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살아서 이 작은 천국을 얻고자 죽어서 지옥에 갈 것을 선택했다.”

아일 에드가 클레이모어.

그리고 그의 기억을 가진 남자, 서정현.

“만약에 아니라면요……. 제가 그녀가 아니라도 이렇게 잘해주실 건가요?”

라야 윈터스.

그리고 모두가 그러하듯 천칙(天則)에 의해 기억을 묻어버린 여자, 한지은.

“아일이라고, 한 번만 불러봐주겠어?”

여러 감정이 뒤섞여 모호한 표정이 그를 낯설게 만들었다.

지은은 그의 눈을 피해 넥타이를 만지작거리는 손에 시선을 고정했다.

“싫어요.”

전생의 기억과

현세의 추억이 교차하는 곳,

나달의 언덕.

2. 작가 소개

아드소

여름에 태어났지만 더위에 약합니다. 여름밤은 좋아합니다.

제가 활자로 옮긴 인물과 세계가 다른 이들에게도 잠깐의 재미, 또는 오랜 즐거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3.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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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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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49

4. 미리 보기

“한지은 씨는 사귀는 사람 있어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딸꾹질이 나왔다. 지은은 입을 가리며 입안에 든 커피를 삼켰다. 그리고 질문을 한 사람을 보았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자 직원이 지은을 보며 반듯한 미소를 지었다. 며칠 전 진오가 같은 부서 사람이라며 소개해준 남자였다.

지은은 대답을 망설이며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커피를 마시는 진오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옆에 서 있는 강희가 호기심 어린 눈길로 지은의 얼굴을 살폈다.

종이컵으로 입술을 가리며 지은이 말했다.

“네. 사귀는 사람, 있어요.”

“아아.”

남자 직원은 노골적으로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아직 미련이 남은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혹시 무슨 일 하는 사람인지 물어봐도 돼요?”

“그냥…… 평범한 사람이에요.”

“으하하하!”

진오가 뜬금없이 과장된 웃음을 터뜨렸다. 사람들이 의아한 눈초리로 그를 보았다. 진오는 의뭉스럽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맞아. 평범한 사람이지. 야밤에 만두를 사 오는.”

“진오 씨도 아는 사람이야? 우리 회사 사람?”

남자 직원이 진오 쪽으로 몸을 돌리고 섰다. 진오가 키득대며 그를 돌아봤다. 그러나 지은과 눈이 마주치고는 크게 벌렸던 입을 다물었다. 지은은 입술을 꾹 다물고 엄지로 자신의 목을 그었다. 진오는 헛기침을 하고 남은 커피를 마셨다.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에 잠깐 눈을 붙이려고 지은은 강희와 헤어져 혼자 여자 휴게실로 향했다. 휴게실이 있는 층은 한밤의 병원 복도처럼 조용했다.

지은은 바닥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걷다가 창 쪽을 보았다. 통유리를 통해 도시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지은이 비상구 문 옆을 지나는 순간 갑작스레 문이 열렸다.

누군가가 그녀를 뒤에서 안아 비상계단 쪽으로 잡아당겼다. 지은이 비명을 지르려고 하자, 커다란 손이 그녀의 입을 막았다.

쿵.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텅 빈 복도에 울렸다.

“휴게실 가던 길이었지?”

정현이 그녀를 어깨에 둘러멨다. 지은이 다리를 버둥거리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이러지 마요! 그냥 내 발로 갈게요!”

“싫어.”

토라진 소년 같은 말투.

정현은 지은이 그의 얼굴을 못 보게 되자 표정을 지우고 대신 목소리에 표정을 담아 대꾸했다. 지은은 그의 어깨를 짚고 일어서려고 시도해봤지만 그럴 때마다 정현이 그녀의 다리를 추켜올리는 바람에 다시 머리를 거꾸로 하고 고꾸라졌다. 지은은 될 대로 되란 심정으로 두 팔을 늘어뜨리고 기운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 가는 건데요?”

“자러.”

아, 자러?

지은은 한숨을 내쉬고 주먹으로 그의 등을 힘없이 한 대 쳤다.

“농담이 아니라, 지은 씨가 옆에 있으면 편히 잘 수 있는 것 같더라고.”

이런 말을 하고서, 정현은 정장 재킷을 벗고 넥타이를 풀었다. 지은은 얼굴로 날아오는 넥타이를 받아 들고 그가 셔츠 단추를 푸는 것을 지켜봤다. 길고 우아한 손가락이 단추를 풀어헤쳤다. 맨 위에서부터, 차례대로, 하나. 또 하나.

세 번째 단추를 풀던 손이 멈칫했다.

지은이 똥그란 눈으로 그의 손에서 얼굴로 시선을 들어 올렸다. 정현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의 입가가 짓궂게 치켜 올라갔다. 지은은 입을 멍청히 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정현이 말했다.

“미안. 눈빛이 웃겨서 그만.”

방을 나가려는 지은과 붙잡는 정현 사이에 승강이 아닌 승강이가 벌어졌다.

잠시 뒤, 정현은 긴 의자에 누워 바로 잠이 들었고, 지은은 푹신한 패브릭 소파에 정자세로 앉아 눈을 말똥말똥 뜬 채 이십여 분을 보냈다.

지은은 정현이 건넨 넥타이를 만지작거리며 방 안을 둘러봤다.

언젠가 들른 적이 있는 정현의 집 거실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인테리어였다. 침대 형태의 커다란 패브릭 소파가 있고, 작은 테이블이 있고, 한쪽 벽에는 두 겹으로 된 슬라이딩 책장이 들어서 있었다. 바닥은 나무마루. 소파와 테이블 밑에는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인테리어만 봐서는 도저히 도심에 우뚝 솟아 있는 회사 빌딩 내부라고 볼 수 없었다. 이 비밀스러운 장소는 문에 떡하니 ‘관계자 외 출입 금지’란 팻말을 붙이고 사장실 바로 밑에 자리하고 있었다. 정현은 이곳이 ‘머핀 타워에서 사장이 누릴 수 있는 유일한 특권’이라고 했다.

“잠이 안 와?”

지은이 멈칫하며 정현을 돌아보았다. 정현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잠이…… 다 깨버렸네요.”

지은은 손을 모아 무릎 위에 놓았다. 정현이 고개를 돌려 지은을 보았다.

“한 번만 불러주겠어?”

그의 목소리가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다.

“아일이라고, 한 번만 불러봐주겠어?”

여러 감정이 뒤섞여 모호한 표정이 그를 낯설게 만들었다.

지은은 그의 눈을 피해 넥타이를 만지작거리는 손에 시선을 고정했다.

“싫어요.”

“싫어?”

“네. 싫어요.”

되도록 장난스럽게 말하려고 했다. 심란한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부러 미소를 지어보았지만 입가가 굳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정현이 의자에서 일어나 곁에 와 앉는 것도 싫었다.

지은은 살짝 몸을 들어 소파 끝으로 피했다. 그녀는 좋아하는 사람들과 있을 때에는 침묵을 어색해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 자리가 불편했다. 정현과 있는 것이 아니라, 꿈속의 그 남자와 함께 있는 것 같아서.

정현이 낯선 남자처럼 느껴졌다.

한참 뒤 지은이 말했다.

“점심시간 다 끝나가요.”

그리고 넥타이를 두 손으로 들어 보이며 정현에게로 바싹 다가가 앉았다.

“제가 넥타이 매줄게요.”

다가가니까 도망칠 때는 언제고.

정현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

“넥타이 맬 줄 알아?”

“엄마가 하는 거 옆에서 봤어요.”

“언제? 이십 년 전에? 잠깐만. 단추부터 잠가야지.”

“아.”

지은은 넥타이를 무릎에 내려놓고 정현의 셔츠 단추를 채우기 시작했다. 처음엔 괜찮았는데 한 번 만에 채워지지 않자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 뒤로는 손가락 끝에 기름이라도 바른 것처럼 단추가 손에서 자꾸 미끄러졌다. 지은이 말했다.

“다른 데 좀 쳐다봐요.”

“그동안 지은 씨는 날 실컷 뜯어보고?”

단추에 집중하고 있던 지은이 눈을 들어 그를 보고는 설핏 미소를 지었다. 지은은 정현이 짓궂게 굴거나 유들유들 말하는 것이 좋았다. 꿈속의 남자에게선 그런 모습을 찾아보기 힘드니까.

아일은 가볍고 밝은 느낌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는 매사에 진지하고 빈틈이 없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엄격한 남자였다. 지은에게 정현과 아일은 완전 별개의 인간이었다.

지은은 제대로 옷깃이 여며졌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셔츠 목깃을 세우고 넥타이를 걸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지은은 넥타이를 붙잡은 채로 상체를 뻗어 휴대전화를 보았다. 그녀를 찾는 수영의 문자였다. 선망하는 선배의 문자에 지은은 넥타이를 매다 말고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현 씨, 미안해요. 가봐야겠어요.”

그러고는 정현이 미처 인사할 겨를도 없이 방을 나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