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그럼 우리 중에 누가 더 간절한 걸까요?”

‘드릴러’ 윤서현. 최고의 에이전트인 그녀가 손만 대면 맨땅에서도 석유가 터진다는데, 실상 그녀의 위치는 회사에서건 집에서건 불안불안하다.

그러던 와중, 서현이 키우던 축구선수의 스캔들로 인해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다! 살아남기 위해선 초대박 스타를 데려와야 하고 그런 그녀 앞에 나타난 구세주는 세계적인 골프 황태자, 서희원.

10년 전 그 사건 후 첫 만남에 서현은 주저하고, 희원은 ‘오직 윤서현’이라는 조건을 전제로 계약을 제안하는데…….

“윤서현 씨. 아마 둘 중의 하나로 여기까지 오셨겠죠?”

“…….”

“날 데리러 왔거나, 아니면 내가…… 보고 싶었거나.”

강하게 쏘아보는 서현의 눈빛에도 희원의 검푸른 눈동자는 차갑기만 했다. 낮은 음성과 손끝에 실린 은근한 힘, 그의 모든 것이 더는 검어질 수 없는 블랙홀처럼 그녀를 강하게 끌어들였다.

“선택은 누나가 하는 거예요. 언제나 그랬듯이.”

2. 작가 소개

최수현

필명은 연하늘빛.

다시 생각나고, 또 읽고 싶어지는

그런 글을 써보고 싶습니다.

▣ 출간작

기다려줄래

그 여름, 나는(2016 리디북스 로맨스 대상 수상)

당신의 자리

취향의 문제

겨울, 또다시

비 내리는 밤

3. 차례

#프롤로그

#1장

#2장

#3장

#4장

#5장

#6장

#7장

#8장

4. 미리 보기

“뭐야? 매너 없게 이런 데 오면서 전화도 안 꺼놓고 와?”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라”

서현이 때 맞춰 울리는 휴대전화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안 이사는 대뜸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도 더는 뭐라 못 하는 걸 보면 요란한 벨소리 덕이 컸다.

“하아.”

문을 닫고 나선 그녀가 수신자를 확인하지도 않고 대충 종료 버튼을 눌렀다. 보나마자 준영이 몰래 걸었을 것이다.

다 키웠네.

비상상황에서 벌써 몇 번이나 써먹었던 방법이다. 준영의 손이 보기보다 재빠른 것에 대견하다 생각하면서도 안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 욕지거리가 올라왔다. 웬만해서는 참는 것이 일상이라지만 이렇게 한 번씩 한계를 넘어설 때가 있다.

“아.”

머리까지 꽁꽁 얼려버릴 얼음물 생각이 간절해졌다. 급한 대로 손부터 좀 씻으려 걸음을 옮기려 할 때 드르륵, 바로 옆방 문이 열렸다. 쑥 튀어나온 커다란 손 하나가 순식간에 서현을 잡아끌었다. 얼마나 강한 힘인지 눈 한번 깜빡이니 벌써 공간이 바뀌어 있었다.

“누구…… 읍.”

“소리 낮춰요. 여기서 저 방 소리 다 들렸거든.”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아찔했다. 이렇게 속삭이듯 나직한 목소리를 가진 남자라면 한 사람뿐이다.

“씨발.”

“…….”

“욕을 하려면 끝까지 해야죠. 나는 누나 그렇게 안 키웠는데.”

“미쳤니?”

“알면서 왜 물어요.”

희원의 음성은 욕을 할 때 더욱 낮게 끓었다. 이 상황에 어떻게 은근한 긴장이 드는지, 서현이 입술을 질근 물었다. 일단 제 목을 감고 있는 팔부터 풀어내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어려웠다.

“너!”

느슨한 듯, 빈틈없이 그렇게 자신을 감고 있다. 아주 답답하지 않을 정도로만 그녀를 안으면서도 뿌리치려 할 땐 가차 없이 조여들었다. 어쩌면 이런 하나까지도 변한 것이 없다.

“놔. 놓고 말하면 되잖아.”

“언제요?”

“일단 좀 놔야지 말을 하든 말든.”

“안 할 거잖아. 처음부터 그럴 마음 없잖아요.”

“…….”

“누나 거짓말 못하는 거 여전해요.”

거짓말을 못하다니, 그의 단정적인 말에 헛웃음이 났다. 자랑할 일이 아니라 그렇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세상을 팔아먹으래도 그럴 자신이 있다. 바로 반박하려던 서현이 문득 그의 눈에 비친 자신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가 자신을 알듯, 자신 역시 그에 대해 아는 것이 많다. 예전부터 희원은 화가 나면 표현하는 모든 것이 잔인해졌다.

“……이틀 내내 전화 기다렸어요.”

“우리 얘긴 다 끝난 걸로 아는데.”

“시작이나 했고요?”

그가 강한 힘으로 그녀를 단번에 돌려세웠다. 동시에 손을 길게 뻗어 뒤쪽 미닫이문을 닫자 바로 옆방에서 흘러나오는 안 이사의 투정과 욕설이 더 선명하게 시끌거렸다. 이 소리를 희원이 처음부터 다 들었을 거란 생각을 하자 절로 탄식이 나왔다.

“너 여긴 어떻게 알았어?”

“누나야말로 왜 저런 데 앉아 있어요?”

“내가 먼저 물었어!”

“중요한 순서대로 대답하는 게 합리적이지 않아요?”

이대로는 끝도 나지 않을 대화에 서현이 고개를 푹 떨구자 희원이 그걸 놓치지 않았다. 가냘픈 어깨를 꾹 누르자 그의 가슴팍에 서현의 이마가 닿았다.

“야 너!”

“일단은 이러고 있죠. 둘 다 흥분해서 좋을 거 없잖아요.”

닿은 것은 겨우 이마뿐인데 꼭 다시는 빠져나가지 못할 곳에 갇혀버린 기분이 들었다. 놓아달라 해봤자 들을 놈도 아니라지만, 그 단단한 어깨를 발판 삼아 극도로 지쳐버린 마음 한구석이 노곤해졌다. 너무 현실 같지가 않아 도리어 방심하고 말았다.

“나, 누나 여기서 이런 소리 듣고 참는 거 볼 줄 알았으면 그렇게 떠나지도 않았어요.”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

“저 새끼한테 무슨 죽을죄 지었어요?”

귀에 내려앉는 그의 저음이 언뜻 살벌해졌다. 바로 옆방에서 여자가 눈치가 있니 없니, 준영을 잡고 성토하는 안 이사의 목청이 커질수록 희원의 숨은 거칠어졌다. 바로 제 이마에 닿은 그의 가슴이 오르내리는 것에 서현이 기겁하며 그의 팔을 잡았다.

“너 또!”

“안 그래요, 이제.”

“…….”

“한번 그래봤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지금에야 다시 만난 거고.”

같은 일을 떠올린 두 사람의 표정이 확연히 달라졌다. 서현의 눈이 불안에 흔들리는 반면 희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렇게 일깨워야지만 자제가 된다는 듯 십수 년이 지난 서현의 얼굴을 제 두 눈에 새겼다.

“나 정말 하고 싶은 말 많은데 일단 하나만 물어볼게요.”

“……뭔데?”

“나 안 보고 싶었어요?”

희원이 은근하게 고개를 기울이자 멍하게 바라보던 서현이 순간 흠칫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그의 손이 턱을 스치고 있었다.

“내가 왜.”

“……나 여기 온 거 봤잖아요. 보고도 아무 느낌 없었어요?”

탁, 서현이 그의 손을 강하게 내리쳤다. 그 정도로 아플 리야 있겠냐만 희원의 눈이 한파를 맞은 듯 싸늘해졌다. 그녀가 옆방을 힐끔하고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런 식으로 달라진 제 모습을 보여주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밖에 없다.

아니, 어쩌면 진작 이랬어야 했다.

“나 일하는 중이야. 오랜만에 보는 학교 후배 반갑긴 하지만 일하다 뛰쳐나올 정도는 아냐.”

“그래요? 나랑은 많이 다르네.”

서로를 보는 두 사람이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팽팽했다. 조용하게 속삭이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에 희원이 고개를 더 가까이 기울였다.

“오해하지 마요. 안 들려서 그런 거니까.”

“거짓말하지 마.”

“누나야말로 못하는 거짓말 하지 말아요.”

“…….”

“그렇게 일에 죽고 못 사는 사람이 어떻게 날 가만히 두지?”

한숨이 탁 터져나올 만큼 거만하고 또 거만했다. 웃음기 하나 없이, 정말 추궁이라도 하는 양 다가서는 눈동자는 기억하는 것처럼 검푸른 기가 돌았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감정이 격해질 때 더욱 그렇게 비쳤다.

“나 데려가고 싶지 않아요?”

“말이 되는 소릴 해.”

“일이잖아요.”

“……서희원.”

“누나 말대로 나는 학교 후배고 엄연한 일일 뿐인데 이렇게 펄펄 뛰는 누나가 더 이상하네요.”

그가 서현에게 닿았던 손을 완전히 치워냈다. 아직도 서로의 숨결이 닿는 거리였지만 희원은 얼음을 딛고 선 것처럼 차게 굴었다.

“내일 사무실로 갈게요. 다른 약속 잡지 마요, 나도 바쁘니까.”

“뭐라고?”

“일로 대해요, 누나가 죽고 못 사는.”

이제야 희원이 고개까지 마저 들었다. 처음 호텔 별채에서 재회했을 때는 너무 놀라 미처 보이지 않던 것들이 그녀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

절로 감탄이 나는 외모는 예전 그대로다. 하지만 눈빛이나 손짓, 그리고 숨결까지 이제 어느 곳에도 설익은 혈기는 없다. 그야말로 성인 남자, 그것도 꽤 위험하고 천진한 가면을 쓰고 자신을 감출 줄 알았다.

“서희원.”

방금 전과는 달리 이제 서현의 목소리도 많이 침착해졌다. 그게 그에게는 또 의미가 있는 건지 희원 역시 희미하게 입가를 끌어올렸다. 티브이나 뉴스를 극도로 피하는 그가 그나마 어쩔 수 없이 응대해야 할 때 보이는 그런 미소였다.

“너 보기에 내가 하는 일이 마음에 안 들고 우습게 보일 수도 있겠지. 저런 인간 비위나 맞춰주고 내 잘못도 아닌데 빌고 다니는 것도 전부 비굴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거야.”

“…….”

“그런데 나 그만큼 간절해. 나한테 간절한 일을 그렇게 하찮게 여기지 마. 나는 날 존중하지 않는 사람이랑은 누가 됐든 같이 일 못 해.”

명백한 거절이었다. 물론 그 안에 숨겨진 다른 뜻도 없다고는 못 하겠지만 지금이 아니면 더 그를 밀어낼 기회가 없을 것이다. 그만큼 희원을 알고 겪어온 터라 그녀가 언제나처럼 다시없을 기회에는 안색을 바꿨다.

“장난은 오늘까지로 알게. 여기서 더 나가면,”

“누나가 그렇게 간절해요?”

“…….”

희원이 아슬아슬하게 웃음을 지켜냈다. 그러지 않으면 버럭 터져나올 감정을 감추기라도 하려는 듯 낮은 목소리로 꼭 필요한 만큼의 감정만 드러냈다.

“내 손 보이죠? 감을 잊을까 봐, 여름 겨울 할 것 없이 골프채만 들었더니 이 모양이 됐어요. 살이 터진 데 또 터져서 나중에는 이게 내 살이 되더라고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막상 제 손으로 향하는 서현의 시선은 마땅찮은지 손을 슬쩍 치워냈다. 안 봐도 알 만하다 하겠지만 막상 본다면 그 소리도 안 나올 정도다.

“마지막 경기는 빗속에서 치렀는데 마침 감기에 걸렸거든요. 마지막 날엔 몸살 때문에 가만히 있는데도 팔이 덜덜 떨리더라고요.”

“너…….”

“그렇게 이기고 기어이 한국에 왔어요. 누나 만나러.”

“…….”

“그럼 우리 중에 누가 더 간절한 걸까요?”

말해봐요.

마지막에야 쓰게 웃은 희원이 제 굳은살 박인 손을 서현에게 내밀었다. 차마 잡을 생각도 못 하고 물끄러미 바라만보는 그녀에게,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손을 펴 가슴께에 붙이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윤서현 실장님. 내일 2시에 뵙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