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윤진 오케스트라 단원 (바이올린). 이혼이라는 인생의 쓰디쓴 실패를 겪었지만, 가슴 속에는 늘 꺼지지 않는 불꽃같은 열정을 담은 여자.

문선우 라디오 국 피디. 냉정한 듯 무심한 듯 보여도 가슴은 언제나 따뜻한 남자. 과거 한 여자의 배신이라는 상처로 마음의 문을 닫았지만, 윤진을 만나면서 서서히 닫혔던 문이 열린다.

대학 시절 윤진과 선우는 단 한 번의 스치듯 짧은 만남을 갖지만, 그리고 그 운명적인 만남은 서로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지만 아쉽게도 그 인연은 빛을 발하지 못한다.
운명의 장난으로 인해 9년이라는 세월을 지나 각자의 상처를 안은 채 다시 만나게 되는 그들. 9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바이올리니스트가 된 윤진과 방송국 유명 피디가 된 선우는 결국 서로를 알아보게 되지만, 9년이란 세월 동안 비밀처럼 새겨진 각자의 상처로 인해 쉽게 서로에게 다가가지 못한다. 하지만 자석 같은 끌림은 점점 그들을 하나로 옭아매려한다.
순수했던 시절 수채화 같은 첫 만남을 기억하는 그들, 하지만 현실은 그들에게 관대하지 않다. 과연 그들은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본문 중에서-


“윤진 씨, 나 기억 못해요?”
“네?”
느닷없는 선우의 질문에 윤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우리 아주 오래전에 만났었는데…… 정말 기억 안나요?”
“네? 갑자기 무슨 말씀을…….”
“훗! 기억 못하는 군요. 하긴 거의 십년 가까이 됐으니 기억하기 힘들겠죠. 기억하는 내가 나 자신도 신기할 정도니까.”
선우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도통 종잡을 수가 없어 윤진은 아리송한 얼굴로 눈만 껌벅거렸다. 이 남자가 뭘 잘못 먹었나? 갑자기 왜 이래?
“나중에 사진 보여줄게요. 9년 전 그날 사진. 그럼 아마 기억 날 거예요.”
“네? 사진요? 제 사진 말씀하시는 거예요?”
이건 또 무슨 해괴한 말이지? 윤진은 점점 미궁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봐도 장난을 즐기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면 뭔가 착각을 하나? 윤진은 머리를 갸웃거렸다.
“훗! 보면 알게 될 거에요.”
선우는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윤진을 바라보며 다시 피식 웃었다. 사진을 보여준다면 아마 그녀도 기억할 것이다. 바이올린을 뒤에 매단 채, 엉덩이를 들고 자전거를 타는 사진. 9년 전 그날, 너무나 씩씩하고 발랄했던 그녀모습이 또 다시 떠올라 선우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아직도 윤진의 얼굴엔 선우를 웃게 만들었던 발랄함이 남아 있었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가는 선우의 뒷모습을 윤진은 턱을 괴며 바라보았다. 그녀의 코끝에는 그가 남긴 향기가 은근히 남아 있었다. 순간 윤진은 지금 멀어지는 선우의 뒷모습이 어제 서점에서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도망치듯 서점을 빠져나가는 그 모습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만의 착각인지 모르지만.
“뭘 그렇게 봐?”
윤진이 계속 선우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미소 짓고 있자, 지은이 이상한 눈빛으로 물었다.
윤진은 곧 미소를 지웠다.
“아무것도 아니야.”
“너 혹시…… 우리 피디님한테 첫눈에 반한 거야?”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스럽게 묻는 지은의 모습에 윤진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윤진은 이제 첫눈에 반하는 것을 믿지 않는다. 첫눈에 반하는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환상에서 깨어나면 현실은 그야말로 참혹하다. 그 참혹함이 그지없었던 전남편도 그 망할 첫눈에 반한 경우가 아니었던가. 그 의미 없는 허상을 쫓기에는 인생이 아깝다는 생각을 하는 그녀였다.
“훗! 아니야. 그냥 재미있는 사람 같아서.”
“노파심에서 하는 소리인데, 윤진이 너 행여나 저 남자 마음에 두지 마라. 너랑은 절대 아니니까.”
“참 많이도 앞서가네. 그런 거 아니라니까.”
“아니면 다행이고.”
윤진은 그때까지만 해도 지은이 왜 그렇게 선우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얘기하는지 몰랐다. 그리고 사실 남편이 죽고 난 이후, 남자에 대한 관심도가 현저하게 떨어졌기에, 관심도가 떨어진 만큼 그녀의 인생에 있어 남자는 무의미한 존재이기에 윤진은 지은이 하는 말도 별 신경 쓰지 않았다. 현재의 그녀로서는 더 이상 누군가에게 현혹되는 것은 사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