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설인, 34세.
세상풍파에 지친 날, 오래전에 짝사랑했던 남자를 우연히 만났다.
스무 살 때부터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이 남자와 술을 좀 많이 마셨는데……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
“아무 일도 없었어.”
“어? 정말요?”
“순진하네? 이렇게 다 벗고 있으면서 그 말에 홀랑 넘어가고.”
그 순간, 어젯밤 뜨거운 기억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유혹적으로 휘어지던 둥근 눈매, 보기 좋은 호선을 그리는 예쁜 입매
그리고 귓가에 속삭이던 악마의 달콤한 목소리까지!
순진했던 시절에 짝사랑했던 남자와 우연히 만나게 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또, 그 관계가 이어질 확률은 몇 퍼센트일까?
-미리보기-
술을 물처럼 마신 뒤 잠에서 깨어나는 건 곤욕이다. 거기에 기억도 나지 않는 이상한 꿈까지 꾸고 있었다면 더욱.
“으…….”
머리가 울려서 찡그린 채로 눈을 뜬 설인은 온통 주름진 새하얀 시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낯선 곳이지만 너무 피곤해서 다시 잠들기 위해 눈을 감았던 그녀가 화들짝 놀라 다시 눈을 번쩍 떴다. 안개가 낀 것처럼 침침하던 머리가 또렷해졌다.
‘여기가 어디야?’
서른셋. 아니, 해가 바뀌어서 서른넷. 술 먹고 이상한 곳에서 눈을 뜨는 것은 점차 부담스러울 시기였다. 널찍한 방에는 자신이 차지한 커다란 침대와 그 반대편의 원목으로 추정되는 책상, 멀리 보이는 홈시어터와 그 앞의 소파, 그리고 소파 위에 앉아서 무언가를 열심히 보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뒷모습만 봐도 정체를 알 수 있는 남자. 혼란스러운 머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녀는 남자를 일단 외면하기로 했다.
설인이 소리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몸을 일으키자 덮고 있던 이불이 아래로 스르르 떨어졌다. 바삭거리는 시트 위에 앉은 자신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이었다. 서늘한 공기는 그렇다 치고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은 그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옷을 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닥에 떨어져 있을 줄 알았는데 깔끔한 바닥에는 천 쪼가리 하나 보이지 않았다. 설인은 옷을 대신해서 구겨진 시트를 몸에 두르고 바닥에 발을 디뎠다.
“이봐요.”
흑백영화를 보던 남자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샤워라도 한 건지 그의 머리카락 끝이 아직 젖어 있었다. 그녀를 보자마자 예쁜 눈매를 가늘게 휘면서 웃은 이수는 그녀를 감싼 시트를 잡아당겼다. 설인이 인상을 찌그러트리며 그의 손을 툭, 때리고 한 걸음 물러섰다.
“내 옷 어디 있어요?”
그는 그녀를 흥미로운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부끄러운 기색 하나 없이 멀쩡한 얼굴색으로 꼿꼿한 태도를 보이는 작은 여자가 자신의 아래에서 열띤 신음을 흘리던 여자가 맞나 싶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큰 내색 없이 그가 대답했다.
“옷걸이에 잘 걸려 있을 텐데?”
“내 속옷까지 걸어놓은 거예요?”
비싼 속옷이니까 잘 걸어두라고 본인이 으름장을 놓고는 정작 황당한 목소리를 내는 여자의 머리가 의심스러워서 이수가 보고 있던 영화를 일시정지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기억 안 나?”
술을 진탕 마셔도 필름이 끊긴 적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던 그녀는 지금 상황이 당황스러웠지만 그런 걸 내보일 정도로 무른 타입도 아닌지라 여전히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일단 마음을 다잡으니 갑자기 그의 짧은 말투가 거슬렸다. 자신은 계속 존대하는데 왜 이 남자는 계속 반말질인가?
“왜 반말이에요?”
하지만 먼저 말을 놓자던 쪽은 보드카를 들이부은 설인이었기에 어처구니가 없어진 그가 헛웃음을 지었다. 저 여자 정말로 기억이 없는 모양이었다. 천천히 소파에서 일어난 이수가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가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거짓말은 눈에서 다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잠깐, 진짜로 기억 안 나?”
“그렇긴 한데……. 뭐, 무슨 일이 있었든 징징거리지는 않을게요.”
그는 그녀의 똑 부러지는 말이 왠지 불쾌했다. 아무리 정신이 나가 있었다고 한들 자신에게 매달려서 가쁜 숨을 토해내던 여자였다. 알코올과 섞인 여자의 체취가 얼마나 자극적이었는데 이제 와 맨정신으로 차갑게 잘라 내버리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그녀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아무 일도 없었어.”
“어? 정말요?”
진짜 기억이 나지 않나 보다. 떠보기 위해 지껄인 말인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설인을 보니 그는 왠지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졌다. 어딘가 찔리는 느낌에 이수가 삐딱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작은 어깨를 쥐었다.
“순진하네? 이렇게 다 벗고 있으면서 그 말에 홀랑 넘어가고.”
따가운 시선이 위로 꽂혔다. 경멸보다는 조금 옅은 감정과 함께 뭐 이런 놈이 다 있냐는 생각이 그대로 드러난 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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