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정은 한 발을 살짝 내디뎌 땅을 밟았다. 폭신한 땅. 오, 이게 바로 그 말로만 듣던 쿠키의 나라가 맞구나!
참 아름다운 곳이다. 평수가 제법 되는 그곳 땅은 전부 빵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들판에 만개한 꽃들은 전부 알록달록 새콤달콤한 캔디로 되어 있다.
그토록 오고 싶던 이곳, 자유의 땅! 아무리 먹어도 살이 안찌고 젖과 꿀 대신 주스와 딸기우유가 흐르는 이곳!
사락거리는 드레스자락을 들고 민정은 춤추듯 한 바퀴 돌았다.
바로 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네?”
“당신이 바로 인형의 나라에서 온 공주입니까?”
“네, 당신은 누구신가요?”
짙은 색 정장 슈트를 좍 빼입은 그는 검은 가면을 쓰고 있었다.
어디서 많이 듣던 음성인데……
그가 가면을 벗으며 가볍게 고개를 뒤로 젖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그 순간 민정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차성우 선생! 그가 그냥 선생인 줄 알았더니 이 나라의 왕자였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전 원래 이 나라의 왕자였답니다. 신분을 숨기고 인형의 나라에서 교편을 잡았지요.”
그가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고 선생님, 저와 함께 춤을 추지 않으시겠습니까?”
오, 그가 웃을 줄 안다. 그가 그녀를 향해 환한 미소를 보이고 있다.
“네……”
그녀는 황홀해하는 자신의 표정을 최대한 감추며 그의 손을 잡았다.
어디선가 아름다운 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음악에 맞춰 한 쌍의 나비처럼 가벼운 몸짓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주변에 갑자기 난장이들이 나타나 함께 춤을 추기 시작했다. 황홀한 시간이었다.
“고 선생! 사유서는 다 작성하고 놀고 있는 겁니까?!”
그 때, 바로 곁에서 들리는 노여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
돌아본 그녀는 다시 한 번 깜짝 놀랐다.
돌돌 말린 머리카락 위에 돌돌 말린 왕관을 쓴 저 사람은 바로…… 교감선생님? 그가 이 쿠키의 나라의 왕이었단 말인가?
당황한 민정의 얼굴을 본 성우가 차갑게 그녀의 손을 놓았다.
“고 선생님, 그렇게 안 봤는데…… 사유서를 써야 할 만큼 큰일을 저지른 모양이군요.”
“아, 아니에요. 그건 그냥 실수였어요!”
“실망했습니다.”
“아니에요! 실수였단 말이에요!”

톡톡.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을 때 민정은 살짝 눈을 떴다. 잠이 들었던가?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온 민정은 어깨를 두드린 상대도 확인하지 않고 언제나 그랬듯 자신의 이미지를 위해 절대 잠을 잔 것이 아닌, 책을 읽은 척했다. 눈을 뜨자마자 쳐다보면 충혈 된 눈에 잘못하면 방심해서 흘린 침도 들킬 수 있기 때문이다.
“고 선생님.”
상대가 다시 한 번 부르자 그녀는 그제야 말끔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왕……자님?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꿈속의 그것과 같은 짙은 색 슈트를 입은 차 선생이 그녀의 등 뒤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할 얘기가 있는데 지금 시간이 있습니까?”
아, 아니다. 이건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 정신 차려!
“지금요?”
“네. 안 그래도 점심시간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 맞다. 지금은 점심시간이었지. 민정은 점심시간에 사유서를 쓰기 위해 제일 먼저 달려 내려가 식사를 마치고 왔던 것이다. 사유서는커녕 조느라 남은 시간을 다 보내긴 했지만. 어쩐지 지금 교무실에 선생님들이 거의 없다 했다.
“네, 무슨 얘긴가요?”
심각한 얘기인가 싶어 그녀는 주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번 토요일에 시간 있으신가요?”
“왜요?”
“클래식 음악 좋아하십니까?”
클래식 음악? 잠자는데 그것만큼 좋은 수면제가 따로 없지. 끄덕끄덕.
“이번에 내한 온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공연 티켓이 생겼는데 함께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네?”
분명 무슨 말을 하는지 들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설마 데이트신청을 하는 것은 아닐 테고…….
“데이트 하자고요.”
“예에?”
마치 말도 안 되는 말이라도 들은 듯 그녀의 음성의 꼬리가 올라갔다.
“선약이 있는 겁니까?”
“그건 아닌데……”
“그럼 같이 가주시겠습니까?”
그녀의 대답이 똑부러지지 않자 그도 조바심인지 짜증인지 모를 무엇인가가 얼굴에 드러났다.
“정말이요?”
“네.”
“왜요?”
아, 정말 혀를 깨물어버리고 싶다. 거기서 왜요가 왜 나오나고요.
“데이트 하는데 관심 외에 다른 이유가 필요한가요?”
이건 뭐지? 데이트하는 건 관심 있으니까 한다는 말인데, 정말인가? 그럴 리가 없는데. 차 선생하고는 회의시간에 나누는 몇 마디 사무적인 말들이 전부였었다. 그것도 장장 1년하고 2개월 동안. 그 긴 기간이 지나고 나서 느닷없이 데이트하자면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토요일에 음악회, 같이 가주시겠어요?”
그는 참을성 있게 다시 한 번 물어왔다.
민정은 또다시 머릿속으로 계산을 했다. 토요일? 어제만 빼면 토요일뿐이 아니라 이번 달 1일부터 말일까지 줄창 약속이란 것이 생겼던 적이 한 번도 없다. 따지고 보면 정말 초라한 인생이다.
“음…… 약속은…….”
하지만 여자라면 무조건 좋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보다는 일단 뜸을 들여 주는 것이 낫다는 것을 수많은 연애소설을 섭렵하며 익히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무조건 튕기다간 튕겨져 나간다는 것도 명심해야 할 사실.
“없는 것 같네요. 그럼 음악회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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