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물론 아가씨는 나름 귀여운 분이야. 착하고, 아마 배려심도 깊을 거야. 다만 아름답지는 않지. 나는 아름다운 사람을 사랑한다네. 내 취향은 확고해. 그러니 절대 추문 따위는 생기지 않아.”

조선팔도 감사 중 제일가는 평안감사. 평안감사가 되기 위해 게으른 내가 얼마나 많은 피땀을 흘렸던가! 부푼 꿈을 안고 온 평안도인데……. 색향의 땅에 온 나는 어째서 박색에 가까운 저 아가씨에게 눈이 가는가? 난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데 왜……?

“윤하 아가씨가 소국에게 저를 싫어한다고 말해주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싫어하지 않습니다. 소국을 포기하세요.”

지금 이 아가씨가 하는 말은 자신이 나를 좋아하니까 소국을 포기하고 자신과 잘해보자는 그런 말인가? 설마…….

“저는 소국을 좋아합니다! 아가씨가 아니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세요.”

“저를 정말 좋아합니까?”

“네.”

2. 작가 소개

임지영(디카페)

재능은 끈질긴 인내다. 라는 말을 삶의 신조로 삼고 있는 이야기꾼입니다. 읽는 사람도 쓰는 사람도 즐거운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3. 차례

#14. 정경공주

#15. 입궁

#16. 평양감영

#17. 혼례

#18. 돌아온 진철

#19. 간자

#20. 독

#21. 화포

4. 미리 보기

임진강에 도착했다. 윤하가 커다란 나룻배로 임진강을 건너면서 살짝 웃음을 지었다. 바람은 불어서 강물이 넘실거렸다. 나룻배는 엄청나게 많은 짐들과 동물들, 말과 염소, 돼지들로 인해서 거의 비명같이 끼익대고 있었다.

상인들은 무섭지도 않은지 이런 것이 일상인 듯 서로를 향해서 자신의 무용담 같은 거래를 상대에게 퍼부으면서 떠들고 있었다. 모든 것이, 보이는 모든 것이 활기가 있었다. 발밑에서 작은 돼지가 길을 잃은 듯 헤매고 있는데 심부름꾼 아이가 쪼르르 달려와 돼지를 안고 그녀에게 꾸벅, 인사하고 돌아갔다.

서운이 윤하의 곁에서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고 웃었다.

“즐겁습니까? 이런 일상이…….”

윤하가 즐겁게 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리를 만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겁에 질려 이곳을 건넜던 일이 까마득하게 여겨집니다.”

서운이 윤하를 보면서 생각해보니 화난다는 표정으로 타이르듯 말했다.

“아가씨는 저를 놀라게 하는데 일가견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아가씨를 시장에서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윤하가 아련한 눈빛으로 서운을 보았다. 서운이 윤하의 장옷을 고쳐주는 척하면서 얼굴을 붉혔다.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면 어쩌라고 그러십니까?”

“만약 제가 가져온 그 영수증 같은 확고한 증거가 없었다면, 어떻게 하려고 했습니까?”

서운이 윤하를 외면하고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한참이나 생각을 하더니 무거운 낯빛으로 윤하를 보고 말했다.

“좌의정의 죄는 제가 한양을 향했을 때 벌써 밝혀진 것입니다. 금상도 알고 계셨고, 암행어사로 온 홍원은 증거를 찾으러 온 것입니다. 이미 확보한 것들이 있으니 그리 크게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문서를 가지고 그 고생을 한 아가씨께 제가 화를 낸 것입니다.”

윤하가 잠자코 고개를 숙이자 서운이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그때, 서운하셨습니까?”

윤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생각에 잠긴 듯 한참이나 강물을 바라보다가 얼굴을 붉혔다.

“제가 괜한 짓을 한 것입니까?”

서운이 고개를 저으면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윤하의 손을 꼭 쥐었다.

“아닙니다.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대로 옴짝 못 하게 하고 반듯하게 처리했으니까요. 아가씨가 좋아하는 원칙을 지키면서.”

윤하가 눈을 슬쩍 흘기자 서운이 여전히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그때 말입니다. 감영에서 진웅의 재판을 하던 밤에, 괴로웠습니다. 아가씨의 말을 참을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때까지 제가 세상에서 제일 잘나고 멋진 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가씨가 저를 쫓아내려 했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아득하더군요.”

윤하가 다급하게 말했다.

“그건, 나리를 만나기 전에, 잘 모르고…….”

서운이 윤하를 힐긋 보고는 웃었다.

“아가씨가 저를 머저리라고 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머저리일 수도 있겠구나. 아가씨의 사랑을 당연하게 생각했으니까요. 멋진 모습은 보이지도 못해놓고 말입니다. 소국 아씨나 쫓아다녀놓고. 그래서 그 뒤 아가씨가 저를 사랑한다고 해주었을 때 맹세했습니다. 가능한 놈들을 당당하게 단죄를 하겠다고 말입니다.”

윤하가 살짝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간자들을 전부 죽이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서운이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을 죽인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다음부터 말입니다.”

윤하가 그를 바라보다가 환하게 웃었다. 가슴속에서 뭔가가 자잘하게 부서져 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자신을 옭아맸던 그 많은 규칙과 스스로의 억압이, 이 멋지고 제멋대로인 남자의 말과 행동으로 인해서 점차 웃음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틀린 것은 고쳐야 직성이 풀렸던 속 좁던 윤하가 자신감이 있는 부드러운 인간으로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윤하가 순간 참지 못하고 그에게 속삭였다.

“서운…… 오라버니, 사랑합니다.”

서운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런 곳에서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제가 지금 얼마나 참고 있는지 아십니까.”

서운이 윤하의 뺨을 살며시 잡자 윤하가 주위를 둘러보며 서운을 손을 마주 잡았다. 그리고 속삭였다.

“그래도 이번에는 절차를 지키셔서 다행입니다. 위에서도 좋아하셨을 것입니다.”

서운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터무니없는 소리라는 표정과 함께 주위를 돌아보며 속삭였다.

“그건 아가씨가 모르는 말씀입니다. 금상께서는 사실 그렇게 절차에 따라서 놈들에게 변호의 기회를 주는 거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그냥 빠른 해결을 좋아하시죠. 그래서 옛날에 홍국영도 거부할 수 없는 증거를 대가며 순식간에 처리한 것입니다. 막처리는 저보다 더한 분입니다.”

윤하의 입이 저절로 벌어지며 아, 하고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를 야릇한 대응을 했다. 그리고 한참이나 서운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윤하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면 감영에 대한 대책 없이 한양을 향한 것도 그런 건가요? 평양서원의 학자들이 진일서 잔당들과 함께 감영을 장악하고 양민들을 학살했다면 어쩌려고요? 저와 아버지도 죽었을 텐데요.”

서운이 그녀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이 교활하게 학자들을 포섭할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저도 조영에게 지시를 한 것이 있습니다. 백성들의 안전이 최우선이지만, 그것보다 우선인 것이 있다고요.”

윤하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서운이 인상을 찌푸리고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설명했다.

“그것은 의지입니다. 백성들이 억압과 부정을 용납하느냐, 아니면 목숨이라도 걸고 스스로를 지켜내느냐, 제일 중요한 것은 그것입니다.”

윤하가 비난하려는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하지만 칼을 들고 있는 앞에서 어떻게…….”

서운이 고개를 저었다.

“칼이나 총포는 의지를 막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아가씨라도 그들의 의지까지 만들어줄 수는 없습니다. 그건 스스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조영에게 뒤에서 안 되겠다 싶으면 영외군사들을 이끌고 다 쓸어버리라고 말해놓기는 했습니다만, 자신들의 의지를 깨닫고 스스로를 지킬 기회는 빼앗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윤하의 입이 다시 벌어지고 “아…….” 하며 감탄인지 탄식인지를 길게 뱉어냈다. 서운이 멍하게 그 모습을 보고 윤하의 손을 가져가 입맞춤을 했다. 윤하가 그에게 바싹 다가서서 속삭였다.

“나리, 하가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서운은 윤하가 자신을 삼인칭으로 칭하며 애교 어린 눈빛으로 아련하게 바라보자 정신이 아찔했다. 당장 아가씨에게 입맞춤을 하고 싶었지만 뼈를 깎는 의지로 이겨냈다. 주변이 너무 혼잡하고 시선도 많아서 정신이 없었다.

아가씨가 자신을 죽이려는 것이다. 혼인까지 어떻게 견디지……. 서운이 윤하의 손가락마다 입을 맞췄다. 윤하가 당황해서 주위를 돌아보았지만 몇몇 노인들만 흐뭇하게 볼 뿐 상인들은 관심이 없었다.

이후로 가는 길은 빠르고 편안했다. 서운은 계속 윤하의 편지를 훔쳐보려고 갖은 노력을 했으나 윤하는 편지를 보여주지도 않고 자신이 보지도 않았다. 두 달이나 걸린 한양에서의 일을 마치고 서운은 무사히 평양감영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