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그럼 우리 중에 누가 더 간절한 걸까요?”

‘드릴러’ 윤서현. 최고의 에이전트인 그녀가 손만 대면 맨땅에서도 석유가 터진다는데, 실상 그녀의 위치는 회사에서건 집에서건 불안불안하다.

그러던 와중, 서현이 키우던 축구선수의 스캔들로 인해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다! 살아남기 위해선 초대박 스타를 데려와야 하고 그런 그녀 앞에 나타난 구세주는 세계적인 골프 황태자, 서희원.

10년 전 그 사건 후 첫 만남에 서현은 주저하고, 희원은 ‘오직 윤서현’이라는 조건을 전제로 계약을 제안하는데…….

“윤서현 씨. 아마 둘 중의 하나로 여기까지 오셨겠죠?”

“…….”

“날 데리러 왔거나, 아니면 내가…… 보고 싶었거나.”

강하게 쏘아보는 서현의 눈빛에도 희원의 검푸른 눈동자는 차갑기만 했다. 낮은 음성과 손끝에 실린 은근한 힘, 그의 모든 것이 더는 검어질 수 없는 블랙홀처럼 그녀를 강하게 끌어들였다.

“선택은 누나가 하는 거예요. 언제나 그랬듯이.”

2. 작가 소개

최수현

필명은 연하늘빛.

다시 생각나고, 또 읽고 싶어지는

그런 글을 써보고 싶습니다.

▣ 출간작

기다려줄래

그 여름, 나는(2016 리디북스 로맨스 대상 수상)

당신의 자리

취향의 문제

겨울, 또다시

비 내리는 밤

3. 차례

#16장

#17장

#18장

#19장

#20장

#21장

#22장

#23장

4. 미리 보기

발소리가 들린다 했는데 노크는 조금 더 늦었다. 배 변호사가 냅킨을 무릎에 까는 것을 보며 그녀도 한발 늦게 냅킨을 펼쳤다. 눈앞에 따라 할 사람이 있다는 게 현재까지 선을 보는 최대 장점이었으니 이 선이 잘될지 안 될지는 끝까지 가봐야 알 것 같다.

“배 변호사님. 많이 시장하셨을 텐데 많이……. 아.”

“이게 다……. 왜 여기 서, 서희원 선수가.”

“…….”

“맞죠? 진짜 서희원 선수 맞으시죠?”

그렇게 차분해 보이던 남자가 포크를 놓칠 정도로 희원의 등장은 파급력이 컸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제 발치에 떨어진 포크를 주워 든 희원이 은색 포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희원이 거기에 반사되는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손으로 쓱 얼룩을 닦아냈다. 조심스럽게, 또 단호하게. 한 발 더 다가와 포크를 식탁에 올려두었다.

“아, 감사합니다. 근데 여길 어떻게, 동해에서 경기 중 아니세요? 윤 실장님 보러 오신 건가?”

“……네.”

“아. 목소리 들으니까 진짜네! 진짜 서희원 선수잖아!”

배 변호사의 흥분이 더해졌다. 정말 놀랍지 않냐며 마주 앉은 서현에게 함박웃음을 지었지만 그녀는 따라 웃지 못했다. 떨리는 입가를 냅킨으로 꾹 누른 서현이 남은 힘을 모조리 끌어 모아 그를 불렀다.

“……어쩐 일이야?”

“할 말이 있어서요.”

꼭 쥐고 있던 냅킨에 사방으로 주름이 뻗쳤다. 아직도 흥분이 넘쳐 들썩이는 배 변호사를 두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희원이 제게로 돌아선다. 미처 씻어내지 못한 야생의 풀 향이 코끝을 스쳤다.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눈에 서현이 크게 흔들렸다. 혹여 이 판을 뒤집어버릴까, 손부터 끌어 나가버릴까, 오만 상상으로 가슴이 졸아들었다.

“……희원아.”

그러고도 남을 거라고, 서희원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고.

두근대기만 하던 가슴이 이제는 고무공처럼 사방으로 튕겼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 관계는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 제 손을 잡고 뛰쳐나가는 순간 그에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왜 이렇게 애같이 구냐, 희원이 질색하고 상처받을 말뿐이었다.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닌지라 하염없이 막막해졌다.

“서희원 씨. 왜 그러고…… 무슨 말이라도.”

“…….”

그러나 희원은 놀라울 만큼 조용했다. 바르게 선 자세로 어떠한 분노나 조급함도 비치지 않은 채 서현을 향해 입가를 올렸다.

반짝이지만 간절했던 눈, 꼭 반 박자씩 늦어지던 숨소리, 귓가에 눈처럼 내려앉던 음성.

「누나, 좋아해요.」

“…….”

기억 속 수없이 들었던 그 말이 사방이 고요한 지금에야 환청처럼 울렸다. 이런 얼굴로 자신을 대할 때면 희원이 하는 말은 언제나 같았다. 모른 척하기엔 너무도 곧고 투명한지라 말하는 그보다 듣는 자신을 더 당혹스럽게 했던 바로 그 말.

“……하아.”

“누나.”

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 변호사가 아무리 휘둥그레 두 사람을 살펴보아도 서현과 희원은 이미 익숙하면서도 조용한 대화에 빠졌다. 흐읍, 서현이 숨을 들이켜자 희원의 고개가 다시 미세하게 오르내렸다.

“…….”

“이제 이 정도 참을 만큼은 컸어요.”

고개를 푹 내린 서현에게서 희원이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눈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늘 같은 색을 유지했다. 밀어내고 흘겨볼 때마다 흔들리던 눈동자도 이제는 굳건했다. 목을 몇 번이나 울려본 서현이 어렵게 그를 불렀다.

“……어떻게 왔어?”

“아파서요.”

가만가만한 바람 같은 대답이 흘러나왔다. 서현이 저도 모르게 번쩍 고개를 들어 그를 샅샅이 살폈다. 지금이라도 일어나 온몸을 헤집어보고 싶은 걸 참으려는지 무릎 위의 손이 움찔거렸다.

“나 이제 아프면 아프다 이야기하려구요, 누나.”

“…….”

“너무 아파서 더는…… 견딜 수가 없었어요. 누나가 그랬잖아요. 가장 중요한 건 나라고. 내가 괜찮아야 경기도 하고 돈도 벌고……, 또 윤서현 너한테 할 말도 좀 하고.

희원이 드디어 이 방에 다른 이가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구두가 살짝만 틀어졌을 뿐인데 배 변호사가 화들짝 놀라 주춤대며 일어섰다. 누구보다 진지하고도 압도적인 남자의 기운에 마주 서는 걸음이 어딘지 어색했다.

“저기, 그러니까. 제가 뭔가…….”

“배 변호사님.”

“……저를 아세요?”

“그럼요.”

그보다 당연한 일이 어디 있겠냐는 정중한 말투였다. 배 변호사가 인생 최대의 혼란을 여기서 맞는 사람처럼 서성거리자 희원이 이번에도 신사답게 나섰다.

“실례인 줄은 압니다만 만약 자리를 피해주신다면 언젠가는 제가 거기에 보답할 날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아…… 그러니까.”

“이왕이면 가능한 한 빨리, 신속하게, 자리를 피해주신다면 생각하시는 모든 것이 현실이 될 거 같지 않으신가요?”

“아…… 하하.”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매혹적인 제안에 배 변호사가 더듬더듬 자신의 가방을 잡았다. 그래도 유능한 변호사라 마지막에는 번뜩 정신이 들었는지 희원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 말씀이 어쩐지 제가 오늘 일을 깨끗이 잊으면 같이 한번 필드에 설 영광도 있을 것 같다는 걸로 들리는데, 착각은 아니겠지요?”

“한 번으로 되겠습니까.”

“서희원!”

“……물론 제 에이전트의 허락이 있어야겠지만요.”

두 남자의 악수를 깨트려놓은 서현의 부름에 희원이 평소처럼 재빨리 꼬리를 내렸다. 인사라도 하려고 기다리던 배 변호사가 서현을 부르려 하자 그나마 호의적이던 희원의 그림자가 대번에 어둡게 너울거렸다. 멍하게 올려다보는 그에게 희원은 일부러 한발 늦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여기서 저 모르는 다른 볼일이 남으셨는지.”

“아, 아니. 이제 나가보려고. 그럼.”

얼굴도 못 드는 그녀에게 인사는커녕 그럴 기회조차 막힌 배 변호사가 적당히 자리를 비켰다. 달칵이며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서현은 더욱더 깊이 고개를 묻었다.

“하아.”

“……식사 안 해요?”

희원이 이제 막 비워진 자리에서 자신의 몸을 내렸다. 희원이 자리한 이상 방금 전까지 있던 타인의 흔적 같은 건 모조리 사라졌다. 원래 그랬어야 당연한 것처럼 꽉 채운 존재감으로 스푼을 만지작거렸다.

“……나 누나 좋아해요.”

“알아.”

“아는 말을 하고 또 하는 게 힘들 때가 있었어. 안 하고 버텨보려고 별 짓 다 하기도 했어.”

“안 한 적 없었잖아.”

“그러니까.”

희원이 스푼에 비친 서현의 얼굴을 바라만 보다 끝내 자조적으로 웃고 말았다.

“안 되더라고. 정말 누나가 들으면 미쳤다 할 만큼 전부 해봤어.”

“도대체 뭘 했길래.”

“안 듣는 게 나을 거야. 그냥…… 내 한계를 경험하는 건 그 정도로 충분하니까, 해도 해도 안 되는 건 빨리 포기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자. 그렇게 필사적으로 기다려왔어.”

가슴이 꽉 차올라버린 서현이 이제야 그를 제대로 바라보았다. 어디가 아픈지 살피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인지 매섭게 추궁을 하려는 것도 아니라, 다만 남자 서희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그를 바라보게 될 때까지 이 많은 시간이 흘러버렸다.

“좋아해.”

“……바보야, 그만해.”

“누난 또 다시 지겨울지 모르겠지만 나한텐 삼천팔백이십 번을 쉬고 하는 말이라서, 여기서 더 줄일 수가 없네요.”

다시 그때와 같은 두 사람만의 시간으로 돌아갔다. 어디서건 고개를 돌려본 적 없던 서현이 이제는 비어버린 물잔을 잡고 고개를 흔들었다.

“…….”

“난 원래 이런 놈이라서 누나가 바라는 남자는 못 될 수도 있어. 억지도 쓸 거고 눈 뒤집힐 일도 많을 거야. 그런 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 어쩌면 더 불안하게 만들지도 몰라.”

“넌 진짜…….”

“그래도 나 좀 봐줘.”

“…….”

“나 한 번만, 진짜 내가 바라는 방식으로 한 번만 좀 봐줘. 해서 안 될 건 세상에 없다며? 누나도 할 수 있을 거야.”

그런 거 누나가 못 하면 세상 누가 해.

희원이 찡그리듯 눈을 내리감았다. 이제 둘 다 서로를 보지 않는데도 이상하게 이 방의 분위기가 의도대로 살아났다. 은은한 음악이 이제야 귀에 들리고, 불그레한 촛불의 뜨거움이 피부로 느껴졌다.

“누나가 그렇게 봐주면 나도 달라질 수 있을지 모르잖아.”

“……웃기지 마. 내가 그런 말에 속을 줄 아니?”

“속게 해줄게. 내가 날 속여서라도.”

다시 뜨는 눈이 그 어느 때보다 짙고 푸르렀다. 서현이 그 눈을 부정하듯 몇 번이나 깜빡여보다 자신의 포크를 집었다. 하지만 도저히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몰라 손이 앞뒤로 헤맸다.

“하아.”

포크를 놓아버린 그녀가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끝내 미간을 괴자 희원이 그녀에게 다가와 한쪽 무릎을 굽혔다.

“흐으읍.”

“서로 마음 다 알면서 이렇게 모르는 척 싸우는 게 정말로 애들 같은 거예요.”

“…….”

“그런데 난 애 같은 누나도 좋았어. 전부 다 윤서현이니까.”

그녀의 무릎으로 올라간 손이 냅킨을 걷어냈다. 작게 떨리는 그녀의 몸을 돌려 서현의 얼굴을 찾아냈다. 물기 어린 그녀의 눈동자가 다시는 지워낼 수 없을 만큼 강하게 박혔다.

“나 봐.”

희원이 무릎을 굽힌 채로 허리를 세워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조심스럽게 시작하려 했던 키스가 입술이 닿는 순간 모든 결심을 박살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애끓었던 온갖 유치하고 어린 상상이 본능에서는 감출 수가 없었다.

“후우…… 어떻게 이런 데 나올 생각을 해!”

“너도 왔잖아! 흐읍!”

그녀의 항변이 제대로 새어나오지도 못하고 희원의 혀에 녹아들었다. 하루의 허기를 모조리 풀어내려는 키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입안을 넘나들었다. 단순한 욕구가 아닌 필사적인 몸짓으로 서현의 허리를 바짝 끌었다.

“윤서현…… 입 벌려.”

“하아…….”

“첫 데이트잖아. 강제는 싫어.”

힘이 완전히 풀려버린 서현의 턱을 잡고 그의 혀가 닿을 수 있는 모든 곳을 샅샅이 헤집었다. 경계 없는 폭신한 점막이 엉키자 모든 사고가 마비되었다.

이러지 않으면,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터져버릴 것만 같은 불안함과 달콤함.

마치 그들의 첫 키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