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7년 여름,
콜로라도 캐니언 시

한푼도 남기지 못하고 다 털리다니, 오늘따라 운도 더럽게 없었다. 여자 혼자 거친 남자들 틈에 끼여 있자니 괜스레 움츠러들었지만, 이브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이젠 어쩔 수 없이 마지막 카드를 내놓아야 했다.
바로 몸을 판돈으로 거는 것이다!
이브는 흩어진 카드를 재빨리 모았다. 카드 다루는 기술은 모두 라이언 부인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검은 머리 남자에게 되도록 시선을 두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냉혹해 보이는 그 남자에게 자꾸 시선이 갔다. 한마디 말도 없이 포커 판에 대뜸 끼여든 남자…….
이브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롤리 킹이나 제리코 슬레이터 같은 인간 쓰레기들을 상대하기도 벅찬 마당에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남자 때문에 주의를 흩트릴 순 없었다.
「파이브 카드 드로우(포커 게임의 한 종류), 자, 판돈들 걸어요.」
「잠깐! 다 잃은 주제에 뭘 걸고 카드를 치겠다는 거야? 양말짝이라도 걸고 할 생각인가?」
롤리 킹은 같잖다는 표정으로 이브를 꼬나보았다.
「여기 있잖아요.」
이브는 검지손가락으로 제 몸을 가리켰다.
「무슨 소리야?」
「내 몸을 걸겠다구요.」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롤리의 목소리에 의심이 잔뜩 묻어 있었다.
리노 모런은 침묵을 지켰다. 물어 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여자의 각오가 대단하단 건 처음부터 눈치챈 바였으니까. 흔들림 없는 눈동자와 굳게 다문 입술, 그 단호한 모습에 끌려서 자신도 이 포커 판에 끼여든 게 아니던가. 저 여자는 분명 지금 헛소리를 지껄이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니까요. 바로 날 걸고 하겠어요.」
이브는 다른 사람들이 내놓은 보석이며 금화를 죽 훑어보고는 카드를 뒤섞었다.
「이만하면 꿀리지 않는다 생각하는데, 생각 없으면 말고요.」
순간 침묵이 감돌았다.
주위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태껏 넘본 남자들은 많았지만 성공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얘기가 대부분이었다. 리노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본래 여자들이란 몸을 허락하기 전까지 남자를 달아오르게 하지 않는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최대한 많이 뜯어내기 위해서 말이다. 남자에 대해 잘 아는 여자일수록 더욱 그랬다.
리노의 시선이 여자에게 머물렀다. 침침한 술집의 조명이 벌꿀처럼 달콤해 보이는 금발을 부드럽게 감싸며, 황금빛 눈동자에 야릇한 분위기를 더했다. 거기다 새빨간 드레스까지……. 많이 파이진 않았지만 핏빛 드레스는 남자들의 시선을 끄는 데 그만이었다. 눈부시도록 반짝이는 흑옥 단추를 하나하나 끄르고 그 밑에 감춰진 우윳빛 살결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면…….
리노는 거기서 생각을 멈췄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남자를 구슬리는 데 도가 튼 여자를 만나 그렇게 혹독한 대가를 치렀으면서, 아직도 그런 철없는 생각을 하다니…….
제리코는 리노를 빤히 쳐다보며 진주와 금화를 만지작거렸다. 바로 조금 전에 이브한테 따낸 것이었다.
「이 정도면 그쪽이 롤리한테 딴 반지에 비해도 손색이 없겠지? 더구나 네놈이 갖고 있는 일기장 나부랭이보다는 백배 나을 테고.」
제리코는 리노에게 향했던 눈길을 롤리에게 돌리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웃기지 마. 내가 갖고 있는 일기장에는 보물지도가 붙어 있어. 이 지도만 해독하면 그깟 진주 정도는 아주 우습지. 진주가 동양의 신비한 보석이니 어쩌니 해도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고.」
제리코는 낡은 노트를 흘낏 바라보며 피식 웃을 뿐, 반박은 하지 않았다.
리노는 롤리한테서 딴 반지를 집어 들었다. 에메랄드가 고아한 빛을 발했다. 사실 에메랄드보다는 금에 관심이 많았다. 금은 감촉이 여자의 살결처럼 달콤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여자처럼 변덕스럽기가 죽 끓듯 하거나 변하는 법이 절대 없었다. 그리고 겉과 속이 달라서 실망을 안겨 주는 법도 없었다.
리노는 카드를 섞고 있는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브라는 이름도, 순진해 보이는 눈동자도 사실은 가짜이리라.
「그래, 우리가 내놓은 반지며 진주, 보물지도하고 비교해도 꿀릴 거 없단 말이지? 좀 그럴듯한 수법을 생각해 보는 게 어때?」
「롤리, 그냥 놔둬. 돈 대신 몸으로 때우겠다는데 무슨 상관이야. 여기 있는 것들과 수준을 맞추려면, 한 달 정도는 서비스해 줘야겠는데!」
제리코는 이브를 음흉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브는 등골이 오싹했다. 제리코 슬레이터 같은 놈과 한 달 동안 같이 지낼 생각을 하면 끔찍했다. 단 하룻밤도 견디지 못하리라.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번 판은 따낼 생각이었으니까. 속임수를 쓴다고 해서 양심에 가책을 받을 필요는 없었다. 슬레이터 패거리들이 응당 받아야 할 처벌이었으니까. 판돈이라고 올라온 보석들이며 지도는 롤리가 라이언 부부를 살해하고 빼앗아온 것들이었다. 이 정도 사기밖에 치지 못한다는 사실이 오히려 원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