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 머피의 법칙

푸르던 잎들이 지표면을 뜨겁게 달군 햇볕을 그대로 받아내 노랗고 빨갛게 익어 버리고야 만 계절. 윤지는 아주 오래전 가슴속을 깊게 팬 상처가 굳은살이 되었을 즈음, 눈앞에 다시 나타난 원수 같은 그놈 덕분에 이제는 정말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어린 날의 자신을 마주해야만 했다. 생각해 보면 모든 일의 시작은 그날이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뜨거운 여름이 한풀 꺾이듯 지난날 뜨거웠던 기석과의 연애감정도 점차 식어갔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은 휴일이고 예전이라면 만나기 전까지 여러 통의 문자를 주고받았을 테지만, 이제는 약속 시각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윤지의 핸드폰은 잠잠했다. 먼저 전화를 걸 법도 하건만, 윤지는 매서운 눈을 하고 핸드폰과 인도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핸드폰을 들어 기석과의 문자창을 본 윤지는 아까 도착할 때 보냈던 문자의 미확인 표시를 확인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

순간 온몸을 휩쓰는 열기에 윤지는 입바람을 세게 불며 손 부채질을 했다. 하지만 윤지의 손 부채질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직도 내뱉을 열기가 남아있는 것인지 햇볕을 머금은 아스팔트의 열기가 발바닥을 타고 올라오면서 온몸을 녹여버릴 듯했기 때문이었다. 종아리까지 내려온 검은색 시폰 소재 롱스커트에 흰 바탕에 검은색 가로줄 무늬 면티를 받쳐 입고 검은색 가죽 소재 네모난 미니 백을 크로스로 멘 다음 머리카락을 동그랗게 말아 틀어 올린 윤지는 벌써 사십 분째 그 자리였다. 안 그래도 확 구겨져 있는 윤지의 얼굴이 휴대전화를 들어 시간을 확인하고 나선 더욱더 구겨졌다. 근래 들어 연락이 늦어지는 일이 잦았지만, 윤지는 일하다 보면 자신에게 조금은 소홀할 수 있는 거라고 그러니 그에게 어린애처럼 투덜거려선 안 된다고 자신을 다독이곤 했다. 하지만 기석은 그런 그녀의 노고를 알긴 하는지 점점 더 늦어지는 것도 모자라 이젠 연락마저 잘되지 않았다. 혹여 그가 자신과의 약속을 까맣게 잊은 게 아닌가 싶었지만, 집에서 출발하기 전 보낸 문자에 답이 왔었기에 그것도 아닌 듯했다. 팔짱을 끼고 오른발을 탁탁 소리가 나게 구르던 윤지가 참지 못하고 휴대전화를 들어 올려 단축번호를 누르려 손가락을 가져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녀의 손가락이 닿기 직전 기석으로부터 먼저 전화가 걸려왔다. 액정에 뜬 ‘기석 씨’라는 이름을 매섭게 쏘아보던 윤지의 오른쪽 입꼬리가 언제 그랬냐는 듯 비스듬히 치켜 올라갔다. 정말이지 귀신같은 타이밍이었다.

“오빠, 어디세요? 오고 있어요?”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꾹꾹 누르며 부드럽게 말하는 윤지의 목소리에 당황한 기석이 우물쭈물했다.

- 윤지야… 이거… 어떡하지? 저기 그게… 엄마가… 욕실 청소 하… 다가 미끄러지… 셔서 허리를… 좀 삐끗하셨어…. 그래서 내가 모시고 병원에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은데…?

전에 없이 더듬거리는 기석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석연치 않은 기운에 윤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그렇게 전화를 하고 문자를 해도 답 하나 없더니 한 시간 만에 전화해서 서둘러 통화를 끝내려는 그의 태도 때문일까? 하지만 엄마가 다치셨다는데 왜 이제 전화했냐고 따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쩔 수 없죠. 병원 잘 모셔다드리세요….”

윤지가 쓴 입맛을 다시며 겨우 속에 있는 다른 말들을 삼켜냈다. 연애 1년 반이 넘은 시기까지만 해도 기석은 그녀에게 더없이 다정한 사람이었다. 1분만 늦어도 중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손이 발이 되게 빌었고, 기분을 풀어주려 애쓰던 사람이 바로 기석이었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윤지가 더 늦었으면 늦었지 기석은 거의 늦는 일도 없었다.

- 그럼… 내가 이따 전화할게!

“아… 저기… 그러면 제가… 병원….”

윤지가 묻고 싶은 말들을 겨우 삼켜내는 사이, 기석은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핸드폰을 귀에서 뗀 윤지는 빈 화면을 응시하며 깊은 한숨과 함께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옮겼다. 오랫동안 한자리에 서 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잘 신지 않는 연분홍 에나멜 힐 때문인 건지 뒤꿈치가 아려왔다. 억지로 발걸음을 옮기던 윤지는 뒤꿈치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얼마 가지 못하고 멈춰서 고개를 돌렸다. 빨갛게 부어오르고 물집이 잡힌 뒤꿈치를 확인한 윤지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다.

“힝.”

안 그래도 혹시 기석에게 찾아온 권태기 때문에 싱숭생숭하던 윤지의 마음이 막 불어오는 뜨뜻해서 기분이 나쁜 여름 바람에 맞춰 사정없이 흔들렸다. 자신을 위해 노력해준 참 따스했던 기석의 모습들 때문에 윤지는 이 뜨거운 바람을 자신의 노력으로 이겨낼 수 있으리라 여겼었다. 그래서 기석에게 일부러 더 연락하고 기분을 맞춰주려 노력했건만 그럴수록 엇나가는 느낌이었다. 한동안 인도 한가운데에 멍하니 서 있던 윤지는 이내 크게 도리질을 치고는 일부러 밝게 웃었다.

‘그래, 내가 더 잘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