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바다, 1868년 가을

“총을 다룰 줄 아는 농장 책임자를 구한다고 들었소만.”
어둠 사이로 들려 오는 낯선 소리에 엘리사 서턴은 움찔했다. 순간 공포가 온몸을 훑고 지나갔지만, 엘리사는 애써 두려운 마음을 감추려 노력했다.
아무 경고나 소리도 없이, 그림자처럼 불쑥 나타난 이방인.
엘리사는 목장의 저택 입구에 서 있는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방 안에서 새어 나오는 누런 불빛 너머로 거무스름한 윤곽만이 보일 뿐이었다. 모자챙 밑으로 언뜻 보이는, 크리스털처럼 새까맣고 초롱초롱한 눈은 표정만큼이나 냉랭해 보였다.
‘한겨울에 불어닥치는 폭풍우도 이 남자 눈보단 따뜻하겠어.’
엘리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또 다른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었다.
‘그래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 겁이 날 정돈데! 게다가 잘생기기까지…….’
이 남자 옆에 서면, 어떤 남자든 우스워 보이리라.
엘리사는 양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이 남자를 이렇게 유심히 관찰한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엘리사가 알고 있는 남자들이란, 작위나 달고 뻐기는 영국 건달이거나 선원, 카우보이, 마부나 요리사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리고 약탈자들…….
삼촌의 반대를 뿌리치고 영국에서 다시 미국으로 건너온 지 몇 달 되지 않았지만, 벌써 여러 차례 범법자들과 충돌했다. ‘래더 S’ 목장은 루비산에서도 아주 외딴 곳에 자리잡고 있어, 스페인으로 금을 캐러 가는 사람들이나 오리건으로 향하는 여행객들이 자주 신세를 지러 찾아왔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노리는 약탈자들…….
그 중에서도 컬페퍼 형제가 가장 악질들이었다.
‘이 남자야말로 컬페퍼 일당의 적수가 될 만한 사람이야. 그런데…… 컬페퍼 형제를 해치운 다음엔 누가 이 남자를 제거하지?’
엘리사는 속으로 냉소를 보냈다.
“서턴 양?”
나지막하고 굵직한 목소리였다. 엘리사의 불편한 마음을 눈치챘는지, 이방인은 불빛 앞으로 걸어 나왔다.
“글쎄…… 잠시만요.”
엘리사는 앞에 선 남자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감히 이 남자의 요구를 수락할 용기가 자기에게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입술이 바싹 말라 왔다. 입술을 한 번 핥으며 한껏 숨을 들이마셨다. 자신이 원체 충동적이고 무모한 성격임을 잘 알고 있던 터라, 엘리사는 맘속으로 신중해야 한다고 계속 중얼거렸다. 이 남자의 위험스런 분위기에 말려들면 안 되리라. 정신을 집중해 불빛에 모습을 드러낸 남자를 유심히 관찰했다.
굵고 새까만 머리칼이 목덜미까지 내려왔다. 얼굴은 구릿빛으로 잘 그을렸고, 눈가에는 주름살이 어렴풋이 눈에 띄었으며, 잘생긴 입 위로 콧수염이 나 있었다.
몸에 꼭 맞는 검정 바지와 재킷은 깨끗했지만 많이 낡은 게, 그 동안 험한 일을 해왔음을 짐작케 해주었다. 단단한 근육질의 어깨와 늘씬한 허리에 착 달라붙은 연녹색 셔츠도 상태는 마찬가지였다. 목에는 물 빠진 검정색 손수건을 느슨하게 매고 있었다.
남자 바로 뒤에는 말 한 마리가 발을 구르며 코를 벌름거리고 서 있었다. 남자는 엘리사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장갑 낀 손을 뒤로 뻗더니 말의 목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말을 만지는 손은 왼손이었다. 장갑을 끼지 않은 오른손은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으며, 오른쪽 어깨에는 6연발 권총이 매달려 있었다. 총도 남자의 옷처럼 닳긴 했지만 깨끗하게 손질되어 있었다. 주인과 마찬가지로 갖은 풍파를 겪어 온 흔적이 뚜렷했다.
매서운 눈매와 우울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말을 다루는 남자의 손길은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엘리사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걷어채거나 채찍질을 당해도 동물들이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지, 서부 남자들은 대부분 동물들을 함부로 다뤘다.
‘미키가 바로 그런 부류지. 맥 아저씨가 아끼긴 해도, 일손만 딸리지 않는다면 그 거들먹거리는 멍청이를 내쫓아 버렸을 거야. 한데 지금 어디 찬밥 더운밥 가릴 때여야지!’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람이 귀할 때였다.
말이 움직이자, 불빛에 말안장이 드러났다. 안장 양편으로 소총과 엽총이 총집에 든 채 매달려 있었다.
총이나 안장에는 그 흔한 은장식은커녕, 말 주인의 체면을 세워 줄 만한 그럴듯한 장식품도 일체 눈에 띄지 않았다.
안장 뒤에 매달린 침낭 위에는 장교복처럼 보이는 외투 한 벌이 묶여 있었다. 하지만 그 옷에도 계급장이나 장식은 붙어 있지 않았다. 설령 장교였다 하더라도 계급장들을 죄다 빼 버린 것 같았다. 그 모양이 장식물 하나 달지 않은 안장과 흡사했다.
하지만 말만은, 보통 카우보이가 받는 품삯을 3년은 모아야만 살 수 있는, 혈기 넘치고 미끈한 종마였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보통 카우보이가 아닌 게 분명했다. 남자는 옹달샘에서 물을 마시고 있는 육식 동물처럼 평안한 태도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편안해 보여, 충동적인 기질을 가진 엘리사는 더더욱 조바심이 났다.
“이름이 뭐죠?”
엘리사가 불쑥 물었다.
“헌터.”
“헌, 터…….”
엘리사는 그 이름을 천천히 불러 보았다.
“그게 이름인가요, 아니면 직업인가요?”
“뭔들 무슨 상관이오?”
엘리사는 목까지 올라온 말을 꾹 참았다. 자신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닮아 똑똑하긴 한데 너무 저돌적이란 말을 종종 들었기 때문이었다. 엘리사는 순간, 침착한 겉모습 속에 숨어 있을 남자의 끓어오르는 정열과 생명력을 엿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 무모함 때문에 치러야 할 대가가 얼마나 큰지를 이미 뼈저리게 경험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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