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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겨울잠 2
여왕 지음가하에픽2015.01.11
| 판매정가 | : |
|---|---|
| 판매가격 | : 2,500원 |
| 적 립 금 | : 0원 |
| 파일용량 | : 517 KByte |
| 이용환경 | : PC/아이폰/아이패드/안드로이드/타블렛 |
| 독자평점 | :  [참여수 0명] |
| 듣기기능 | :  TTS 제공 |
| ISBN | : 979-11-295-11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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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품 소개
“받아달라고 하지 않겠다. 그저 그대를 좋아하도록 허락만 해준다면, 내가 해줄 수 있는 무엇이든 약속할 수 있소.”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냉동 상태에서 깨어난 반지오. 하지만 열일곱 소녀가 겪어야 할 변화는 너무나도 거대했다! 자신을 보호해주는 방주를 벗어나 새로운 세상에 들어가기로 결심한 그녀는 조심스레 새로운 시작을 향해 나아가는데……. 여왕 작가가 선사하는 SF 판타지 로맨스, ‘겨울잠’!
“공작님은 정말 친절하시네요.”
내 말에 공작이 고개만 돌려 나에게 시선을 주었다. 무겁게 닫힌 그의 입은 무언가 말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어 보여서, 내가 대신 이야기하기로 했다.
입에 무슨 자물쇠를 달았나.
“호수에서 죽을 뻔한 것도 살려주시고, 도나텔라도 고용해주시고, 또 전에 술 마시고 실수한 것도……. 사실, 귀족들은 나쁜 귀족들만 있다고 생각했었거든요.”
“음.”
※ ‘가하 에픽’은 다양한 시대, 색다른 소재, 독특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은 도서출판 가하의 새로운 브랜드입니다. 로맨틱한 판타지가 가득한 가하 에픽, 지금 만나보세요!
2. 작가 소개
여왕
▣ 출간작
겨울잠
3. 차례
#03.
#04.
#05.
#06.
#07.
#08.
#09.
#10.
#외전 1.
4. 미리 보기
도나텔라가 떠나고, 나는 오랜만에 세바스찬을 호출했다.
“세바스찬.”
[네. 주인님.]
도나텔라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나는 틀림없이 미친 사람이 되었겠지. 통신의 존재를 알 리가 없으니. 그녀와 함께 있을 때는 방주와 연결할 수가 없었기에 세바스찬과 연결하는 것은 꽤 오랜만이었다.
“내가 있는 곳 지금 위치추적 했지?”
[선장님의 위치는 언제나 추적되고 있습니다.]
“이 밑으로 굴을 하나 뚫어서 카타콤까지 잇고 싶은데, 얼마나 걸릴까?”
[약 세 시간 정도 소요됩니다.]
생각보다 너무 짧아서 놀랐다. 세 시간이면 내가 카타콤에서 여기까지 그냥 걷는 시간보다 훨씬 짧은 시간이었다. 내가 자고 있던 사이 과학이 정말 많이 발전했구나.
“지금 당장 뚫을 수 있어?”
[가능합니다.]
의외였다. 내가 자고 있을 때 방주는 나의 생명 유지와 자신의 유지보수를 위한 시스템을 제외한 모든 것을 OFF 시키고 있었기에 갑자기 재가동하려면 여간 준비할 게 많은 게 아니다. 나는 과학자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지만, 안드로이드를 가동시키려고 했더니 안드로이드의 배터리 시스템, 제어 컴퓨터, 제어 컴퓨터의 제어 컴퓨터, 제어 컴퓨터의 에너지 시스템, 안전장치, 안전장치의……. 여기까지. 그래서 안드로이드 시스템은 여덟 달이나 기다려야 사용할 수 있었다.
“어떻게? 안드로이드는 여덟 달이나 있어야 했잖아.”
[지하수를 끌어올리기 위해 ON 상태로 대기 중인 굴착기가 있습니다.]
그렇구나. 문득 나는 내가 계속 서 있었음을 깨닫고 침구가 없어 나무로 된 뼈대만 앙상한 침대에 앉았다. 이 방은 집에 딸린 침실로, 침대와 탁자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누군가가 ‘누구시죠?’ 하고 들어설 것 같지만 여기는 내 집이다. 아직은 좀 어색하지만.
“안드로이드는 이제 얼마나 있으면 쓸 수 있어?”
이 집은 지하를 포함해서 3층까지 있는 집이었는데 지하가 창고, 1층이 가게, 2층이 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2층은 벽난로가 놓여 있는 거실과 방이 세 개나 있었는데 하나는 지붕창이 딸린 다락이었다. 아직은 여름이라 그리 필요가 없지만, 겨울이 되면 벽난로만으로는 난방이 부족할 것 같다. 그 외에도 부족한 점이 많았지만, 가장 부족한 건 역시 인기척이다.
방만 세 개에 거실, 창고에 가게까지 딸린 커다란 건물에 달랑 나 혼자밖에 없다는 건 이성적으로 아무리 내가 초진동 나이프에 강도를 3초 안에 폭사시킬 수 있는 가드 위성을 갖고 있다고 해도 좀 무섭다. 귀신이나 강도가 무서운 게 아니라 그저 혼자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무섭다는 말이다. 절대로 절대로 그럴 리는 없지만, 가드 위성으로도 감당이 안 되는 무서운 괴물이나 그런 게 나올지도 모르고.
이런 공포는 내가 카타콤에서 홀로 있었을 때 늘 나를 짓누르던 그것과 닮아 있었다. 고독처럼 음울하고 추위처럼 나를 움츠러들게 하는 것. 외로움과도 닮아 있고, 사실 이 세상에 인간 따위는 없는데 내가 미쳐버려서 나를 자폐해버린 게 아닐까 하는 무서움. 이 모든 게 사실 다 꿈이 아닐까 하는 마음.
아직도 나는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눈을 뜨고 시야를 확인하기 전까지 상상을 한다.
눈을 뜨면 하얀 병원 지붕이 보이고 엄마와 아빠가 나를 반기는 상상. 그리고 눈을 뜬 후 그것이 그저 상상일 뿐이라는 걸 깨닫게 되면 눈물이 날 만큼 가슴이 아프지만 그래도 그 상상을 그만둘 수 없다. 그만두고 싶다고 그만둬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자면서 몇 개의 꿈을 꾸든, 나의 마지막 꿈은 언제나 그것이었다.
그 여운에 젖어 상상으로 꿈을 끌어오는 것을 멈추는 건 내 힘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또 이런다. 혼자 있으면 금세 이런 생각에 빠져버린다. 도나텔라와 함께 있으면서 이제 완전히 떨쳐내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그녀가 떠나고 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든다. 이런 우울함을 이제 누가 떨쳐줄까. 이 가게에 홀로 남게 되면 나는…….
[선장님?]
생각에 빠지는 바람에 세바스찬의 말을 놓쳤다.
“아, 뭐라고 했어?”
[안드로이드가 완전히 기동하는 데에는 한 달 반 정도 걸립니다. 안드로이드의 모드를 정하시겠습니까?]
“모드?”
[안드로이드는 요원 경호, 육아, 가사, 단순 업무, 오락, SEX, 인명 구조, 계산원, 탐사, 의료 등 많은 업무를 담당할 수 있는 활용도 높은 메이드로서, 사용자에게 친숙함을 주기 위해 다양한 인성의 모드를 제공합니다.]
잠깐, 중간에 뭔가 이상한 게 있었던 것 같은데.
“어떤 모드가 있는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업무에 관련된 반응만을 하는 normal 모드가 있으며 부모나 친인, 친구나 연인 등으로 관계 설정을 하시고 그에 따른 성격을 지정하실 수 있습니다.]
“완전히 똑같이? 사람처럼?”
[다만 설정된 성격은 지나친 몰입을 방지하기 위해 로봇 법률에 따라 한계를 가집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외형도 내가 정할 수 있어?”
[가능합니다. 하지만 오리지널의 인권을 위해 90퍼센트 이상의 싱크로는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 법적으로 금지되었다는 말이 조금 우습다. 이제 법원도, 판사도 아무도 없는데 법률에 따라야 하다니.
“그럼, 엄마 아빠를 만들어줄 수 있어?”
[불가능합니다.]
“왜!”
소리치고 나서 깜짝 놀랐다. 생각지도 못한 큰소리가 나왔다. 나도 모르게 너무 흥분한 거다. 하지만, 흥분할 만한 일 아닌가.
[사망한 혈연관계가 있는 인간의 안드로이드는 소유할 수 없습니다.]
“왜, 왜?”
[사용자가 100퍼센트로 정신붕괴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미친다는 거야?”
[그렇습니다.]
그 말에 머리가 조금 식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안드로이드는 마치 부모님이 살아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주겠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건 내가 가장 잘 안다. 결국 잠에서 깰 때마다 하는 상상을 매 초, 매 분 매우 구체적으로 마주할 수 있게 되겠지. 하지만 그건 진짜 부모님이 아니니, 진짜 부모님이 어떻게 되었는지만 더욱 자각시켜줄 뿐이다. 그리고 미치지 않는 이상 그 사실을 잊을 수는 없을 테고, 나는 결국.
“그럼, 혈연관계가 없으면 돼?”
[가능합니다.]
부모님이 아니라면, 혈연관계가 아니라면 가능하단 말이지.
망설일 필요도 없었다. 누구를 곁에 둘지 당연한 것처럼 떠올랐으니까. 고민할 필요도 없다. 단 한 번도 만나본 적은 없지만, 영상 속에서 언제나 나를 소중한 듯 바라보던 그 사람. 실제로 한번 보고 싶었다.
“반나오. 혈연관계는 없어. 이 사람으로 외형을 만들어줘. 나와의 관계는 오빠, 그리고 성격은 다정하게.”
나의 오빠. 나만의 오빠. 다정하게 나를 챙겨주었던 그라도 실제로 두고 싶다. 부모님이 안 된다면, 그라도.
단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이지만 안드로이드의 모습으로라도 보고 싶었다. 영상이 아니라 실제 모습으로. 사실 원래대로라면 동생이자 오빠지만, 나를 돌봐줘야 할 안드로이드니까 오빠인 게 더 어울릴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완성되는 대로 이리로 보내줘. 그리고 비누를 만들어줘. 그 외에도 만들 것이 많으니까 팩토리를 활성화 시켜주고.”
[얼마나 말입니까?]
“글쎄, 일단은 식물성 기름으로 100그램짜리 2천 개 정도만 만들어서 보내줘. 얼마나 걸려?”
[원료를 채취해야 하므로 약 하루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뭐? 왜 그렇게 짧아?”
적어도 한 달은 예상했었는데 너무 짧다. 그래서 싫다는 건 아니고, 오히려 좋다.
내 질문에 세바스찬은 길고 긴 대답을 해주었다. 대답이 아니라 거의 강의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6개월 만에 날림으로 앉은 선장자리라 아직 부족한 게 많구나.
강의에 따르면, 안드로이드와 로봇은 그 형태와 범용성의 차이에 있다. 로봇은 단 하나의 직무만을 위해 만들어졌다. 그 역할을 수행하기에 가장 적합한 형태를 하고 있으며 그 외의 작업이 불가능하다. 누르는 일을 하는 로봇은 누르는 일만, 흡입하는 일을 하는 로봇은 흡입만 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안드로이드도 넓은 범위에서는 로봇이지만, 그 형태가 인간과 같고 인공지능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단순 로봇과 차별된다.
로봇은 세바스찬의 수족과 같고, 안드로이드는 세바스찬의 명령을 받는 하인과 같다고 생각할 수 있다. 로봇은 자신이 스스로 생각할 수 없지만, 안드로이드는 세바스찬이나 내가 목표를 정해주면 자신이 스스로 인공지능을 이용해 그 목표를 처리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바스찬에게 딸린 자동차나 기타 등등의 수많은 로봇들은 안드로이드에 비해 큰 준비 시간이 들지 않지만 아예 들지 않는 것은 아니고, 개중 주요 장치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도 있었다. 그 시간도 대부분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서 방전된 에너지를 채우거나 사용 전에 필수적인 안전 점검을 하는 데에 드는 시간이 전부고, 몇 중의 안전장치와 제어 컴퓨터의 준비가 필요한 안드로이드와는 비교할 수 없다.
한마디로, 안드로이드가 준비하는 데에 제일 오래 걸리고 나머지는 길어봐야 이삼일이면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원료 채취 계속해줘. 굴을 뚫는 대로 내 지하 아래에 공간을 만들어서 거기 비누 쌓아두고. 내가 아니면 못 들어가도록 보안장치도 하나 달아줘. 비누도 계속 만들어. 한, 10만 개 정도까지. 만든 건 방주에 쌓아둬. 그리고 방주에 썩은 음식들이랑 그런 것들 다 청소하고 창고도 만들어줘.”
[알겠습니다.]
그 외에 렌즈 형태로 삽입한 컴퓨터에서 입체 영상을 띄워 직접 손으로 주물럭거려- 진짜 만질 수 있는 건 아니다. 내 눈에만 보이는 영상이고 손의 움직임을 감지해서 형태를 변형할 뿐이다- 비누의 형태나 향, 훗날을 위한 다양한 원료 채취에 대한 명령과 자세한 지시사항을 내리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났다. 여름의 해는 긴 대신에 지는 속도가 대단히 빨라서, 초저녁인가 싶으면 어느새 어두워져 있다. 게다가 배도 너무 고프다. 당연하지만 이 집에는 먹을 것이 없었다.
아무래도 도나텔라가 있는 여관까지 가서 함께 밥을 먹어야겠다 싶어 집을 나섰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이 시대의 잠금장치로 문을 잠그고 투박한 열쇠를 손에 들고 나오니 밖은 정말로 완전히 밤이었다. 쏟아질 것 같은 별 하늘은 제대로 된 전등 하나 없지만 이 밤이 그리 무섭지 않은 이유였다.
이제 와서 1억 년 전 세상이 너무나 그리워 보고픈 엄마 찾아 우리 함께 떠날 수도 없는데, 이렇게 이 시대의 장점을 찾아서 적응하는 게 좋지 않겠는가.
최대한 대로로 걸으려고 했지만 중간부터는 어쩔 수 없이 골목길로 들어서야 했다. 도나텔라가 묵고 있는 여관이 골목을 지나야만 도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칠흑 같은 밤에, 전구 하나 없는 골목길을 걷는 건 굉장히 무서운 일이지만 나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누가 나를 해치겠어. 아무도 나를 해칠 수 없어.
그렇게 다잡은 마음은 갑자기 내 반대편에서 들리는 발걸음 소리에 딱 얼어붙어버렸다. 약 세 명 정도 되는 듯한 발소리.
저벅 저벅 울리는 소리는 아무리 봐도 여자의 조심스런 발걸음 소리는 아니었다. 내 걸음이 느려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곧 횃불을 들고 모퉁이를 돌아 나타난 남자 셋. 얼굴이 아주 낯익다.
누구지?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이 시대에서 내가 만난 사람이라고 해야 큰 숫자가 되지 않는다. 제법 잘생긴 얼굴이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상대도 나를 발견했는지 멈춰 섰다. 그들이 횃불을 들고 있던 탓에 나는 그들을 볼 수 있었지만 그들이 어두운 골목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려면 그 횃불이 나를 비출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와야 했던 것이다.
“어라? 이 아가씨는…….”
“어엇?”
그 반응에 더 의아해졌다. 내가 그들을 알면 몰라도 그들이 나를 안다는 건 조금 신기한 일이다. 물론 오늘은 하루 종일 얼굴을 내놓고 다녔으니 내 얼굴을 알지도 모르지만, 이들의 반응은 그런 종류가 아니었다. 지나가면서 봤던 예쁜 여자를 또 만났네. 가 아니라, 아니 왜 얘가 여기에 있어? 하는 반응인 것이다.
거기까지 깨닫고 나자 남자들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도 그 정체를 짐작하는 데에 무리가 없었다. 내가 이곳에 있는 걸 이상하게 여기는 남자. 당연히 나를 팔아넘긴 인신매매범이 아닌가.
이 도시에 사는 이상 언젠가 한 번은 마주치리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나는 아직 각오도 준비도 안 되었단 말이다. 멀쩡히 길 가다가 사람 팔다리를 잘라내고 도망쳐야 할 상황에 처했으니 그저 난감할 따름이다. 나도 모르게 회피하고 싶은 심정으로 주춤주춤 물러서자 그걸 어떻게 해석했는지 남자들의 얼굴이 대번에 유들유들하게 변했다.
잘생긴 그 얼굴에 걸린 표정은 몹시 보기가 좋았지만, 그렇다고 이 난감한 상황이 나아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이 미남들을 장애인으로 만들어야 한단 사실에 가슴이 아팠다. 뭔가 좀 더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고 상황을 피하고픈 마음에만 더욱 부채질을 했을 뿐.
“아가씨, 밤중에 이렇게 다니면 무서운 일 당해.”
“그러엄. 전에도 그렇고, 아가씨는 골목길을 참 좋아하나 봐?”
“나아쁜 사람 만나면 어쩌려고 그래, 응?”
세 남자가 점점 다가온다. 자고로 쫓아오면 도망치고 다가오면 물러나는 것이 사람 심리인지라, 나는 나도 모르게 더욱 뒷걸음질 쳤다. 앞의 세 남자의 표정이 마치 토끼를 굴 안에 몰아넣고 즐기는 코요테처럼 즐거워 보였다. 하지만 나는 만렙 토끼인데.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말아요!”
기껏 경고했더니 남자가 능글맞은 목소리로 받아쳤다.
“왜, 해칠까 봐 무서워?”
그래. 해칠까 봐 두렵다. 내가 당신들을.
자신들이 지금 만렙 토끼를 쫓고 있는 줄도 모르고 남자들은 여전히 실실 웃으며 다가왔다. 다가오는 만큼 뒷걸음질 치다 보니 등에 뭐가 턱 부딪힌다. 뒷걸음질로는 뒤를 볼 수 없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내가 부딪힌 것은 막다른 벽이나 골목이 아니었다. 조금 푹신하고 벽과는 다른 단단함. 사람의 몸이었다.
이런, 뒤에도 이놈들의 일행이 있었나!
미처 생각지 못한 상황에 소스라치게 놀라 부딪친 사람을 확인도 않고 확 떠미는데 커다란 손이 손목을 턱 하니 잡아온다. 나는 꺅 하고 비명을 지르는 대신 허리춤의 나이프에 손을 대었다. 그리고 막 뽑아들려는 순간, 로브를 푹 덮어쓴 그 형상이 몹시 낯익다는 걸 깨달았다. 설마.
“공작님?”
그는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이 왜 여기에 있지? 설마 공작이 나를 인신매매했나? 그럴 리는 없지만 설마 나를 마중이라도? 아니, 그랬으면 여관이 있는 방향인 내 앞에서 나타나야지 왜 내 뒤에 있단 말인가. 내 뒤를 쫓아 스토킹이라도 하지 않은 이상 말이다.
“정말 공작님, 맞나요? 얼굴을 보여주세요.”
방심하게 하려고 사기 치는 것은 아닌가 했는데, 공작은 조금 망설이다가 내키지 않는 손짓으로 두건을 벗었다. 찬란한 은발은 태양빛을 반사하던 낮에도 매우 아름다웠지만 이렇게 밤하늘 아래에서 보면 마치 마력을 품고 있는 것 같다. 조금 위험하고 신비로운, 유혹의 마력.
“뭐야 이건?”
“야, 제프. 난 네가 세상에서 제일 못생겼다고 생각했는데 너보다 더한 놈이 있네.”
“난 좀 자신을 가져도 될 것 같아. 저 얼굴에 비해서 나는 미의 남신이다. 남신.”
내 일행으로 보이는 공작이 나타나자 잠시 멈칫했던 셋은 그래봐야 여자 하나와 남자 하나, 자신들이 더 세다고 결론 내렸는지 공작의 외모를 조롱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대로 생활하는 걸 찍어서 내다 팔기만 해도 화보가 될 것 같은 남자들이 서로를 추남이라고 헐뜯는 모습은 돈 주고도 보기 힘든 광경이라, 나는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아는 사이인가?”
“그렇긴 한데…….”
“별로 좋은 사이로는 보이지 않는군.”
“그게, 저를 인신매매했거든요.”
그 순간, 공작의 눈매가 확 드러나도록 변했다. 무표정해서 차가워 보이던 그 얼굴이 누군가 불이라도 끼얹은 게 아닌가 할 정도로 분노로 뒤덮인 것이다. 서늘해 보이는 잿빛 눈동자가 그렇게 이글이글 타오를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공작은 그야말로 ‘태워 죽일’ 것 같은 눈빛으로, 아직도 자신의 외모를 조롱하고 있는 남자들을 노려보았다. 저기, 그런다고 해도 3:1이라는 상황이 변하지는 않는데요. 공작님.
내가 초진동 나이프를 들고 날뛸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나는 공작이 그들을 상대하는 동안 도망쳐서 사람들을 불러올 생각을 했다. 다행히 여관은 여기서 그렇게 멀지 않아서 잘만 뛴다면 잡히지 않고 도착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 사이 공작이 맞아죽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조금 들긴 하지만, 공작의 튼튼한 몸과 저들이 큰 무기를 갖고 있지 않으니 죽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그를 도와서 앞의 남자를 토막 치는 건 진짜, 절대로 무리다. 차라리 혼자 있다면 모를까 공작까지 같이 증거 인멸을 하려는 마음을 먹지 않는 이상.
공작이 나의 수상함을 눈치 채면 도나텔라도 눈치 채게 된다. 그건 아직 견딜 수 없었다. 차라리 공작을 죽여 도나텔라가 직장을 잃는 편이 더 낫다. 돈이라면 내가 벌게 해줄 수 있으니까. 공작의 멋진 얼굴이 사라지는 건 안타깝지만, 미남이야 길거리에 발에 차이도록 많은 게 미남이니까.
내가 자신을 돕기는커녕 몸을 뺄 궁리를 하는 것도 모르고 공작은 일단 나를 제 등 뒤에 감추었다. 그리고 낮게 선언했다. 예의 그 딱딱하고 멋있는 목소리로.
“그대들은 제국 내에서 법을 어겼다. 나는 케이아스 듀크 에르마론 공작이고, 그대들을 즉결심판하겠다.”
세 남자가 갑자기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러더니 곧 험악한 얼굴로 허리춤에서 쇠붙이를 꺼내들었다. 이런, 저러면 공작이 죽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걱정하는 사이, 남자들이 공작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더 두고 볼 것 없이 그대로 뛰쳐나갔다. 무기를 꺼낸 이상, 상황이 더 위험해진 것뿐, 우리 둘로는 소용이 없다는 사실은 여전하다. 그래서 달렸다. 한 네 발짝쯤. 그들이 공작을 덮치는 사이, 나는 그들보다 월등히 작은 체구를 이용해 옆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혹시나 나를 잡으러 올 남자를 피해서 전속력으로 달리려고 했다. 등 뒤에서 짧은 피륙음이 들리지만 않았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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