡았던 호위대 외 그녀의 시중을 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헌데, 유일하게 이곳 서한의 황궁에 남은 이가 한 명 있다 하였다.
‘날카로운 눈매가 범상치 않다던 자…….’
보고받을 당시엔 별 신경 쓰지 않던 사실이었으나, 그녀로부터 저러한 말을 듣게 되자 문득 그 보고가 그의 뇌리를 스치며 이처럼 그의 심기를 은연중에 건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을 알고 싶으신 겁니까, 폐하?”
만개하던 그의 감정이 잠시지간 굳어지고, 부드럽던 그의 미소가 조용히 사라졌다.
그가 하명을 두고 하는 말임을 눈치 채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의 태도가 갑작스레 일변(一變)한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수려였다. 무엇이 그의 심기를 불편케 하는 것일까?
“호위라는 명목 하에 남은 자, 그대에게 그는 어떤 존재인 것이오?”
그가 이리 한 점 꾸밈없이 솔직하게 질문을 하자, 그녀 또한 솔직하게 화답하였다.
“제가 책임지고 지켜줘야 할 존재입니다.”
그녀의 답이 의외였음일까? 그의 눈썹이 살짝 들렸다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호위가 아니었소? 헌데, 그가 아니라 그대가 그를 지켜줘야 한다니. 그게 무슨 의미요?”
“그에게 빚이 있습니다. 허니, 제가 책임을 져야 함이 마땅합니다.”
목숨 빚은 그 어떠한 빚과도 다른 무게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그녀의 말에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긴 했지만, 물러날 때를 아는 그였기에 더 이상의 추궁을 멈추었다. 이 이상 추궁하다가는 그의 투기 어린 마음이 드러날까 저어되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자신의 그런 마음에 새삼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연심(戀心)과 투기(妬忌)라니……. 내게는 해당 사항이 없을 것만 같던 이런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여인이 실제로 존재하게 될 줄이야…….’
그리고 그녀를 온전히 저만이 소유하고 싶은 지독한 소유욕 또한 그에겐 매우 생소한 것이었다. 허나, 그처럼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대면하고 나니 서휴는 오히려 차분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이제 서휴 자신의 여인이니, 그가 초조해하거나 불안해할 이유는 없었다.
하여, 그녀의 머리를 장식한 갖가지 비녀와 장신구를 떼어내고 그녀의 화려한 예복을 하나하나 벗겨나가는 그의 손길은 한없이 부드럽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그녀의 예복을 한 겹 한 겹 벗겨가는 그의 손길에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기대감 또한 그만큼 배가 되어 동반되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속이 비치는 얇은 속곳만이 남은 그녀의 모습은 가히 그의 눈길과 심장을 뒤흔들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오히려 그 이상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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