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님, 손님 와 계십니다.”'“손님?”'조 대리가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눈을 깜짝였다. 우진은 저 인간이 왜 저리 수선일까, 눈을 치켜떴다. 그러나 팀장실에 들어선 순간, 조 대리의 수선이 이해가 되고도 남게 되었다.'드레시한 원피스를 입은 서해가 책상에 걸터앉아 신문을 보고 있었다. 달라붙는 스타일의 보랏빛 벨벳 소재가 쭉 뻗은 몸매와 모양 좋은 다리를 돋보이게 했고, 옷 색상에 어울리는 화장으로 얼굴은 한 층 더 화사해 보였다.'요부 같은 여자에서 정숙해 보이는 여자로, 그리고 터프한 워킹 걸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던 서해의 또 다른 모습에 우진은 잠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지금의 강서해는 이전의 극단으로 치닫던 모습들이 화해와 타협을 거친 것 같았다.'“회의 한번 되게 길다?”'그녀는 문가에 우뚝 멈춰 선 우진을 흘낏 보더니 마치 제 사무실인 양 편안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신문으로 눈을 돌렸다. 우진은 저 여자가 도대체 뭐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여기에 들어왔는지 궁금해졌다.'“뭐야, 왜 왔어?”'“할 일 없이 남자나 꼬이고 다니는 여자가 아니란 건 당신이 더 잘 알잖아? 당신 꼬이자고 온 건 아니니까, 걱정 붙들어 매!”'“다, 당신?”'“너라고 하지 말라며. 너보단 우대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네가 얘기하니까, 영 우대 같지가 않다.”'“그럼, 오빠라고 불러 줄까?”'“됐다, 됐어. 오빠? 차라리 너라고 부르는 게 낫겠다, 야.”'“너무 좋아하진 마. 당신이란 호칭은 단순히 나이 많이 먹은 데 대한 우대니까. 당신이 나한테 너, 너 하며 막 대하는 걸 그만두지 않는 이상 나도 똑같이 할 거야.”'우진은 자신을 나잇값 못하는 고집쟁이 아저씨로 전락시켜 버린 서해를 노려보았다. 그의 머릿속은 저 여잘 어떻게 혼내 줘야 분이 풀릴까, 그 생각뿐이었다.'“무지하게 고맙다, 강서해. 눈물이 앞을 가리겠어!”'“천만에.”'서해는 우진의 치받은 화를 돋우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우진은 당장이라도 서해를 사무실 밖으로 내쫓고 싶었다.'“왜 왔는지나 말해.”'“작은아버지께서 저녁 사준다고 당신이랑 나오라고 하셔서.”'“작은아버지? 설마 우리 사장님?”'“우리 작은아버지 한 분밖에 안 계셔. 몰라? 늦었어, 서둘러야겠다.”'우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 강성호 사장을 위시하여 사내 임원진과 사적으로 만나는 일이 없도록 철저히 선을 그어 왔던 우진이었다. 그는 지난 주 강서해와의 거래가 한성건설 상품개발 팀장 이우진의 근간을 흔들어 버리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강서해, 우리 언제쯤이면 서로 안 볼 수 있는 거냐?”'“나, 너무 미워하지 마. 그러다 미운 정 들라.”'“뭐, 미운 정?”'“고운 정보다 끊기 힘든 게 미운 정이래.”'“끊기 힘들어? 너랑 공포영화 찍을 일 있냐! 섬뜩한 소리 작작해라.”'“농담을 못해요, 하여튼. 조금만 기다려! 곧, 돈 빌릴 수 있을 것 같아.”'“누구한테?”'“아는 선배한테.”'우진은 서해에게 될수록 빨리 빌리라고 다그쳤다. 생각지도 못한 긴장과 초조 속에 사느니 부자 사이도 금한다는 은행 보증이라도 서겠다고 나설 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