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보다 무서운 것은 그 상처가 남긴 흔적이다….

너무 사랑했기에 다른 모든 건 감내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결혼했다. 그러나…

점점 시들어 가는 아내를 보며 인하는 자신과 있으면 그녀가 자꾸만 불행해지는 것 같아 이제 그녀를 놓아주려고 한다. 사랑하기에 헤어짐을 택한다는 그 말도 안 되는 듯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결국 그는 오늘 그녀에게 이혼을 통보했다.

이제 그만 놔 달라는 그녀의 말 속에 담긴 진심을 알아채지 못한 남편이 정말로 떠나 버렸다. 버리고 가지 말라는 소리 없는 외침은 그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결국 이제 주명에게 남은 것은 텅 빈 집과 인하는 모르고 있는 뱃속의 아기, 그리고 지우고 싶은 흔적뿐이었다.

▶잠깐 맛보기

“만약…… 만약에 내가 임신했다면?”

충격으로 꽉 잠긴 목을 쥐어틀어 겨우 목소리를 짜낸 주명이 마지막 배팅을 시도했다. 마치 극전인 반전을 노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의 긴장된 얼굴 한편에 여유로움이 묻어났다.

주명의 말에 한동안 놀란 표정을 짓던 인하는 그러나 이내 정색을 했다.

“그런 건 옛날 신파극에나 나오는 구질구질한 이야기라고 단정지을 만큼 넌 싫고 좋은 게 분명한 여자야. 난 네 그런 점에 매료되었던 거고. 넌 처음부터 단호하게 구걸하는 사랑은 싫다 했었고, 아이도 마찬가지라고 했어. 나 역시 네가 싫다는 아일 억지로 강요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일단 네 생각을 존중하기로 했었고. 언젠가 시간이 흐르면 다 해결될 거라 생각했었는데, 우린 너무 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것 같다. 이제 와서 이런 이야기 꺼내 봐야 너한테 상처만 줄 뿐이겠지. 그동안도 널 늘 힘겹게 했는데 마지막까지 그러기는 싫다. 위자료는 주식이 정리되는 대로 해결해 줄게. 그동안 나 때문에 너도 고생 많았다.”

“그래…… 당신도 나 때문에 고생 많았어. 부잣집 귀한 도련님께서 2년이면, 그 정도면 긴 시간이었던 거지 뭐…….”

“간다, 나머지 필요한 서류들은 준비되는 대로 연락할게.”

가겠다는 말과 달리 인하의 발은 움직일 줄 몰랐다.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겠다는 듯 그는 그녀에게 기회를 주고 있었다.

“잘 가…….”

주명은 스스로 들어도 소름 끼칠 만큼 냉정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곧이어 낮은 탄식 소리가 들려왔다.

“붙잡지도 않는…… 거냐?”

“조금 전 당신이 한 말, 그새 잊은 거야? 내가 붙잡지 않을 거 알기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었어?”

원망 섞인 눈초리로 인하의 등을 바라보며 주명은 아프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어떤 변명과 궤변을 늘어놓아 봤자 핑계에 불과했다. 어차피 저 남자는 그녀를 버리고 갈 사람이었다.

그녀의 차디찬 말에 더 이상 미련이 없다는 듯 인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

▶목차

1~23, 에필로그

* 이 전자책은 2007년 타출판사에서 출간된 〈흔적〉을 eBook으로 제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