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오늘 밤에 만지게 해줘.”

피가 섞이지 않은 오라비의 배신.

그리고 죽음의 위기에 처한 미사를 구한 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 태성.

회색빛 눈을 지닌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미사 씨.”

미동 없는 그녀의 하얀 얼굴이 눈에 새겨진다. 미사는 정말 예쁘다. 많이 예뻐서 인기가 엄청 많을 것이다.

‘……아니, 이렇게 예쁘지 않았는데.’

태성은 진지한 고민에 빠졌다.

‘역시 취향의 문제인가.’

그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귀로 열이 몰리는 게 느껴졌다.

2. 작가 소개

신여리

무더운 7월에 태어나서인지 겨울을 싫어합니다.

몹시 게으르지만 글쓰기만큼은 부지런히, 즐겁게 하고 있습니다.

오래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mail▶shinyeori@naver.com

▣ 출간작

물의 자흔을 쫓는다

바라연

수라화

가시나무 우는 성 1부

마리포사 mariposa

3. 차례

Part 1

#13. 상부상조

#14. 그 남자의 이야기

#15. 사준 2

#16. 낯선 방문객들

#17. 데이트가 하고 싶네요

#18. 다가오는 그림자

#19. 생일 축하해

4. 미리 보기

현관문 앞에 선 태성은 습관처럼 도어록 넘버를 누르다 마음을 바꾸었다.

딩동.

초인종이 울리자 우당탕탕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미사는 저렇게 요란하게 제 흔적을 뿌리고 다녔다. 언젠가부터 그런 것 같다.

문이 발칵 열렸다.

“어서 와.”

태성은 미사의 헐벗은 차림에 떨떠름하게 말끝을 흐렸다. 춥다고나 하지 말지. 겨우 허벅지에 닿는 헐렁한 후드티 하나만 입은 차림이었다. 정말 고칠 줄 모르는 버릇이다.

미사의 집에서 챙겼던 몇 벌 안 되는 옷은 도망치는 와중에 다 잃어버렸다. 결국 소득은 수첩 하나뿐이었다. 뭐 그렇다며 미사는 여전히 그의 옷을 입었다.

“들어가요. 다른 사람이 지나가다 보면 어쩌려고.”

“오자마자 잔소리야?”

“나도 입 아파요, 같은 말 반복하기.”

태성의 회색 눈동자가 느리게 훑었다. 올려묶은 머리 아래로 드러난 하얀 목선과 쇄골의 굴곡이 눈길을 끌었다. 까만 옷과 대비되어 더욱 도드라졌다.

미사가 그의 손에 들린 종이가방을 궁금하단 듯 훔쳐보았다.

“시장 봐왔어?”

“아뇨, 별건 아니에요. 일단 들어가요. 밥은 먹었어요?”

“아니, 너 기다렸는데.”

신발을 벗고 막 거실에 가방을 풀었다. 태성이 미사를 바라보았다.

“왜요?”

“밥 먹으려고.”

“나를요?”

태성의 농담에 미사가 작게 웃으며 부엌 식탁을 가리켰다.

“봐봐, 다 차려놨어.”

태성은 식탁 위의 상차림에 작게 입술을 벌렸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두 개의 밥그릇과 두 쌍의 수저. 그리고 그 사이를 경계처럼 나누는 갖가지 반찬과 요리들이 랩에 덮여 있거나 뚜껑이 씌워진 채 놓여 있었다.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러다 퍼뜩 묘한 사실을 깨닫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근데 왜 전부 다…….”

‘치즈밖에 없는 건데.’

식탁 위의 음식들은 얼핏만 보아도 치즈 계란말이, 모차렐라 치즈로 덮은 제육볶음, 치즈 가루를 뿌린 샐러드, 그리고 생 치즈 조각들이었다.

허리를 양손으로 짚은 미사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네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그냥 쥐들이 좋아한다는 걸로 전부 준비해봤어.”

태성은 기가 막혔다. 놀리는 건지, 진담인 건지.

“제 식습관 여태까지 봐놓고서 이제 와서 무슨. 애초에 쥐들이 치즈를 제일 좋아한다는 것 자체가 편견이라고요.”

“그래서 싫어?”

“아니…… 싫다기보다는 그냥 좀 어색해서 그러죠.”

식재료의 80퍼센트가 치즈라는 문제보다 더 큰 근본적인 괴상함이 있었다.

같이 식탁머리에 앉아 밥을 먹은 적이 있기는 하지만, 밥을 같이 먹으려고 기다리는 건 여전히 이상하게 느껴졌다.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것이 남았나 보다.

태성은 자신과 미사 중 누가 더 이상한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고민들이 서서히 밀려나는 듯한 기분이었다. 누군가 이렇게 그를 기다려준다는 게 좋다는 생각이 노골적으로 들기 시작했다.

“이럴 거면 전화라도 좀 해주지.”

“왜? 너 밥 먹고 왔어? 진짜?”

태성은 외투를 벗어 내려놓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씻고 나올 테니 먼저 먹어요. 그리고…… 아, 저거 한번 먼저 열어봐요.”

미사가 태성이 내려놓은 종이가방을 집어들었다.

“이거?”

미사는 귀여운 테이프로 밀봉된 가방을 상하좌우로 흔들었다.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였다.

“이것들 뭔데?”

“궁금하면 열어봐요. 어차피 열어볼 거면서 뭘 또 캐물어요.”

태성은 잠기려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었다. 미사는 종이가방에 담겨 있던 하늘색 목도리와 하얀 벙어리장갑을 보고 크게 웃기 시작했다.

“뭐야, 이거? 선물이야?”

“요즘 밖에도 좀 나가고 그러잖아요. 그리고 이번 주말에 옷 사러 같이 나가요. 몇 벌 더 장만해야 할 것 같으니까. 미사 씨 핑계 안 들으려면.”

“아, 귀찮은데.”

미사는 거실 거울 앞에 서서 친친 목도리를 감았다. 오죽이나 어설픈지, 미사의 목에 털 달린 뱀 한 마리가 똬리를 튼 것처럼 보였다. 태성은 깁스라도 한 것처럼 엉성한 솜씨를 흘기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누가 보면 목 부러진 줄 알겠네.”

“깁스라기에는 너무 예쁜 깁스인걸.”

“나보다 나이 많다고 재더니 하는 것 보면 영 허당이네요. 목도리도 하나 제대로 못 매고.”

“그냥 감기만 하면 되지.”

“이리 와서 목 내놔봐요.”

태성이 손을 뻗어 그녀의 목에 감긴 목도리를 풀어냈다. 간간이 목덜미를 스칠 때마다 기묘한 기분이 그의 손끝을 물들였다. 미사는 얌전히 서서 온전한 그의 다정함을 받았다.

선 키가 그의 가슴팍에 겨우 닿았던지라, 미사의 목소리는 조금 낮게 울렸다.

“따뜻하네. 좋다.”

태성은 그녀를 말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미사의 길고 짙은 갈색 속눈썹 아래로 드리워진 엷은 그림자가 유려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얼굴이 조금 화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시선을 알아차린 미사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뚫어진다.”

태성은 당혹감을 가슴 깊숙이 밀어누르며 헛기침했다.

“예뻐?”

“…….”

“예쁘냐니까?”

“예쁘네요.”

미사는 그의 속도 모른 채 기분 좋은 양 목도리를 만지작댔다.

“뭐, 너한테서 칭찬 들으니 기분은 좋네.”

그늘 없이 웃는 여자가 그로서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치열한 세계에서 살아왔다는 게 새삼 믿기지가 않았다. 태성은 미사의 입술을 빤히 응시하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치곤 고개를 돌려버렸다. 간지럽다. 어딘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