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해.”''“…….”''“좋아한다구.”''“…….”''“내 거였으면 좋겠어, 이석주가.”''“…….”''“다른 여자 보면서 그렇게 웃는 것도 싫고, 또 다른 여자 보면서 그런 목소리로 그런 말투로 말하는 것도 다 싫어.”''복잡하기만 했던 마음은 한결 느슨해졌지만 괜스레 목이 탔다. 이안은 이제 물로 변해 버린 탱크보이를 들고 끝까지 다 마셔 버렸다. 석주가 팔을 뻗더니 이안의 손에서 빈 껍질을 가져가 자신의 것과 함께 손에 들었다. 그리고 다시 이안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 순간 그는 어쩌면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다른 여자 보면서 너한테처럼 웃지 않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어.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그리고 이런 목소리로도 또 이런 말투로도 말하지 않을 수 있어. 하지만…… 지금, 너와 특별한 관계가 되는 건 안 해. 넌 이제 겨우 스물한 살이고 해야 할 일도 산재해 있는 고시생이야. 나 또한 고시생은 아니지만 해야 할 일이 산재해 있는 건 똑같아. 그리고 무엇보다 하이안은, 내 친구 하이현의 동생이기도 하지.”''“무슨……뜻이야? 내가 우리 오빠 동생이라서 싫다는 거야? 아니면 어려서 싫다는 거야? 것도 아니면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 안 된다는 거야? ……뭐야, 대체! 그래서 내가 좋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그 어떤 약속도, 지금은 할 수 없다는 소리야.”''“그럼 시간이 얼마나 지나야 되는데?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좋아지긴 할 거란 뜻이야?”''“본질을 흐리지 마, 인마. 좋아하지 않는다는 소리가 아니라 사랑을 약속할 수 있는 시점이 아니라는 소리를 하는 거야.”''“됐어, 말하지 마! ……내가 아까 4번 지켜서 말하라고 했지? 결국 그 뜻이잖아. 예뻐하는 동생이지만 사랑을 약속할 만큼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뜻. ……아니야?”''그는 여전히 눈길 한 번 옮겨가지 않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또 그 눈빛 또한 뭔가 모를 안타까움을 지닌 채였지만, 그래도 그는 자신의 말에 번복하지 않았고 또한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진짜, 바보 이석주! 약속도 안 지키는 멍청이 이석주! 두고 봐, 앞으론 아는 척도 안 할 거야!”''이안은 그대로 벌떡 일어나 버렸다. 계단과 미끄럼판 앞에서 아주 잠깐 본능적으로 고민하긴 했지만 결국 조금 모양 빠질지 몰라도 미끄럼판을 선택해서 빠르게 내려왔다. 뒤에서 그가 그녀를 부르며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돌아서는 순간 흘러내리기 시작한 눈물이 눈앞을 다 가려 버렸다. 그래도 잠깐 걸음을 멈춘 이안은 마치 눈물 따위 흔적도 없는 척 그에게 씩씩하게 소리쳤다.''“따라오거나 잡아서 돌려세우면 죽을 줄 알아!”''뭔가 드라마틱하게 가련한 여주인공처럼 말하고 싶었지만 내뱉고 보니, ‘나 너무 슬퍼서 죽을 것 같아.’도 아니고 ‘잡으면 죽을 줄 알아.’였다. 가볍게 실소를 던졌다. 하이안, 이래서 넌 안 되는 거야. 또다시 그녀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이안은 그대로 뛰어 버렸다. 이석주 따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점점 작아져가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해도 그것 또한 모른 척 해 버렸다. 변명 따위 필요 없었다. 어차피 아닌 건 아닌 거니까. 쌓아온 마음만큼 가지고 왔던 욕심만큼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이안 나이 스물한 살. 오랜 첫사랑의 고백은 그렇게 순식간에 끝이 나 버렸다. 그것도 이해할 수 없는 거절로. 그래서 더욱 다시는 보지 않겠다는 오기 같은 다짐이 생겨났는지도 모르겠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걸음만 내딛으면 자꾸만 옛 기억이 떠올라 그녀를 주춤하게 만들었다. 처음 그와 같은 학교 법학과에 원서를 넣었다고 했을 때, 그가 했던 말.''‘뛰어넘어야 할 산이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야. 도전하는 설렘 속에서 빠르게 뛰어 올라, 하이안. 그리고 잊지 마. 설렘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건 네가 그냥 안주해 있다는 뜻이라는 걸.’''또 그가 입대하기 직전, 적당히 취한 그에게 그녀 또한 법조인의 길로 들어서기로 결심했다는 말을 전했을 때, 그는 따스한 웃음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뭔가 모를 한숨을 짓기도 했다.''‘하이안! 법조인의 마음에는 늘 사랑이라는 단어가 든든히 자리를 잡고 있어야 해. 그리고 지나가는 길에 보이는 한강의 풍광을 바라보는 여유마저 없는 사람이 되어서도 안 돼. 마음에 여유가 없으면 의뢰인을 받아들일 공간이 없어지니까. 그러니까 마음의 휴지통을 비우는 걸 잊지 마.’''그렇게 삶의 비전과 다짐 같은 걸 제시해 주며 늘 자신의 길을 구축해가고 있던 이석주. 그녀에게 있어선 닮고 싶은 인간상이었으며, 또 존경의 대상이었으며 그래서 더 가지고 싶었던 사랑이었다. 그런 이석주였기에 그들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감정이 사랑이 다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 순간 이안은 석주가 원망스러웠다. 아니, 어쩌면 그래서 더 원망스러웠는지도 모르겠다. 이안은 흘러내리는 눈물 속에서 단단히 울부짖었다.''‘두고 봐, 이석주! 내가 훨씬 더 잘 되어서 오늘 일을 정말 후회하게 해 줄 테니까.’''이안의 스물한 살의 여름이 설익은 사랑의 감정을 뒤덮을 만큼의 크기로 다가온 오기 속에서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