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 그놈의 속셈

수인과 요즘 화제인 최신 영화를 보고 난 후, 잠시나마 즐거웠던 윤지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영화를 보는 동안에도 재준이 얄밉게 웃는 얼굴이 떠올라 윤지는 내내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영화관 아래쪽에 있는 커피숍에 수인과 함께 마주 앉은 윤지는 그간 재준과의 일을 모두 털어놨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수인이 박장대소했다.

“진짜 대박이다. 둘이 인연은 인연인가 봐.”

웃음 띤 수인과 달리 윤지는 그녀의 말에 진절머리를 쳤다.

“아 싫어, 어떡해.”

말끝마다 우는소리를 하는 윤지의 모습에 수인은 겨우 멈춘 웃음을 다시 터트렸다.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재준에 의해 살짝 조작되었음을 전혀 알 리 없는 두 사람이었다. 재준이 중학교 때 윤지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일은 정작 윤지 본인을 제외한 반 아이들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때 어긋난 두 사람이 이렇게 다시 만나 썸(?)타는 일이 있으리라 생각지 못했던 수인은 이 우연이 정말이지 재밌었다. 꽤 쌀쌀한데도 속이 타는지 냉커피를 빠르게 빨아들이는 윤지의 모습에 수인의 웃음소리는 멈출 줄을 몰랐다.

“야! 양수인! 그만 웃어! 이게 진짜 말이 돼? 정말 말도 안 돼! 아, 엄마가 그놈하고 내 소개팅 자리를 만들 일은 없을 거로 생각했단 말이야. 어떻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

아무리 생각해도 빠져나갈 길이 없는 것 같아 절망에 빠졌다. 수인이 잔뜩 울상지은 윤지의 어깨를 다독이며 위로했다,

“뭐 어때? 그것도 맞선은 맞선이니까 나가서 밥 먹고 차 마시고 하고 오면 돼.”

달고 따뜻한 커피를 손에 쥔 수인의 얼굴이 지난 사랑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가 순간 낯빛이 어두워졌지만 금세 사라졌다. 수인의 말에 온몸에 열이 오른 윤지가 인상을 찌푸린 채 입을 쩍 벌렸다.

“말도 안 돼! 내가? 걔랑?”

사사건건 말꼬리를 잡는 재준과 함께 여느 맞선남들과 하듯이 밥을 먹고 차를 마실 생각을 하니 윤지의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순간 윤지는 자신을 향해 씩 웃는 재준의 얼굴이 떠올라 컵을 꽉 쥐고 짙은 초록색 빨대를 쭉 빨아 남은 커피를 마셨다.

“말이 안 될 건 또 뭐야. 남자고 여잔데. 내가 보기엔 재준이도 무슨 생각이 있으니까 그러는 거 같은데? 그깟 데이트 하면 되지. 아예 모르는 남자들보단 편할 거고. 억지로 의미 없는 질문들 안 해도 될 거 아냐.”

빈 빨대를 입에 문 채 이로 잘근잘근 눌러대던 윤지가 빨대를 확 뱉더니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쥐고 도리질을 쳤다.

“으아! 대체 무슨 생각인 거 야아! 이거 나 약 올리려는 거지? 그런 거지? 친구 할 마음 없다면서 대체 뭐냐고! 어색하게 대체 무슨 얘기를 해? 나 어떡해? 그냥 내일부터 회사 가지 말까?”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지르며 울상 지었다가 웃었다가를 반복하며 홀로 모노드라마를 찍는 윤지의 모습에 수인이 또 피식 웃었다.

“걔가 그런 말을 했어? 친구 안 한대?”

“내가 다시 옛날 인연 잇지 말고 일만 하자고 했거든. 그니까 자기도 다시 친구 할 마음은 없댔어.”

윤지의 말에 수인이 의미심장한 눈동자로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하, 그래?”

“근데 이게 지금 뭐 하는 거냐고. 난 지금 정말 심각하니까, 너 자꾸 웃지 마.”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자신을 노려보는 윤지의 모습에 수인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어이구, 정말 귀여운 우리 윤지. 내가 그놈도 아닌데 왜 그런지 어떻게 알아. 네가 이러니까 재준이가 그러는 거 아냐.”

수인의 말에 윤지의 눈썹이 꿈틀거렸고 곧이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내가 뭘?”

내내 투덜거리던 윤지가 쿵이처럼 도리질을 치며 습관처럼 볼을 부풀렸다. 윤지가 못마땅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자 수인이 다시 커피 한 모금을 넘겼다.

“그렇게 신경 쓰이면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고 대놓고 물어보지 그래? 근데 왜 그러는 건지는 느끼고 있잖아? 아직은 모른 척하고 싶은 거지?”

정곡을 찌르는 수인의 말에 내내 푸념의 목소리를 멈추지 않던 윤지의 입술이 꾹 다물어졌다. 그와 동시에 잠잠하던 윤지의 심장도 덜컥 내려앉았다.

“재준이 정도면 솔직히 엄청 괜찮은데, 이참에 잘해봐.”

수인의 말에 윤지가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빠르게 붙였다가 떼며 주문을 외우듯 말했다.

“아아아아, 안 들린다! 안 들린다! 안 들린다!”

내버려 두면 멈추지 않을 것 같은 윤지의 모습에 수인이 피식 웃으며 윤지의 손을 잡아 뜯어말렸다.

“아, 알았어! 그만!”

수인이 만류하자 윤지는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입술을 삐죽 내민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남녀가 맞선 보는 건데 별일이야 있으려고?”

자못 심각한 윤지와 달리 수인의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윤지가 잔뜩 울상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