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의 유능한 차장, 잘나가는 의사남편 그리고 워커홀릭에, 기회주의자, 소셜크라이머인 그녀의 야망을 채워줄 든든한 후원자이자 연인인 오 실장.
무엇하나 아쉬울 것 없는 그녀가 이번엔 회장이 집에서 내놓았다는 막내아들 이현진을 잡았다.
단 하룻밤, 그녀 자신을 던져서 그를 회사로 끌어낸것이다.
어떤 대가를 위하여?

이현진의 유재희에 대한 관찰은 그랬다. 회사내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하여 그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는 여자라고.
그녀가 이번에 이용한 것은 자신의 과거 속 사람, 그 사람에 대한 연민. 그래서 이현진은 유재희를 용서할 수가 없다.
‘당신이 상상하는 것 이상의 것을 얻었다고 생각하세요.’
그녀의 말을 떠올리며, 이번엔 이현진이 그녀를 이용해주겠노라고 마음먹는다. 그녀의 추락을 통해 얻어질 자유를 위하여.


-본문 중에서-

“아. 죄송합니다. 여기 두 분이 계실 줄은 몰랐군요.”
문을 열고 들어서던 현진이 일부러 큰소리 내어 그들의 대화를 가로막았다.
“제가 방해가 되는 게 아니라면 자료를 찾아가도 될까요?”
재희는 그가 자신을 더 인식시키려는 듯 굴고 있음을 알았다.
“물론. 그렇지 않아도 나는 가 보려던 참이었으니까.”
“아뇨. 금방 자리를 피해 드릴 테니까 나누던 이야기를 나누시죠. 오 실장님.”
“아냐. 아까부터 유 차장의 일을 방해하던 사람이 나였으니까.”
“이런 설마요. 유 차장님에게 오 실장님이 방해꾼이라니요. 제가 알기로는 오 실장님이야 말로 유 차장님에게 절대적인 아군인데요. 그렇지 않습니까 유재희 차장님?”
현진이 재희 옆에 다가서서 그녀를 바라보며 살짝 웃더니 물었다. 재희는 입을 꼭 다문 채 책상에 펼쳐진 자료들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싸늘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오 실장이 재희 대신 답했다.
“그렇게 생각해 준다니 나야 말로 영광이지. 유 차장만큼 유능한 부하 직원이 나를 그렇게 봐준다면 말일세. 아무튼 나도 이참에 더 이상 방해하지 않고 집에 돌아가야겠군. 유 차장 너무 무리하지 마. 그러다가 몸 상하면 안 되니까. 아니면 퇴근 준비해서 같이 나가도 되고.”
“아…… 유 차장님, 제가 공장 설립에 대한 터키 측에 필요한 서류 목록을 받아 둔 것 같은데 어디에 두었는지 잃어버렸거든요. 혹시 다시 받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요. 가능하다면 지금 당장.”
오 실장의 말을 가로채어 현진이 재희를 붙잡았다. 그리고는 오 실장에게 단정 짓듯 덧붙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유 차장님을 집까지 안전하게 모실 테니까.”
현진의 말에 오 실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인사를 건네고는 자료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도 두 사람은 한참 말이 없었다. 재희가 자신의 USB에 자료를 옮기고 있으려니 그녀의 뒤로 현진의 조소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젠 회사 내에서도 당당하게 만나는 거군요.”
현진은 방해하듯 그녀의 노트북을 소리 내 닫으며 재희의 시선이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집까지 데려다 주고, 늦은 밤에도 회의를 가장해서 만나고. 회사 안에서도 이렇게 사람 뜸한 자료실에서 밀회를 갖는다 해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참으로 편한 사이군요. 두 사람. 부럽네요.”
“…….”
“아니 아무도 두 사람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상상을 하지 못해서 그런가? 유 차장의 취향이 독특하다는 것을 몰라서 그런가.”
“…….”
“하긴 나도 오 실장님이 그런 부류의 사람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군. 당신 일만 없다면, 어릴 적부터 존경했던 분이었으니까. 워낙 가정적이고 부하 직원들의 신뢰가 두터운 사람이니까. 아니, 아니, 젊고 유능한 여직원이 자신을 이용하기 위해서 호감이라는 감정으로 가장한 접근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만큼 순진하신 것일 수도 있고.”
“이봐요. 이현진 씨.”
현진의 독백처럼 이어지는 이야기의 허리를 자르는 재희의 말에 현진은 반가운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이상하게 보일 거라는 거 알아요. 나에 대해서 당신이 아는 만큼 나를 판단하는 것이겠죠.”
“그래요. 모두들 당신을 유능하다고 알고 있을 테고, 나는 거기에 당신이 남편 모르게 몇 명일지 모를 남자들을 쥐락펴락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정도를 더 알뿐이라고 할까.”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오 실장님까지 나를 통해서 색안경 끼고 바라보는 일은 없었으면 해요. 이번 프로젝트에서 당신이 견제할 사람은 그분이 아니니까.”
“오 실장님을 감싸고도는 모습이라…… 이런, 이런 눈물이라도 나야 하는 건가. 혹시 오 실장님이 당신의 남성 편력을 알게 될까 봐 나한테 연막탄 치고 있는 거라면 걱정 마요.”
장난처럼 이렇게 묻던 현진은 자신을 날카롭게 바라보는 재희의 시선과 마주쳤다. 마치 혐오스러운 것을 바라보는 듯, 경멸스러운 시선으로 이 따위 사람과 말을 섞고 있는 이 순간이 답답해서 짧은 한숨을 쉬더니,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서 당신의 재능을 펼칠 기회를 드리지요. 이 정도면 훌륭한 조건이 아닌가요?”
“나의 재능을 펼칠 기회라…….”
“내가 당신을 인정한다는 것 하나만으로 당신이 바라는 것이 대외적으로도 인정받는 것이라면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
“지금 나에게 거래하자는 겁니까?”
“그렇게 받아들이고 싶다면 그러세요.”
“어떻게? 어떻게 나를 서포트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군요.”
현진의 말에 재희는 이제야 그가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판단했다.
“그 정도는 당신에게 달려 있어요. 당신은 모르겠지만, 나라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가치가 그래요. 적어도 누군가에게 몸을 굴려서 얻은 자리는 아니니까. 내가 이 프로젝트에 매달리는 것만큼이나, 대외적으로도 당신이 나보다도 이 프로젝트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믿도록 해 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는 유 차장의 말을 천천히 되씹었다. 주위로부터 능력을 인정받는 것에 대해서 그녀도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인정하고 싶진 않았다. 물론 그녀는 자신의 능력보다 더 한 능력의 소유자로 보이고 싶을 테니까.
“당신이 한 일을 내가 한 것처럼 만들겠다?”
“원한다면.”
“내가 왜 그것을 원할 것이라 생각하는 거죠?”
“지금 이현진 씨가 회사에 기반을 잡기 위해선 그런 증명이 필요한 시기일 테니까요. 그렇지 않나요?”
그녀의 말에 현진은 웃기 시작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고, 유 차장도 현진이 회사에 들어와 자리 잡으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할 테니. 지금 자신이 그녀를 이용하기 위해서, 단지 아버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그녀를 협박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그 순간 현진은 유 차장이 자신에게 이렇게 당당한 이유를 찾았다고.
그저 무슨 뜻인지 모를 웃음, 그런 그의 반응에 재희는 잠시 당황스러운 듯 그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당신은 내가 왜 이곳에 기반을 잡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
“내가 그저 회사에 내 능력을 증명 받고 싶어서 이렇게 당신의 프로젝트에 매달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군요.”
“다른 뜻이 있었던 건가요?”
“다른 뜻이라…….”
현진은 잠시 생각하듯 말을 바로 잇지 않았다.
“이런 상상은 해 봤나요. 만약 당신. 내가 원하는 게 당신이라면.”
전혀 생각하지 못한 말에 재희가 그의 말을 머릿속으로 곱씹어 보고 있었다. 쉽게 다른 답은 나오지 않기에 재희는 결국 두 손을 들어 보이듯 그를 바라보았다.
“참 상처 받았겠죠. 마음에 둔 여자의 오해에…….”
“…….”
“꽤 상처를 받았겠죠? 그렇지 않아요?”
“그럴 일은 없으니까. 상상하지 않아요. 나는 장난칠 시간이 없어요. 이현진 씨가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없었던 이야기로 하겠습니다.”
재희는 모든 것을 다 정리하는 듯, 현진의 말을 잘라냈다.
“당신은 정말 나를 우스운 인간으로 만드는 데 재능이 있군요.”
“…….”
“걱정했어요. 당신…… 그래서 이곳에 온 거죠.”
“…….”
“미친 거라고, 나 잘 알아요. 그런데 이런 나를 이렇게 당신이 만들잖아. 당신이 나를 이렇게 멍청한 사람으로 만들잖아요.”
“…….”
“저 나이 많은 오 실장님 같은 사람에게 질투하는 꼴이라고는…… 차라리 내가 회사에 들어와서 당신이 유부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때보다 덜 비참하잖아. 이런 기분 당신은 알기나 해요?”
현진은 자신의 말을 증명이라도 할 듯, 재희에게 바싹 다가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혼란한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제 역할에 충실한 배우처럼 키스를 할 듯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나는 진지합니다. 이현진 씨.”
그 순간 재희가 뒤로 물러나며 단호히 이야기했다.
“이런 장난으로 시간 낭비할 이유는 없습니다. 제안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못 들은 것으로 해 주시면 좋겠군요.”
그녀의 손이 다급히 책상 위에 놓인 책들을 정리했다. 그동안 현진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그녀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을 뿐.
“정말 농담으로만 받아들이는 겁니까?”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 현진이 또다시 재희의 앞을 막아섰다.
“그 전에 당신에게 무례했던 거 사과합니다. 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없을 정도였으니까. 당신을 호텔 바에서 만났던 그날 그때 당신에게 갖게 된 그 감정을 다스릴 수 없어서, 사춘기 소년처럼 당신을 다시 만나고 싶었던 내 감정은 당신에겐 우습습니까?”
“…….”
“오 실장님 그분은 제가 어릴 적부터 존경하던 분이었습니다. 당신이 오 실장님에게 웃어 보이는 것조차도 내 속을 이렇게 만드는데, 사실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뒤엎을 정도였던 나를 당신은 몰라주는군요.”
“…….”
“당신이 이미 결혼한 사람이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힘들었는데. 그런데 당신은 나라는 사람조차 안중에 없다는 게 얼마나 나를 힘들게 했는지 당신은 상상이나 할 수 있습니까.”
“이현진 씨.”
“단 하룻밤. 내가 당신에게 그런 의미였다고 해도, 이젠 다시 한 번 만이라도 나를 봐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회사? 나에겐 의미가 없어요. 나에겐 당신이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입니다.”
두 사람 사이로 침묵이 흘러갔다. 현진은 유 차장이 돌아서서 다시 자신의 짐을 챙겨드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이야기에 동요하길 바라는 그의 생각대로. 그녀가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자료실을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현진의 입술 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