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야릇 주의보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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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발,

    탁하고 따뜻한 저음이 둥근 귓불을 희미하게 스쳤다.

    하루의 허리로 밀려든 유려한 손가락이 갈비뼈를 묵직하게 움켜쥐자 눈 앞이 핑 돌던 순간에

    귓바퀴를 휘돌고 빠져나간 음성이라서 착각이었나 싶었지만 분명,

    혼탁한 음성으로 귓가에 두드린 준의 말이 귓가로 절절하게 밀려들었었다.

    그저 그녀가 느끼는 느낌뿐 이었을까.

    마치 여태껏 사람에게 깊은 신뢰와 믿음을 찾아 받아볼 수 없었던 것처럼 그녀를 찾는 손길과 입술은 다급했다.

    짙게 새겨진 배신의 굴레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사람처럼.

    "하읏. 준이 씨......."

    벌어진 하루의 입술에서 은근하게 타고 내려온 입술이 부드러운 목선을 타고 야릇한 혀놀림으로 여린 살점에 들러 붙었다.

    목가에 퍼지는 뭉근한 열기가 얼굴까지 피어오르자, 그녀의 눈동자가 희뿌연 안개속을 걷듯이 허공을 떠돌았다.

    기다랗고 풍성한 속눈썹이 내진했다.

    "당신이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게 싫군."

    흥분해 가빴던 그의 호흡은 여전히 시근거렸으나

    극렬하게 치받는 충동과 소유욕을 억제하려는 그의 눈동자가 선명한 초점을 되찾은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둘 만이 존재하는 묘한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이성을 되찾으려는 그녀에게 맞닿은 체온이 여전히 뜨거웠다.

    약간의 진정을 되찾은 눈길 속에서도 그녀를 시야에 담은 눈동자 또한 타오르고 있었다.

    아직 야릇한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해서 더 낮아진 저음이 그녀의 얼굴 위로 부서졌다.

    "......태현이랑은 친구로 남기로 했어요."

    바르르 떨리는 눈매를 가다듬어 그의 눈매를 주시하며 하루가 입술을 떨어트렸다.

    그에게 눈을 맞추며 불신 속에서 허덕이는 그를 안심시켜주었다. 쌍꺼풀이 없이 서늘한 눈매가 낮게 풀렸다.

    "그럼 준이...... 씨는요."

    무쌍에 작지 않은 눈매는 평소 그녀에게 차가운 느낌만을 주었지만

    가라앉아 한결 부드러워진 눈매에 그녀를 가로막았던 벽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눌러왔던 감정이 왈칵 쏟아졌다.

    "준이 씨는 저 말고 누가 또 있나요?"

    이러한 질문이 밖으로 흘러나오면,

    감정이 피어날까봐 겁이 나 알아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었다.

    "피식, 왜 내가 다른 누군가가 있었으면 해서 아쉽나."

    질문의 의도를 파악한 그의 눈이 예리하게 본래의 서늘한 눈매를 되찾았다.

    "누가 있다고 하면, 결혼 다시 무를 건가."

    하루가 마른 침을 삼켰다.

    대답하기가 애매하였다.

    아쉽냐고. 내가 왜? 그런 감정이 떠오를 이유가 없잖아.

    "아내로써의 책무를 다하라면서요. 그건 준이씨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렇지만 은근히 신경 쓰이는 부분이었다.

    그녀에게만 아내로써의 책무를 강조하는 건 불공평했다.

    "당신을 만나기 전 결혼 압박을 받고 있었어. "

    결혼을 촉구한 사람은 당연히 할아버님일 거고.

    "태산 그룹과 몸집을 불리면, 금화 그룹의 앞 날은 한층 유리해질테니까."

    말뜻인 즉슨, 태산 그룹의 딸과 결혼을 추진했었다는 얘기였다.

    "비즈니스 줄 알고 갔던 자리가 선 자리였더군."
    "아......"
    "그 후로, 그쪽 측 여자는 본 적도 없고. 얼마 안 있어 당신을 만나게 되었지."
    "......그랬군요."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방대한 가죽 소파 위에 부스스하게 흩어져 있던 머리결을 손가락 사이로 정리하며 등을 서서히 일으켰다.

    눈을 그의 눈동자에 맞추며 붉게 물든 입술을 열었다.

    "이제야 동등한 선상에 선 기분이 드네요."

    그처럼 그녀 또한 배신의 굴레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

    결혼의 목적을 잃지 않기 위해.

    삼 년 동안, 아저씨의 사무소랑 집안 식구들을 살리기 위해서.

    "... 부부는 원래 동등해야하니까요."
    "그렇네."

    그가 손으로 날렵한 턱선을 쓰다듬으며 수긍했다.

    "하지만 말이야."
    "......."

    그녀가 일으켜 세우는 걸 도우면서 허리를 붙잡고

    "높고 낮음의 위치를 떠나서."

    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겨주었다.

    "당신과 함께 가고 싶군."
    ".....저도요."

    그녀를 온후하게 머금은 시선이 부끄러워졌다.

    시선만큼 봄 날의 햇살처럼 부드러운 그의 미소가 심장을 세차게 두드렸다.

    모던하고 세련된 맨션 내부에서 유일한 봄날의 파스텔톤 처럼 환해졌다.

    그들이 조심스러운 가슴을 안고 내딛을 곧 다가올 푸른 웨딩 처럼.

    "흠흠...!"

    그의 미소가 얼굴 앞에서 퍼지자, 식어가던 열기가 다시금 피어올라 시선을 흠칫 옆으로 돌리며 목소리를 가다 듬었다.

    집안 정경을 살폈다.

    드넓고 모던한 그의 집,

    여기도 얼마 안 있으면 올 수가 없게 되겠지.

    신혼집은 따로 마련한다고 했으니.

    "아아."

    그녀가 집안 내부를 멀거니 바라보고 있자 그가 할 말이 생각났다는 듯이 잇사이로 저음을 터트렸다.

    *

    "친구 결혼식 있다며. 해외 로케 일정 그대로 진행해도 괜찮겠어?"

    테라스에 팔을 구부린 채 휴식하고 있던 태현에게 동료 피디가 다가섰다.

    "결혼식 때문에 일정 옮기자고 한 거 아니었어?"

    태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 하나 때문에 큰 로케이션 일정 옮기는 건 아닌 것 같아서."

    태현이 말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피식, 아니야. 정말 친구 결혼식이야. 로케 때문에 피치 못하게 못 갈 것 같다고 말했어."

    자기 자신을 속이기 위해 그 말이 진실이라고 태현은 스스로를 다독였다.

    "어, 이 작가한테 전화왔다, 알겠어. 수고."

    격려 차원에서 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 떠난 동료에게 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전 제작한 드라마의 편집 작업이 드디어 끝이 났다.

    '...못 갈 정도는 아닌데 말이지.'

    어쩌면 작업 때문에 일에 빠져 살던 강행군이 다행이었다.

    큰 로케를 미루고 결혼식에 참석할까 하여 추진한 적이 있었으나 원래 일정대로 진행시키기로 했다.

    -우리 좋은 친구로 남자.

    십 여년을 가슴 속에 덮어두었던 감정이 한순간에

    정리되던 잔혹한 순간을

    믿고 싶지 않으면서도 이제는, 떠나보낼 시간이 되었다.

    "안녕, 내 사랑......"

    희붐한 담배 연기가 공중에 아스라이 번져 갔다.

    *

    결혼 당일.

    "후우, 왜 이렇게 떨리지......."

    새하얀 숄더 드레스를 입고 신부 대기석에 앉은 하루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심장이 드레스 밖으로 튀어나올 만큼 떨린다고 해서, 결혼이 와닿는 것은 아니었다.

    결혼 계약이라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와닿는 일이될까.

    "삼 년만, 삼 삼년만 버티면 돼."

    혼자서만 들릴만큼 낮게 속삭였다.

    하루야! 어, 우리야.

    "세상에, 하루 너무 예쁘다. 드레스샵 에서 봤었지만 완성체가 되니 정말 예쁜 것 같아."
    "고마워."

    우아미가 넘치는 라운드 숄더 드레스를 입고, 틀어 올린 머리와 화사한 화장까지 두루 갖춘 하루가 파스텔톤 꽃다발을 들고 앉아 있는 모습은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자, 신부 측 친구 분이랑 사진 한 장 찍겠습니다."
    "네. 하루야 내가 그 쪽으로 붙을게."
    "응."

    찰칵. 여러 차례 하루와 함께 사진을 찍은 우리가 그녀를 향해 돌아 앉았다.

    "다른 애들은?"
    "곧 도착한데. 우리 네가 일찍 온 편이라서."
    "당연히 일찍 와야지. 결혼 준비도 못 도와 줬는데."
    "아냐, 준이 씨랑 잘 준비 마쳤어."

    하루가 긴장 속에서도 은근하게 미소를 내비쳤다.

    -아아. 혼수는 신혼집 안에 이미 준비되어 있어. 다만, 이번 주에는 출장 일정 때문에 다음 주에 보러 가도록 하지.
    -.....아뇨, 어차피 들어 가면 보게 될 텐데요.

    바쁜 그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가짜......결혼 하나 때문에.

    야외 외식을 한다고 어렴풋이 들었는데.

    이곳 야외 외식장은 커다랗고 성대했다.

    다만, 준에게 온전히 맡길 수 없는 결혼 준비 한 가지가 있었다.

    "준비 잘 마쳤다니 다행이다. 그런데 우리 사진 찍어 준 포토그래퍼, 엄청 유명한 포토그래퍼야. 나 잡지사에서 일하면서 한 번 초빙해 보려고 목을 멘 사람."
    "응...준이 씨가 신경 좀 써 줬어."
    "웨딩 사진도 저 사람에게 맞긴 거야?"
    "......응."

    웨딩 사진만은 두 사람 모두 참여해야하는 결혼 준비 과정이었다.

    *

    찰칵!

    "신랑 분이 신부 님께 조금 더 가까이 서 실게요."

    이미 충분히 가까운데. 포토그래퍼는 준이 자신에게 더 밀착하기를 바랐다 .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건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다가서는 그의 얼굴이 닿을 락 말 락 다가왔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결혼은 처음이라......"
    "일단 시키는 대로 하지."

    또 무던한 목소리.

    아......
    이 사람은 떨리지도 않는지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피식."

    셔터 소리가 터지자, 화들짝 한 발 물러 선 그녀를 향해 입꼬리를 슬며시 들어 올리며 은밀한 저음을 흘렸다.

    "한 두 번도 아닌데 왜 떨고 그러나."
    "......"
    "새삼 스럽게."

    얼굴이 화륵 불거졌다.

    "자 이번에는 신랑님께서 신부님 볼에 입 맞춰 보겠습니다."
    ".....보, 볼이요?"

    새하얀 조명을 받아서 더욱 반짝이는 큰 두 눈망울을 담은 눈꺼풀이 깜빡거렸다.

    "그래, 볼."

    하나, 둘, 셋. 포토그래프가 목소리에 맞춰 그가 끌어당긴 그녀의 드레스가 살포시 감긴 허리.

    커다란 손바닥이 감싸 쥔 허리가 끌어 당겨짐과 동시에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동그란 볼을 감싸 안았다.

    찰칵! 셔터가 강렬하게 플래쉬를 터트렸다.

    *

    "곧 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내빈 여러분께서는 자리에 착석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흐드러지는 봄꽃과 무성한 초록잎이 만개한 성대한 웨딩 식장.

    밝은 태양 아래,

    "신랑 입장!"

    준은 긴 다리를 뻗어 늠름하게 전진했다.

    이어,

    "신부 입장!"

    아무것도 모르고 눈물을 글썽이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버진 로드를 걸으려

    다이아가 촘촘하게 박힌 순백의 스텔레토 힐을 떨리는 걸음으로 내딛었다.

    마치 진짜같은 잔떨림을 느꼈다.

    '준비 됐어?'

    버진 로드 끝자락에서 그녀의 손을 넘겨 잡은 준을 아련한 눈동자로 올려다 보았다.

    그녀를 진득하게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가 하루에게 그리 말했다.

    '.....준비 됐어요.'

    쏟아지는 밝은 조명 아래, 그녀는 그를 올려다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 믿고 나아갈 사람은 그 뿐이라는 듯이.

    위태로운 계약 관계 속에서.
     
너만의 남자

식스

노크(knock)2025.02.05

9 서평 47개

단실’ 님의 한마디

준과 하루의 아슬 달콤 신혼로맨스 시작합니다.
1화
열람하시겠습니까?

댓글 1

  • coollove
    오늘도 재밌게 보고 가요

로망띠끄’ 연재 신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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