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그대는 평생 나 외의 남자 품에는 안기지 못할 것이다. 내 허락 없이는 절대로.”

아란국 도한제의 유일무이한 외동딸 비(庇) 공주. 갑작스런 황제의 사망 이후, 황위를 이어받는 동시에 혼례를 치르게 된다.

그러나 신하들은 그녀의 정인이었던 연(戀)이 아닌 검은 잎새 가문의 장자 휘(揮)를 정실 지아비로 두라고 강요한다.

단지 권력에 눈이 멀어 혼인을 택한 줄 알았던 휘는 첫날밤 비에게 거부할 수 없는 언령을 내리는데…….

“나를 미워하여도 좋으니,”

나지막한 저음의 목소리. 입술에 대고 있는 검은 머리카락.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

“나를 떠나가지는 마라. 미워해도, 내 곁에서 미워하여주길 바란다. 내 눈앞에서, 내 손이 닿는 곳에서, 내가 말할 수 있는 거리에서, 나를 실컷 미워하여도 좋다. 그저…… 떠나지만 말아다오.”

2. 작가 소개

한하연

쓰는 일이 좋아서 시작했다가 지금도 쓰고 있는 평범한 글쓴이.

동화와 귀여운 걸 좋아하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면도 있는 그런 사람.

▣ 출간작

그녀는 수학을 배운다(ebook)

엘핀느의 꽃(ebook)

붉은 벨벳 위 하얀 진주 한 알(ebook)

달콤한 말 세 방울(ebook)

푸른 단검과 흰 장미(ebook)

하우스(ebook)

맑은 하늘 푸른 잎새(ebook)

목련화(ebook)

루비아스 마티아스(ebook)

그해 여름, 우리는 이혼했다(ebook)

로맨스는 없다(ebook)

비밀의 숲(공저)

3. 차례

#12. 균열(龜裂)

#13. 경고(警告)

#14. 의심(疑心)

#15. 파국(破局)

#16. 접점(接點)

#외전. 선녀, 내려오다

#외전. 만약에 (현대)

4. 미리 보기

연이 떠난 후, 비는 곡기를 끊었다.

첫날은 식사를 하지 않는 비에게 경이 간곡히 설득하여 물 몇 모금과 미음 몇 숟갈 정도는 입에 넣었다. 하지만 둘째 날부터는 경의 설득도 먹히지 않았다. 경이 어쩔 수 없이 억지로 일으켜 강제로 먹이는 물 몇 모금이 다였다. 그마저도 열의 아홉은 실패하였다. 비는 아예 입에 들어온 모든 것을 뱉어버렸다. 어의가 와도 아무것도 삼키려 하지 않는 비에게 약을 먹일 수 있을 리 만무하였다. 게다가 비는 탕약에 심한 거부증마저 있어 더욱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마음의 병입니다. 화가 가슴을 완전히 덮었군요. 탈수가 올 수 있으니 물이라도 드시게끔 해야 합니다.」

하지만 비는 그 모든 말이 자신과 관련도 없는 듯 그저 눈을 감고 미동도 없이 누워 있을 뿐이었다. 업무에서 손을 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행히 가장 큰 문제였던 광적 지방의 일은 정리되는 중이었고, 전체적인 운영은 당분간 특이할 만한 일은 없었다. 연이 떠난 자리는 휘가 자연스럽게 메워 중앙 업무는 그로 인해 매끄럽게 돌아간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비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었다. 경은 타는 속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저번의 소란 후 비가 눈을 떴을 때 비가 한 말은 단 하나뿐이었다.

「당장 저자를 내 처소에서 나가게 해! 경!」

휘를 향한 날카로운 일갈에 휘는 그답지 않게 순순히 물러섰다. 그러나 그 이후의 행보는 마치 죽기를 결심한 사람과 똑같았다.

“마마. 어째서 이러시는 겁니까. 아주 조금이라도 음식을 드셔야 합니다. 마마께서 이리 쓰러지시면 누가 이 나라를 통치한단 말입니까!”

그러나 경의 외침에도 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귀찮다는 듯이, 손만 내저을 뿐이었다.

“조금만 쉬게 해줘…….”

비는 그저 그 말만을 하였다.

비는 먹지 않을 생각은 아니었다. 굶어 죽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냥 그저 가만히 있고 싶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먹히지 않았고 가슴은 마치 돌처럼 굳어 답답하였다. 경이 하는 말은 다 맞는 말이었다. 연도 자신이 이러는 것을 원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안다. 그가 가 있는 시간은 길다 하면 길고 짧다 하면 짧다.

그런데 왜 자신은 이렇게 하고 있는가? 비도 알 수 없었다.

그가 돌아오고 나서도 우리는 괜찮은 걸까? 그는 그저 사랑할 수 있는 자리에 있게 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이런 내가 그럴 잡아도 되는 걸까? 저번의 상처보다 더한 상처를 그에게 입힐지도 모른다.

어쩌면 정말 영영 연을 잃어버릴지도 몰라.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몰라.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지만, 홀로 침소에 누워 있으면 손가락 상처의 통증처럼 그것이 진실처럼 느껴졌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

아무것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그는 나에게 소중한데, 잠시가 아닌 영원히 잃어버릴지도 몰라.

경이 억지로 잡고 물을 먹이면 비도 그녀의 의사에 따라주고 싶었다. 그러나 물마저 너무 쓰고 모든 것이 너무 힘겨웠다. 간신히 먹고 나면 넘길 수가 없어 뱉고 말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도 없었다.

그냥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창문도 모조리 닫았다. 창도 천으로 가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알 수 없는 시간만 흘러갔다. 낮인지 밤인지도 모르는 시간에 눈이 뜨이면 눈을 떴고 눈이 감기면 그냥 잤다. 간간이 궁녀들이 와 그녀를 씻기고 옷을 갈아입혔다. 소화와 연희가 근심 어린 목소리로 뭐라 진언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너무 괴로워서 그래.

쉬고 싶어서 그래.

하지만 그녀가 하는 행동은 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죽이는 짓이었다. 마음에 여러 줄로 가 있던 균열을 메워주는 이가 떠나자 순식간에 무너져버린 것이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아는데 어쩔 수가 없어.

어둠 속에서 비는 눈물조차 흘리지 않은 채 가만히 있었다. 익숙한 무력감이 어둠과 같이 그녀를 내리눌렀다.

그때였다.

문이 열렸다.

빛이 들어오고 누군가 서 있었다. 경보다 큰 인영. 아아. 관심 없다. 비는 컴컴한 어둠 속에 오래 있어 들어온 빛에 잠시 인상을 찌푸렸을 뿐 눈길조차 그쪽으로 돌리지 않았다.

좀 더 혼자 있고 싶어.

“이렇게 있을 줄 알았다면 그대의 가라는 말에 그리 쉽게 가지 않았다.”

잊을 수 없는 목소리.

증오스런 인간.

휘였다.

비는 벌떡 일어나려 했으나 갑자기 움직이자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녀는 몸을 채 반도 일으키기 전에 다시 풀썩 쓰러졌다.

“그대가 이렇게 바보 같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어느새 가까이 온 휘가 침상 옆에 놓인 잔을 들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초리로 쳐다보는 모습을 보자 비는 부아가 치밀었다.

“먹고 싶지…… 않아. 돌아가…….”

휘가 하려는 바를 깨닫고 비가 고개를 획 돌린 채 웅얼거렸다. 며칠간의 단식으로 목소리에도 기력이 없었다.

휘가 비의 옆에 앉았다.

“그대가 먹지 않겠다면, 방도가 있다.”

“나가…….”

말이 끝나기 무섭게 휘가 비를 제 쪽으로 돌려세웠다. 그리고 잔의 물을 들이켠 후, 비의 입에 자신의 입을 대었다.

꿀꺽.

목을 타고 넘어오는 물. 비가 없는 힘으로 그를 힘껏 밀쳐보았지만 밀릴 리 없었다. 그러나 물이 다 넘어온 후에도 휘는 입을 떼지 않았다.

탐하듯이 깊숙한 입맞춤.

“웃…….”

비는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휘가 비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하고 싶은 만큼 실컷 입 맞춘 후에야 휘가 비에게서 입술을 뗐다. 비가 세차게 그를 노려보았다.

“어서 나가.”

그러나 상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너무 약이 올라 비는 일어나지 않던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어서.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

평소와는 다르게 존칭조차 생략한 채 분개한 비를 보며 휘는 차가운 얼굴에 웃음을 뗬다.

“이런 곳에 이렇게 있다가는 금세 곰팡이가 피겠군.”

그러더니 휘가 비의 말은 듣지도 않은 채 비를 들어 자신의 어깨에 걸쳐 멨다. 비의 허리가 반쯤 접혀 휘의 어깨에 걸쳐졌다.

“이게 무슨 짓이야!”

“난 연처럼 친절하지 않아서 말이다.”

그리고 휘는 그대로 터벅터벅 걸어가 방문을 드르륵 열었다. 놀란 궁녀들의 눈빛에도 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