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작품은 리네이밍작입니다. 이용에 참고 부탁드립니다.

1. 작품 소개

“쓰레기, 너 같은 걸 써주는 회사가 있을 것 같아?”

“……있는데요. 저 써주는 회사, 있더라고요. 여기, G&B그룹 비서실이요. 덕분에 취직됐어요. 그럼 잘 부탁드려요. 사장니임!”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인성쓰레기 사장에게 해고당했지만, 그로 인해 사장에게 엿 먹이는 게 주업무인 비서로 채용됐다. 연봉 높은 땡보직을 나 변태영이 어찌 마다하리오.

어이, 갑! 너 어디 한번 싸구려 을에게 제대로 당해봐라!

“현대판 노예라, 멀리 갈 것도 없잖아?”

원하는 답을 듣고 싶어? 개인비서 시켜줘! 그럼 노예 해줄게!

“어머나, 그게 누굴까요?”

“몰라서 물어? 말이 좋아서 비서지, 조선시대로 치면 노비 아냐? 천민. 안 그래? 싸구려.”

“에이, 그런 식으로 치면 사장님도 시대를 잘 타고난 거죠. 조선시대로 치면 상인이잖아요. 상놈!”

2. 작가 소개

한을

양수를 그리는 새

▣ 출간작

힐 미

3. 차례

18. 갑의 고백

19. 갑의 횡포

20. 을의 사랑

21. 눈치싸움

22. 여왕과 왕

23. 그대, 나의 갑

24. 진정한 승자

4. 미리 보기

뜨거웠다. 너무 뜨거워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뭉그러져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온몸이 하나의 거대한 혀가 된 것 같았다. 그만큼 생생하고 아찔했다. 맞닿은 입술을 제외하곤 다른 감각은 아득했다. 진득한 소리를 내면서 입술이 떨어지고 나서도 한동안 어질어질 정신이 멍했다. 어느새 슬쩍 들린 발뒤꿈치에 사장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제야 겨우 의식이 선명해졌다.

“세상에, 이 무슨…….”

미처 따지기도 전에 사진작가가 끼어들었다.

“작품이 탄생했어요, 작품! 정말 사랑하는 사이 아니고서는 이런 샷이 나오기 힘든데요, 그럼 두 분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초안 나오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부탁드립니다.”

정중하게 인사하는 사장의 팔꿈치를 꽉 잡고 있다가 사진작가의 뒤통수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자마자 낚아챘다. 사나운 손짓에 사장이 의아하게 바라봤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더욱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미쳤어요?”

“뭐가?”

“그거요, 그거!”

“그게 뭔데?”

“키스요! 안 하기로 했잖아요! 그런데, 그런데 이게 뭐예요?”

숨도 안 쉬고 쏘아붙이는 내게 사장이 도리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너도 동의했잖아.”

“뭐를요? 키스를요?”

“응.”

“와, 제가 언제요?”

“진하게 하라니까 끄덕이면서 웃었잖아.”

“그게 어떻게 동의예요? 이제 이 짓도 끝이다 싶어서 그런 건데!”

“아, 이런. 오해했네.”

“오해요? 그게 끝이에요?”

“그럼?”

오해였다며 태연하게 이미 지나간 걸 어쩌겠냐고 반문하는 모습에 기가 턱 막혔다. 너무 아무렇지 않게 되받아치니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사장님, 혹시…….”

“뭐?”

“일부러 그런 건…….”

“…….”

“아니죠?”

내 딴엔 최대한 조심스럽게 물었는데 사장은 심히 발끈했다.

“내가 이런 거 빌미 삼아서 좋아하는 여자 입술이나 훔치는 치사한 인간으로 보여?”

“아니, 그건 아닌데, 솔직히 그렇게 작게 끄덕인 걸 누가…….”

“자세 흐트러지지 않으려고 작게 끄덕인 건 줄 알았어.”

“그래도.”

“그래도 뭐.”

“…….”

사장 말에 틀린 점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끄덕인 것도 사실이고, 기다렸다는 듯 웃었던 것도 사실이니까. 또 사진작가가 진하게 하라고 요구한 찰나였으니까. 그래도 심증이 너무 뚜렷한데.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는 내게 사장이 일침을 놓았다.

“사람을 뭐로 보는 거야? 그런 시선, 불쾌해.”

정색하는 걸 보니 정말인 듯했다. 그렇다면 내 쪽에서 오해했구나 싶은 마음에 얼른 사과했다.

“죄송해요, 사장님.”

“죄송할 것까지야. 그럴 수도 있지.”

즉각적인 사과에 너그러운 용서가 돌아왔으나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오늘 뭘 한 거람?

“아, 몰라요. 정말 모르겠어요. 기분 이상하단 말이에요.”

“……어떻게 이상한데?”

“그냥, 그냥요.”

내가 생각한 첫 키스는 이게 아니었는데. 적어도 잡지에 실릴 컷을 위해 엉겁결에 하는 건 절대 아니었는데. 상실감은 곧 부정을 불러왔다. 주먹을 손바닥에 탁! 치며 외쳤다.

“그래! 이건 키스가 아니야!”

사장이 그게 무슨 소리냐며 눈썹을 씰룩였다.

“키스가 아니면?”

“연기 같은 거예요, 연기. 영화 찍을 때 가짜로 하잖아요, 키스 아니고 키스신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아직 첫 키스 안 한 거예요, 맞죠? 그러니까, 그래! 비즈니스! 비즈니스! 이건 비즈니스예요!”

필사적으로 부정하는 날 보고 사장이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맘대로 생각해.”

얄밉게 어깨를 으쓱거려가면서.

“맘대로 생각해가 아니라, 아닌 건 아닌 거죠.”

“뭐, 네가 아니라면 아닌 거겠지.”

그 끝에 피식 웃는 게 그렇게 능글맞아 보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울상인 채로 있을 순 없었다. 이무원과의 만남이 예정되어 있으니.

‘지금쯤은 문자가 와 있을 텐데.’

과연, 약속했던 대로 남신이 문자를 보냈다. 반짝이는 휴대전화 불빛을 보자마자 반색하며 달려들었다. 액정이 바뀌는 짧은 시간을 참지 못하고 “으허으허흐으항.” 신음인지 감탄인지 모를 괴상한 소리를 흘려댔다.

어디서 만나자고 했을까? 전혀 짐작조차 못 하겠는데. 당장 나만 해도 밤을 새우도록 어디가 좋을지 못 정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바라본 화면엔 그러나, 짤막한 한 문장만이 적혀 있었다.

[갑자기 스케줄이 몰려서 못 만날 듯]

겨우 여섯 단어의 짧은 문장이었지만, 쉽사리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 이해는 됐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믿을 수 없어 읽고 또 읽었다. 눈만 깜박이며 미동도 않고 서 있자, 문가에 비스듬히 서 있던 사장이 물었다.

“뭐래?”

“몰라요.”

모르는 게 아니라 알고 싶지 않은 거겠지만. ‘갑자기’와 ‘못’이 주는 의미는 너무나도 분명해서, 허탈함에 어깨가 축 처졌다. 오늘 무슨 날인가. 첫 키스도 날아가고 첫 데이트도 날아가다니.

“……드라이브 갈래?”

낙담한 표정에 사태를 파악한 사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아니요. 그냥 집에 갈래요.”

“아깝잖아.”

“뭐가요?”

시큰둥하게 물었는데,

“이렇게 예쁘게 꾸몄는데, 오늘 같은 날은 좀 돌아다녀야지. 안 그래?”

묘하게 설득력 있었다.

“……그럴까요?”

공들인 메이크업이 은근히 아까운 찰나였다. 이무원과 데이트하기 위해 새로 산 옷도. 한편으론 사장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사장이 이무원 대타도 아니고 나한테 고백까지 한 이 마당에 우스운 상황 아닌가. 이래저래 주저하고 있자니 사장이 계속 이유를 만들어줬다.

“배고파. 같이 밥 먹어줄 거지?”

그동안 번번이 바람맞을 때마다 내가 위로해줬으니 이번엔 자기가 위로할 차례라면서. 밀린 빚을 갚겠다는데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뭐 먹을 건데요?”

“떠오르는 거 다 말해봐.”

“음, 일단은 소주요.”

“술이 마시고 싶은 거라면 분위기 괜찮은 곳 알고 있는데.”

가보겠냐는 제안에 고개를 저어 보였다. 이무원과 데이트가 무산된 씁쓸함을 달래는 데는 소주만 한 게 없을 것 같았다. 사장이 다니는 분위기 괜찮은 술집에 소주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냥 술이 아니라 소주가 고픈 내 심정에 동감한 사장이 다음 질문을 골랐다.

“안주는?”

“우리 오빠한테 일거리 몰아준 누군가요! 아주 잘근잘근 씹을래요.”

“…….”

“바빠진 건 좋은데 하필 그게 오늘일 게 뭐예요.”

새삼 짜증이 일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눈앞에 있으면 당장이라도 목을 비틀 거라고 별렀다. 별러도 너무 퍼렇게 별렀는지 애꿎은 사장이 목을 문질렀다. 괜히 아무 죄 없는 사장까지 불편하게 했나 싶어 사과했다.

“죄송해요.”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

“이해해주셔서 감사해요. 술은 제가 골랐으니까 안주는 사장님이 정해주세요.”

“내 생각엔 소주 안주로는 회랑 매운탕이 좋을 것 같아.”

“좋아요!”

훌륭한 생각이었다. 두툼하게 썰어진 쫄깃 탱탱한 회를 씹다 보면 기분이 풀리지 않을까. 거기에 뜨끈한 매운탕 국물 한 수저면 남은 서운함도 말끔히 가실 것 같았다. 격하게 동의하자, 오늘의 위로 담당 사장이 운전대를 잡았다. 서쪽으로, 서쪽으로. 어느덧 기울기 시작한 해가 강렬하게 시선을 사로잡았다.

“와우, 인천 가는 거예요? 수산시장?”

“글쎄.”

“흥정만 잘하면 엄청 싸게 먹는데! 사장님은 뒤에 가만 서 계세요. 제가 알아서 다 할게요.”

멍게랑 개불 서비스도 받겠다고 의지에 불타올랐다. 그런데 사장이 도착한 곳은 소금 내 폴폴 나는 바닷가가 아니라 공항이었다.

“에? 공항 맛집 같은 거예요?”

“글쎄.”

아리송한 상태로 사장 손에 정처 없이 이끌리다 보니, 어느새 제주도였다. 언제 연락을 넣었는지 제주도 지사 직원이 차를 대기시켜놓고 있었다. 둘만 있고 싶다며 직원에게서 키를 받아든 사장이 조수석 문을 열며 장난스럽게 손짓했다.

“편안히 모시겠습니다.”

그럴 땐 뒷문을 여는 거라고 핀잔하면서도 냉큼 운전석 옆자리에 올라탔다.

“와우. 회니까 이 정도지 스파게티 먹자고 했으면 이탈리아 갔겠어요.”

“얼마든지.”

생각도 못 한 나들이에 기분이 한껏 들떴다.

“좋아?”

“엄청! 완전 근사해요.”

갓 잡아올린 싱싱한 해물이 먹고 싶단 말에 해녀가 물질하는 장소를 찾았다. 붉은 고무대야에서 이것저것 가리키자 이내 현란한 칼놀림으로 쓱싹쓱싹 한 접시가 완성됐다. 푸짐한 접시를 들고 아무 바위에나 걸터앉았다.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에 바다 내음이 물씬 섞였다.

“사장님, 바다 냄새 나요. 와, 진짜 바다다, 바다.”

아직도 제주도에 내려온 게 믿기지 않아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폐부 저 밑바닥까지 바다가 들어차도록. 그런 내게 사장이 소주잔을 들어 보이며 가볍게 웃었다.

“흥정할 거라더니, 제값 다 치르고.”

“어우, 해녀님이 목숨 걸고 캐온 걸 어떻게 흥정해요.”

한 잔 톡 털어넣고 안주로 해삼을 콕 찍어 건넸다. 싱싱한 전복이며 해삼을 즉석에서 썰어 이쑤시개로 콕콕 찍어먹는 맛이 색다르다고 하자 사장도 맞장구쳤다. 활짝 웃느라 휘어진 눈매며, 느긋하게 젖힌 상체가 모처럼 편안해 보였다.

“왜?”

“좋아 보여서요. 사장님 오랜만에 여유 있어 보여요.”

“……전엔 이렇게 마음 놓고 다닌 적이 별로 없었어.”

비록 주어는 없었지만, 누구와 함께할 때 그랬는지는 불 보듯 뻔해 구태여 묻지 않았다. 대신 파도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해삼을 오독오독 씹으면서. 가끔씩 소주를 짠 해가면서. 사이좋게 한 병씩 비운 후에는 맨발로 모래사장을 밟으며 나란히 아이스크림을 핥았다. 유난히 달았다.

그래서일까. 혀끝에서 달콤하게 녹아 없어지는 아이스크림처럼 이무원과의 약속이 무산된 서운함도 사르르 녹아버렸다. 술기운도 알근하게 올랐겠다, 해변 아름답겠다, 바람 살랑이겠다. 걷잡을 수 없이 기분이 좋아져 간혹 지나가는 작은 게에도 깔깔댔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사장의 눈빛은 무척 자상했다.

“기분은 어때? 좀 풀렸어?”

“음, 거의요.”

“얼마나 남았는데?”

“요만큼?”

손톱만큼을 표시해 보이곤,

“이 정도 앙금쯤이야.”

호, 부는 시늉을 하며 대수롭지 않게 털어버렸다. 별것도 아닌 장난이었는데 사장은 들고 있는 아이스크림이 기울 정도로 박장대소했다. 간신히 웃음을 멈춘 후에는 아무렇지 않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귀여워. 귀여워 죽을 것 같아. 뭘 믿고 이렇게 귀여운 건데?”

거침없는 표현에 볼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무리 고백한 후라지만 너무 대놓고 들이대는데? 게다가 들이댐의 강도가 점점 높아졌다.

“난 솔직히 기뻤어. 이무원이랑 약속 취소돼서.”

“우와, 못됐다.”

“너무 예뻐서 그 자식한테 보내기 싫은데 어떡해.”

“…….”

또, 또.

“사장님, 너무 저돌적인 거 아녜요? 낯설어요.”

“적응해. 이제 겨우 시작이니까.”

시작부터 이미 충분히 거창하다고 했지만, 자기 스케일을 무시하는 거냐며 으스댔다.

“와우, 긴장해야겠는데요?”

장난스럽게 받아치자, 어깨를 짚은 사장이 코앞에 바싹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러니까…….”

“…….”

조금 전까지의 장난스런 표정은 어디 가고,

“하루 빨리 마음 돌리는 게 편할걸.”

더없이 진지한 눈빛으로. 그러면서도 싱긋 웃는 입술에,

“…….”

반나절 전의 키스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생생하게 떠올라,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나대기 시작한 심장을 들킬까 싶어 나도 모르게 숨을 꾹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