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어라, 바람이어라. 오롯이 바람이어라.

애달픈 그대를 위해 나 바람으로 화하리니

임이시여, 임이시여 옷깃 시치는 미풍 불거들랑 날 잊지 마소서.

#서장

670년 당나라 장안(長安. 당나라의 수도)

「아직도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냐?」

자신의 질문에 아무런 대꾸나, 심지어 변명조차 하지 못하는 여인을 바라보던 사내의 눈빛이 싸늘해지며 선해보이던 눈매마저도 살짝 일그러졌다.

「너란 여자…….」

항시 어두운 분위기를 풍기며 주위사람들을 압도하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냉정함과 꼿꼿함을 유지하는 태산 같던 그가 연약하기 그지없는 한 여인으로 인해 흔들리고 있었다.

말끝을 흐리고는 한참을 골몰히 생각하다 이윽고 깊은 한숨을 내쉬던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떠한 행동을 하고자 숨을 가다듬었다.

「내 이렇게…… 부탁하겠다. 이제 그만 그를 놔주도록 하여라. 너를 힘들게 하는 그에 대한 기억은 이제 그만 바람결에 자유롭게 흘러가도록 놔주었으면 한다.」

「…….」

생전 누군가에게 부탁이란 것은 해보지도 않았거니와 앞으로도 하지 않을 것 같은 그가 보잘것없는 한낱 전쟁포로에 불과한 그녀를 향해 간절한 눈으로 부탁이란 것을 하고 있었다.

처음엔 그저 그녀의 처지가 딱하여, 그녀가 처한 위기에서 구해주고 싶었을 뿐, 모르는 척 무시하고 싶었다. 허나 자꾸 신경을 거스르며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자 짜증이 일었고, 힘들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몸소 느끼게 해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깟 감정하나로 힘겨워하는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돌연 화가 치밀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자신의 가슴 깊은 저 밑바닥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 때마다 부러 모른척하고자 술에도 취해보았고, 생각하고 싶지 않던 그녀의 모습이 열기로 변해 눈앞에 아른거릴 땐 기루를 찾아 기녀의 몸도 취해보았다. 하지만 언제나 해갈되지 않는 목마름을 느끼게 하는 그녀는 누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서서히, 서서히 그를 지배하려하고 있었다.

누군가로부터 그녀가 힘들어하는 것이 모두 자신의 탓이란 것을 알았을 때는 눈앞이 캄캄해 그녀에게로 향하는 마음을 접어보고자 무진장 노력했다. 다른 누군가를 연모하는 것은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라 여겼던 그였기에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는 감정이었다. 그러나 눈치 빠른 서우란 놈이 이런 꿈같은 기회를 놓쳤을 리 만무했고, 그 또한 자신의 마음을 더 이상 감추고 싶지 않았다.

「처음 너를 보았을 때 이리 될 줄 알았어야 했는데……. 날 바라보던 그 눈을 보며 짐작했어야했는데, 내가 어리석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알고 싶지 않습니다. 왜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요?」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는 감정을 자신의 입으로 듣고 싶은 것인지, 정녕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왜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묻는 휘은의 모습에 왈칵 역정이 났다.

「왜? 지금 왜냐고 물었느냐? 그렇게 궁금하다면 내 말해줄 것이니 똑똑히 듣기 바란다.」

한마디, 한마디 또박또박 뱉어냈지만 쉬 입을 떼지 못하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떠한 이유로든, 하물며 그게 전쟁이었다 하더라도 네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이제 그만이었으면 좋겠다. 특히나, 인명은 제천이라는데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에 그렇게 목메는 우매한 짓은 이제 그만했으면 싶다.」

버석거리는 손바닥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쓸어보던 그는 커다란 결심이라도 한 듯 말을 이었다.

「잊기 힘들면 잊지 말거라.」

전혀 뜻밖이라는 듯 조그마한 얼굴에 놀라움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그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고통스러움을 감수해가며 억지로 잊으려하지 말라는 말이다. 살얼음판을 걷듯, 그렇게 위태로워 보이는 네 모습이 안타까웠다. 그렇기에 그와의 기억만으로 힘겨워하는 너를 더욱 미웠는지도 모르겠다. 한때는 네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널 힘들게 했던 적도 있었고……. 난 이미 내 손을 떠난 것에 미련을 두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해왔고, 또 그러려고 무던히 노력했던 사람이다. 그게 물건이든 사람이든……. 예전에, 아주 오래전에 내 것이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욕심을 내었던 적이 있었다. 그것이 나 자신에게 고통스런 올가미를 씌우는 것인 줄 깨닫기까지 오랜 세월동안 몸소 고통으로 겪어야 했지. 하지만 난 지금, 또 다른 올가미를 씌우게 될지도 모르는 일을 하려한다.」

「저…….」

「끝까지 들어라.」

그녀가 무슨 말인가 하려고 입을 열려하자 그는 서둘러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렇지 않는다면 평생 후회할 것이 분명했기에.

「지금 너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 내겐 얼마나 용기가 필요한 일인지 모를 것이다. 그러니 잠자코 끝까지 내말을 들어라.」

「…….」

「내 너를 향해 천천히, 조심스럽게 한 발자국씩 내딛고 싶다. 허락하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