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비밀 하나. 실은 나 염혜석은 단추에게 저주받았다.'어릴 때부터 단추 끼우는 걸 그렇게나 못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초등학교 들어간 후로도 종종 셔츠를 입을 때 실수를 해서 등교한 후에 누가 말을 해준 후에야 실수를 깨닫고는 했다. 다행히도 내 상의 중에 셔츠가 차지하는 비중은 몇 안 돼서 매일 그리 칠칠치 못한 짓을 하고 다니진 않았다. 어머니인 염혜완 여사는 다른 일은 다 어른 뺨치게 잘하는 애늙은이 딸이 단추를 낄 때면 번번이 애를 먹는 꼴을 보며 그래서 사람은 공평한 거라고 깔깔대기만 하셨을 뿐, 단추를 못 채우는 딸을 위해 뭘 어찌 해보겠다는 생각 같은 걸 할 사람은 아니었다.'여헌의 집에서 살게 된 이후로는 내 방에 전신거울이 생긴 덕분에 그런 실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하지만 중학교에 올라간 후로도 이따금씩 블라우스 단추를 잘못 끼워 입는 일은 벌어졌는데 그럴 경우 아침인사를 받으실 때 아주머니가 아무 말 없이 톡톡 건드려서 알려주시곤 했다. 그렇지 않으면 여헌이 먼저 보고 잠이 덜 깼냐고 한심해 하거나.'아무리 신경을 써도 어느 순간 방심해 버리면 단추는 어김없이 이상한 곳에 가서 끼워져 있다. 이런 일이 노이로제가 될 정도로 예민한 편은 아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 초월해 버렸다. 결국 내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날 보는 누군가가 지적을 해주기 마련이다, 하면서.'고등학교를 졸업한 뒤로 나는 셔츠 종류의 상의와는 인연을 끊었다. 증명할 수는 없지만 단추와 나 사이에는 일종의 타협 불가능한 척력(斥力)이 작용한다는 심증은 충분하기에 택한 길이었다. 세상에는 단추의 자리를 대신할 지퍼라고 하는 아주 훌륭한 발명품도 있고.'그렇지만 때때로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단추를 잘 못 끼우는 나의 특이한 약점은 살면서 종종 다른 일에서도 비슷한 패턴으로 나타나지 않는가 하는.'첫 번째 구멍에 끼웠어야 할 단추가 두 번째로 가버렸다. 그 아래부터는 찬찬히 끼워봤자 아래 하나가 남는다. 어라? 하고 생각했을 땐 이미 늦다. 단추를 다시 끼우는 것처럼은 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니까.'되돌아갈 수가 없다. 내가 첫 단추를 잘못 끼워서 그러니 처음부터 다시, 라고 말해봤자 먹히지 않는다. 특히 사람이 상대일 때는.'억울하다. 나는 첫 단추를 꿰는데 남들보다 서툴 뿐인데.''그런 식으로 내가 잘못 끼웠다고 생각하는 단추가 있다.'“뽀뽀.”'안경을 끼지 않은 눈에 허연 백설기처럼 보이는 흰 얼굴이 다가오더니 나와 정수기 사이를 가로막으며 대뜸 그런 말을 던졌다. 막 일어나서 머리가 영 멍한 데다가 입을 벌리고 잤는지 입 안이 사막처럼 말라 있는 나로선 눈앞의 촉촉하다 못해 광이 반짝반짝 나는 생물체가 심히 못마땅하다.'“물 마실 거야. 비켜.”'목소리도 갈라져서 나오는 게 가칠가칠하다. 어제 생리도 끝났고 해서 욕조에 꽤 오래 들어가서 노닥거린 게 역효과를 불러왔나 생각해 보면서 목을 조물조물해보았다. 목 속에 고슴도치라도 사는 것처럼 따끔거렸다.'“너 어젯밤에도 건너뛰었어. 오늘 누구 덕에 푹 잤는지 생각 좀 해보지?”'백설기 녀석의 면상에서 핑크색에 가까운 입술이 불만스러운 듯 삐죽거렸다. 그 입술을 보면서 얘는 여자로 태어났으면 팔자가 사나웠을 거라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물론 곧 정신을 차렸다.'“해줄게. 해줘. 근데 물 좀 마시겠다고. 물도 마시고 양치질도 한 다음에. 나 막 자고 일어난 거 안 보이냐?”'손에 든 컵을 백설기의 눈에 보이도록 흔들었다. 백설기, 그러니까 여헌이 그 컵을 가져가더니 물을 받아서 내 입술에 댔다.'“마셔라, 혜돌.”'“나도 손 있다.”'이건 또 무슨 장난인가 싶어 인상을 썼지만 입술에 찰랑거리며 닿은 물이 딱 마시기 좋을 만큼 따뜻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며 후르륵 물을 마셨다.'“옳지. 착한 내 애기.”'어느샌가 여헌의 손이 머리 위에. 낚인 건가. 그래도 물은 달았다.'“주니어는?”'“일찍 분유 먹고 나랑 요 앞 공원 다녀와서 쿨쿨 잔다. 지금이 몇 신 줄 아냐, 잠꾸러기?”'“몇 신데.”'“아홉 시 반도 넘었어.”'“헤에.”'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서 무심코 방으로 가려다가 이젠 그만 자야지 하며 욕실로 방향을 틀었다. 뒤따라오며 여헌이 볼멘소리를 했다.'“그러니까 누구 덕분에 이렇게 푹 자는지 생각은 하냐?”'“고맙다고.”'손을 휘휘 저으면서 저리 가란 시늉을 했다. 여헌은 저리 가주긴커녕 키 차이를 이용해 내 정수리에 머리를 올려놓고 꾸욱 누르기 시작했다.'“말로만? 너 슬슬 날로 먹기 시작한다?”'“해줄게. 해줄게. 좀 씻자. 자고 일어나서 나 지저분한 몰골 안 보이냐? 가뜩이나 백설기 같은 주제에 여자한테 그러는 거 아니다. 아, 내가 여잔 거 알긴 해? 하긴 상관없나?”'그렇게 말하면서 욕실 앞에 이르러 손잡이를 잡았는데 돌려서 열기 전에 여헌의 손이 문 위쪽을 짚으며 방해했다.'“아무리 잠이 덜 깨도 그렇지 내 성정체성을 의심하는 거냐, 혜돌?”'나는 여헌의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부러 씨익 웃었다.'“의심은. 희망사항도 말 못하냐.”'“무슨 희망사항?”'“있어, 그런 게. 손 치워 좀. 왜 사람이 깨끗해지겠다는데 자꾸 방해해? 절로 가라고!”'밀쳐냈다. 결국 여헌은 아침부터 내 안의 폭력성을 끌어내는데 성공했다. 또 방해하기 전에 재빨리 욕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칫솔에 치약을 짜서는 뚜껑을 덮은 변기 위에 앉아 칫솔을 입에 물었다. 치약의 알싸한 매운 맛에 잠이 약간 더 깬다. 그러자 여러 의미에서 한숨이 나왔다. 간지럽지도 않은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린 뒤 이윽고 눈을 감은 채 양치질을 시작했다.'드디어 양치질하고, 세수하고, 머리까지 빗었더니 반은 사람 같이 느껴졌다. 이제 파자마만 갈아입고 안경을 쓰면 진짜 사람이 된다는 생각에 씩씩하게 욕실문을 열었다. 그리고 한 걸음 내딛었을 때, 복병을 만났다.'“야, 잠……!”'기습에 걸렸다는 걸 깨닫자마자 두 손을 들어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말 그대로 무의미한 항쟁이었다. 간단히 붙잡힌 두 손과 함께 허리가 뒤로 꺾였다. 우두두둑 하고 뭔가 심각한 소리가 들린 게 내 착각이길.'눈을 뜨고 있었더니 내게로 쏟아지는 여헌의 머리카락에 찔릴 것 같아 결국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방금 전에 씻으면서 썼던 비누 냄새마저 희미해지게 만드는 여헌의 좋은 향기가 분명하게 느껴졌다. 포개어진 입술은 늘 그렇듯 촉촉하고 부드럽다. 립밤이 뭐에 쓰는 건지도 모를 텐데, 입술마저 부드러운 걸 보면 미인은 타고나는 게 분명하다.'“오케이. 어젯밤 분량은 끝.”'그렇게 말하며 여헌이 입술을 뗐다. 산뜻하다. 여헌의 말대로 이것은 뽀뽀 수준의 키스다. 단순히 입술을 겹칠 뿐이다. 외국인들의 인사처럼. 다만 그 시간이 할 때마다 늘어나는 게 아닐까 싶은 건 역시 내 노파심이길 바란다.'“어젯밤 분량이라니? 밀린 빚 청산도 아니고?”'똑바로 서면서 나는 허리를 만져보았는데 멀쩡하기만 했다. 젊음은 위대하구나 하는 생각의 한편으로 튼튼한 유전자를 갖게 해준 염혜완 여사에게 마음속으로 감사했다.'“그게 싫으면 그때 그때 해주던가. 자발적으로 하지도 않는 주제에.”'어차피 하면서도 이런 소리를 듣다니. 억울하다.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가 대뜸 생각나는 대로 여헌에게 다가서며 발꿈치를 들었다. 입술이 거의 닿으려는 순간에 여헌이 뒤로 머리를 빼는 바람에 실패했다.'“왜 피해? 자발적으로 해주려는 참인데?”'“니가 못 하니까.”'“뽀뽀가 입술만 닿으면 되는 거지 뭘 잘 하고 말고가 있어?”'“그러니까 니가 못 한단 소리야.”'그러면 자발적으로 안 한단 소리를 말던가. 당최 이해할 수 없는 논리를 펼치는 여헌을 쏘아보다가 이대로 물러날소냐 하고 마음을 굳혔다. 이번엔 손을 이용해 여헌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피하지 못하게 그를 벽으로 밀어붙였다.'“엇…….”'휘둥그레진 여헌의 눈을 무시하고 번개처럼 네 번, 아니 이왕 하는 거 여섯 번 뽀뽀를 했다. 그런 후에 놔주면서 입술을 손등으로 훔쳤다.'“사흘 분. 토 달지 마.”'돌아서려는데 여헌이 뒤늦게 따지고 들었다.'“미, 미리 해주기 없어!”'“빚은 받아가면서?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이렇게 성의 없는 거 인정 못해!”'“아주 가지가지 해라? 무슨 룰이 온통 니 맘대로야?”'“왜 그렇잖아. 생일 선물은 생일 당일에 주는 거지, 귀찮다고 삼 년 분 미리 주는 게 있냐? 그렇게 무성의한 선물 받아서 기뻐할 사람이 어디 있냐고?”'“억지로 끌어다 붙이지 좀 마. 하여간 사흘 분. 난 입 씻었어.”'그러고서 재빨리 자리를 떴는데 여헌이 따라오는 기색은 없었다. 방으로 돌아와 파자마를 벗고 옷을 입었다. 화장대 앞에 앉아 뒤늦게 화장솜에 스킨을 적셔 얼굴을 닦아내다가 잠시 손을 멈추었다.'거울에 비친 뺨이 퍽 붉다. 센 척했는데 아직까지 홍조가 남을 정도로 쑥스러운 걸 티냈구나 싶어 솔직히 한심해졌다. 얼굴 전반적인 홍조 때문에 입술도 여느 때보다 더 붉다. 조금 메말라 보이는 게 신경 쓰여 립밤을 열어 손가락으로 입에 펴 발랐다. 그러다 더 한심해져서 고개를 푹 숙였다. 이마로 화장대를 콩콩 소리가 나게 찍으면서 중얼거렸다.'“아, 진짜 이건 아닌 것 같은데.”'자기혐오는 오래 하지 않는다. 바로 고개를 들고 기초화장을 마쳤다. 핸드크림을 들다가 아침준비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내려두고 일어섰다.'주방에 들어섰을 때 조리대 앞에 여헌이 서 있어서 움찔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주방에 납시었나, 도련님이? 슬쩍 옆으로 가면서 보니 계란껍질이 싱크대에 수두룩했다.'“밥 대신에 계란만 먹게?”'얼추 봐도 일고여덟 개는 되지 싶어 뜨악해서 물었다. 계란을 휘젓고 있던 여헌이 시무룩한 얼굴로 날 보지도 않고 말했다.'“오므라이스 해줘.”