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살아서 이 작은 천국을 얻고자 죽어서 지옥에 갈 것을 선택했다.”

아일 에드가 클레이모어.

그리고 그의 기억을 가진 남자, 서정현.

“만약에 아니라면요……. 제가 그녀가 아니라도 이렇게 잘해주실 건가요?”

라야 윈터스.

그리고 모두가 그러하듯 천칙(天則)에 의해 기억을 묻어버린 여자, 한지은.

“그래…… 날 전혀 기억 못한단 말이지.”

지은의 심장 한구석이 뻐근해져왔다. 정현의 갈색 눈동자에 붉은 노을빛이 일렁였다.

“자그마치 삼십 년이 넘는 세월을 기다렸어!

나만이 너를 기억한다면 내가 그토록 고민해온 시간들은 대체 뭐란 말이야!”

전생의 기억과

현세의 추억이 교차하는 곳,

나달의 언덕.

2. 작가 소개

아드소

여름에 태어났지만 더위에 약합니다. 여름밤은 좋아합니다.

제가 활자로 옮긴 인물과 세계가 다른 이들에게도 잠깐의 재미, 또는 오랜 즐거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3. 차례

part. 2

#상담

#5

#6

#7

#8

#9

#10

#11

part. 3

#꿈

#12

#13

#14

4. 미리 보기

무거운 눈꺼풀을 살짝 들어 올렸다.

“일어나라고.”

다시 눈을 감았다. 하얀 빛이 눈 속을 파고들었다.

무슨 꿈을 꾸었더라. 오랜만에 꾸는 꿈인데.

몸이 살짝 흔들렸다. 동현이 이불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며 지은을 깨웠다.

“일어나. 깬 거 다 봤어.”

“언니, 일어나. 나 나가봐야 돼.”

예은이 귀걸이를 귀에 꽂으며 동현을 거들었다.

“취직했다고 제정신 아니지? 집에 몇 시에 들어온 거야?”

“……몰라.”

지은이 이불 속에서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예은이 다가와 지은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외박이라니. 아빠한테 다 이를 거야.”

“일러라.”

지은이 어린아이처럼 대꾸했다. 동생들이 동시에 으이구, 소리를 내며 엉덩이와 다리를 때렸다. 지은은 순간 자신이 가장 막내가 된 것 같았다. 동시에 가족들에게서 보호받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 왈칵 눈물이 났다. 이런 새삼스러운 기분이라니. 꿈의 여운이 남아 있었다.

지은은 잠을 깨우려는 것처럼 이불에 얼굴을 비벼 눈물을 닦고 일어났다. 예은과 동현이 애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저런 눈이다. 저런 애정은 아주 오래된 사이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현도 저런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지은이 눈을 한 번 길게 감았다 뜨며 말했다.

“너는 주말 아침부터 어딜 가려고?”

예은은 능숙하게 다른 쪽 귀에도 귀걸이를 달며 대꾸했다.

“아침은 무슨, 우리 둘은 점심까지 먹었구먼. 오코노미야키 만들어놨으니까 먹어. 동현이도 오늘 학원 보충 수업 있어서 나가봐야 한대.”

“누나가 제일 팔자 좋아.”

동현이 중학생답지 않게 어른스러운 말을 내뱉었다. 그의 무서운 점은 그런 말이 너무 잘 어울린다는 것이었다. 동생 같지 않아. 지은은 종종 그가 오빠처럼 느껴졌다. 지은이 으음,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긁적였다. 동현이 거실에 시선을 두며 물었다.

“거실에 있는 저 책들은 다 뭐야? 24시간 서점이라도 생겼어?”

“아, 그 책. 너희들 책도 있는데. 한번 봐봐.”

지은이 배시시 웃으며 침대에서 몸을 빼 내려왔다. 동생들이 거실로 나가고 지은도 그 뒤를 따르려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정현에게서 온 문자였다.

[잘 잤어?]

지은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어떻게 지금쯤 깼을 거란 걸 안 거지?

[네. 사장님은 잘 들어가셨어요?]

삼십 초쯤 기다리고 있다가 거실로 나가려는데 답장이 왔다.

[오랜만에 집에서 쉬는 중이야. 메일 보냈어. 시간 나면 확인해.]

지은은 오른손으로 [지금 확인할게요.]라고 문자를 찍으면서 왼손을 뻗어 컴퓨터 전원을 켰다. 두 개의 광고 메일과 여섯 개의 스팸 메일 사이에서 정현이 보낸 메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장문의 메일이었다. ‘오늘은 날씨가 아침부터 꽤 쌀쌀하다, 일기예보를 보니 상당히 춥다더라, 밖에 나가려면 옷을 단단히 입어라.’라는 엄마 같은 인사로 운을 뗀 뒤, 정현은 자신의 주소를 알려주었다.

[나만 네 주소를 알고 있으면 혹시 무서워할까 봐.]

지은은 슬며시 웃었다. 예전 카페에서 ‘스토킹 같나?’라며 얼굴에 홍조를 띠고 웃던 정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가 말끝을 흐리며 쑥스러운 미소를 짓던 얼굴이 눈에 선하다.

몇 시간 전에 헤어진 그가 벌써 그리워졌지만 지은은 그런 자신의 감정을 의식하지 못했다. 대신 턱을 괴고 있던 왼손으로 살짝 뜨거워지는 볼을 매만졌다.

그는 귀엽게도, 아니, 치밀하게도 인터넷에서 약도까지 찾아내 자신의 오피스텔 부분을 빨간 동그라미까지 쳐서 캡처한 그림을 붙여놓았다. 찾아오란 소린가?

[찾아오란 얘기는 아니고.]

깜짝.

[그렇다고 찾아오지 말란 얘기도 아니고.]

그가 옆에서 대꾸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 지은은 자신의 방을 스윽 둘러봤다.

그 흔한 이모티콘이나 줄임말 하나 없이 짤막짤막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메일은 흡사 손으로 쓴 편지처럼 담담히 그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듣기 좋은 속도로, 적당한 높이로, 항상 심장이 귀를 기울이게 만들던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