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붓아버지의 노름빚으로 늙은 공작의 첩이 되어 혼례를 올리러 가게 된 아미.
이미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 운명에 수긍하려 자신을 오랫동안 지켜 온 수혁과 함께 배 위에 오른다. 그리고 그녀는 항해 도중 해적 풍해단의 우두머리 이잔을 만나게 된다.
그녀를 보고 한눈에 마음에 든 그는 결국 혼례를 올리러 가던 그녀를 그 길로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 풍해국으로 데려가는데.


<본문 중에서>


이잔이 방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
비단옷은 비를 맞은 듯 축축해 있었다. 날카롭게 눈빛을 빛내는 이잔의 시선이 옷장에서 멈추었다. 부하 중 한명이 금을 담은 자루를 추스르며 이잔에게 웃어보였다.
"이 방에 있는 건 다 털었습니다. 나가시죠."
“…….”
부하의 말에 이잔이 곧 삐딱하게 고개를 꺾으며 의심에 찬 눈으로 옷장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리고는 낮은 목소리로 그들에게 말을 던진다.
“저 옷장은 열어봤나?”
이잔의 말에 부하들이 곧 고개를 저었다. 이잔이 이내 옷장 앞으로 좀 더 가까이 다가서며 그들에게 명령했다.
“열어봐.”
“!”
그의 말에 아미가 비명이 나오기 직전에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짧은 순간에 수많은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오갔다.
뛰쳐나가야하나? 아니야. 오히려 반항하는 것처럼 보여 더 위험 할 수도 있어. 어떻게 하지? 아아…… 어쩜 좋아!
뚜벅뚜벅- 두세 명의 발자국 소리가 점점 옷장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제발!
그들의 손끝이 옷장 손잡이에 닿는 미세한 소리가 아미의 두 귀로 커다랗게 들려왔다.
안 돼!
덜컹- 낡은 나무로 만든 잘 열리지 않는 옷장이 작은 소음을 내며 열렸다.
“!”
순간 문을 연 부하들도, 이잔도 모두 놀란 눈으로 옷장 안을 바라봤다. 한사람이 들어가기에도 조금은 버거워 보이는 공간에 사람이 숨어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에 놀랐다기 보다는……
아미는 질끈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며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그리고는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흑갈빛 머리의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붉은 입술을 꾸욱 깨문 그녀가 불안한 듯 어깨를 떨었다. 하지만 그 눈빛은 절대로 이잔의 시선을 비켜가긴 커녕 오히려 당당하게 치켜 뜰 뿐이었다. 한동안 이잔은 그런 아미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
결 좋은 까만빛 머리카락이 비를 맞아 그녀의 얼굴 여기저기에 엉겨있었다. 그리고 까맣게 빛나는 도전적인 눈빛과 여성스러운 콧날, 꾸욱 깨물듯 다물고 있는 매혹적인 붉은 입술. 하얀 면사 속옷은 그녀의 여린 몸을 비출 듯 가려주고 있었다.
“후후…….”
아미를 바라보던 이잔이 갑작스레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뜬금없는 이잔의 웃음소리에 아미를 바라보던 부하들이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미 또한 당황한 듯 그제야 두 눈을 깜빡이며 얼굴을 붉혔다. 이잔은 속옷을 입고 있는 것이 불편한지 몸을 더욱더 웅크리는 아미를 바라보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는 마치 재미난 것을 발견한 듯 들뜬 목소리로 툭, 한마디 내뱉었다.
“보물 발견.”
.
.
.
아미의 목소리를 가만히 감상하듯 듣고 있던 이잔의 시선이 아미의 이마로 향했다.
“붉은 꽃잎문양…… 곧 혼례를 앞둔 몸이군.”
“…….”
자신이 곧 처하게 될 뻔 한 처지를 알려주는 이마 한가운데에 그려져 있는 문양을 이잔이 눈빛으로 가리켰다. 자신의 말에 아무 대답 없는 아미를 잠시 바라보던 이잔이 곧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려 그녀의 이마로 가져갔다. 그의 손길이 자신의 얼굴로 가까이 다가오자 흠칫 놀란 아미가 한 발걸음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자신을 양쪽에 붙잡고 있는 남자들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잔의 엄지손가락이 어느새 아미의 이마로 향하고, 빗물에도 희미하게 남아있던 그 빨간 꽃잎문양을 사정없이 슥삭슥삭 지워 버리는 것이 아닌가. 마치 이잔의 손가락이 그녀의 이마 위에 꽃잎문양을 지우는 것이 무슨 의식이라도 되는 듯, 그의 뒤에 서있던 부하들도 그리고 아미 자신도 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다. 잠시 후- 이잔의 손에 의해 지워져버린 꽃잎문양은, 이제 그 형체는 사라지고 불그스름한 자국만을 희미하게 남겨버리고 말았다.
“네 혼삿길은 막혔다.”
“!”
낮은 목소리.
“넌 이제 내 소유니까.”
“무슨…….”
“내 선실 안으로 데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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